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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언시(3, 직지)

o 잠언시(3, 직지) o 직지(直指)  구녕 이효범 달을 보려거든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지 말고손가락이 가리키는 먼 허공을 보아라.손가락은 길고 어둡지만달은 둥글고 환하다.물맛을 알려거든남의 글만 읽지 말고바가지에 물을 떠서 마셔보아라.글은 평면적이고 딱딱하지만물은 멈추지 않고 생생하다.나무를 지탱하는 것이 땅속의 뿌리이듯이존재는 보이지 않는 근거에 세워져 있다.보이는 세계의 거센 물살에 빠져노예처럼 허우적거리며 살지 말아라.발밑의 보이지 않는 근거를 보아라.근거 없는 근거가우리를 들어 올리고 자유롭게 하리라.

잠언시 2024.08.21

잠언시(2, 사제와 과학자)

o 잠언시(2, 사제와 과학자) o 사제와 과학자  구녕 이효범 나에게는 뚱뚱하고 마른 두 명의 고향 친구가 있습니다.뚱뚱한 친구는 요한복음을 이렇게 읽었습니다.“태초에 사랑이 계시니라. 이 사랑이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사랑은 곧 하느님이시니라. 사랑이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사랑으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사랑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사랑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마른 친구는 요한복음을 이렇게 읽었습니다. “태초에 유전자가 계시니라. 이 유전자가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유전자가 곧 하느님이시니라. 유전자가 태초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유전자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유전자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

잠언시 2024.08.10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3, 장마)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3, 장마) o 장마  구녕 이효범  울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그런 날이다. 어제도 그런 날이었다. 하늘까지 울고 싶었나 보다. 어제도, 오늘도 비가 내린다. 내일은 그만 멈추시라. 땅까지 따라 우시면 장가 한 번 가지 못하고  고향을 지키다 서럽게 살다 간 어릴 적 내 친구 묻힐 곳이 없어라.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2, 불변의 도)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2, 불변의 도) o 불변의 도  구녕 이효범 노자는 말했다.“말할 수 있는 도는 불변의 도가 아니고,명명할 수 있는 이름은 불변의 이름이 아니다.”붓다는 영취산에서 꽃을 들어 보였다.마하 가섭만이 빙그레 웃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100권이 넘는 신학대전을 쓰다가,하느님의 빛을 보고 붓을 꺾었다.“내가 이제껏 쓴 것들은내가 보았고, 나에게 계시된 것에 비하면한낱 지푸라기에 불과하다.”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을 요약했다.“말할 수 있는 것은 명확히 말하고,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그렇다.불변의 도와 하나가 되어,침묵이 말하는 것을 듣는 사람은하느님의 빛을 볼 것이다.그 사람은 꽃을 보고 웃을 것이다.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31(산티아고)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31(산티아고)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31(산티아고)  구녕 이효범  산티아고까지는 25km 남았다. 오늘은 15km만 걷고, 내일 새벽 동녘에 붉은 해가 뜰 때 개선장군처럼 포부도 당당하게 입성해야지 하고 계획했다. 그런데 숙소를 예약한 라바콜라(Lavacolla)에 오니 점심밖에 안 되었다. 오는 길이 상대적으로 파도가 잔잔했고, 내리막이었다. 그리고 알림판에 20km 남았다니, 가슴이 뛰기 시작했고, 등에 멘 배낭이 초등학교 때 허리춤에 찼던 도시락같이 가볍게 느껴졌다. 이 시골에서 하루를 썩을 수는 없다, 그냥 직진하자. 내가 누구인가. 개구멍이 전공이 아닌가.  산 마르코스(San Marcos)에 오니 길옆에 조그맣고 깔끔한 성당이 있다. 순례..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30(살세다)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30 (살세다)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30 (살세다)  메리데(Melide)에서 살데다(Salceda)까지 25km를 걸어왔다. 어제 숙소인 알베르게에서 글을 쓰려고 1층 다용도실로 내려오니까, 한국 할머니 두 사람이 막 저녁을 먹으려고 한다. 나를 보더니 미리 알았으면 밥만 더 하면 되었는데 하며 미안해한다. 75세, 70세인데, 이번에 세 번째라고 한다. 동생이라는 분은 관절주사를 맞고 왔고, 지금 허리 진통제를 먹으며 걷고 있단다. “나는 한 번도 힘든데, 아프다면서 왜 세 번씩이나 걸어요?” 내가 물었다. 동생이라는 분은 웃으며, 산티아고에 향수가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른다고 했다. 왠지 자꾸 오고 싶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종교가 60%, 성취감..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9(멜리데)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9(멜리데)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9(멜리데)  구녕 이효범  오늘은 짧게 걷기로 한다. 이곳은 산을 낀 스페인의 전형적인 시골 지역이어서, 한 25km 정도에 순례자들이 묵을 적당한 마을이 없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제 조금 무리해서, 거리를 줄인 것이다. 떠나기 전에 거울을 보니 웬 상노인이 얼굴이 굳어있다. 염색이 지워져 흰머리가 가득하다.   8시에 호텔을 나서니 조금 늦어서인지 단체 순례자들이 여러 팀이다. 학생들은 동서고금이 똑같다. 말 같이 가는 놈, 황소처럼 길을 쓸고 가는 놈, 이것저것 참견하며 가는 놈, 어떤 여자아이는 다른 친구들과 달리 멋을 낸다고 꾸몄는데, 애교가 있다. 내 앞에 무리에서 떨어져 두 여자아이가 간다. 한 아이는..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28(팔라스 데 레이)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8 (팔라스 데 레이)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8 (팔라스 데 레이)  구녕 이효범  오늘도 안개가 자욱하다. 복숭아 2개, 토마토 1개를 먹고 길을 떠난다. 호수를 지나 처음 오르막이 벅차다. 안개와 숲이 만드는 동굴 같은 오르막을 30분 오르니 푸른 초지의 능선이 나온다. 오늘은 무슨 길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갑자기 내가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과거의 가난, 수많은 방황, 구차함, 쓸쓸함과 황량함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면에서 자꾸만 돌아가 보라고 강요한다. 어릴 때는 나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거의 변함이 없을..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3, 산티아고 순례길)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3, 산티아고 순례길) o 산티아고 순례길  구녕 이효범 산티아고 가는 길은 무한으로 이어져 있다.허허벌판과 산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걸어가야 한다.말도 할 수 없는 외로움을 견뎌내야 한다.등에 진 배낭이 자기 재산의 전부이다. 그러나 아무리 고난의 길을 걸어간다고 해도성인이 간 길을 그대로 따라가는 것은 순례가 아니다.성인의 무덤에서 무거운 배낭을 내려놓고환희에 젖어 멈추는 것도 순례가 아니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이끈 것은야고보 성인이 아니라, 바로 나였다.평생 나는 나로 살았지만, 나의 숨, 나의 유전, 나의 두뇌,나의 의식, 나의 영혼, 내가 존재하는 의미, 나의 죽음,아,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아직도 알 수 없다.그러니 나는 너를 모르고,세상이 왜 없지 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