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여행기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28(팔라스 데 레이)

이효범 2024. 6. 8. 09:06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8 (팔라스 데 레이)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8 (팔라스 데 레이)

 

구녕 이효범

 

오늘도 안개가 자욱하다. 복숭아 2, 토마토 1개를 먹고 길을 떠난다. 호수를 지나 처음 오르막이 벅차다. 안개와 숲이 만드는 동굴 같은 오르막을 30분 오르니 푸른 초지의 능선이 나온다. 오늘은 무슨 길이 펼쳐질지 궁금하다.

 

갑자기 내가 다시 한번 과거로 돌아가서 다시 생을 산다면 어떻게 살까 하는 의문이 떠오른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과거의 가난, 수많은 방황, 구차함, 쓸쓸함과 황량함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내면에서 자꾸만 돌아가 보라고 강요한다. 어릴 때는 나의 자유의지로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었으므로, 고등학교 입학 때까지는 거의 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고등학교 일 학년 때, 심한 방황 끝에, 학교를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를 닦는다고 했어도 내 근기를 볼 때 고승 대덕이 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혹시 도 닦다가 헷가닥하여 신흥종교 교주가 되었으면 어땠을까? 그것도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나 신흥종교가 건전하게 성장하는 곳도 없지 않지만, 많은 곳이 문제가 있다. 사실 그런 종교 교주는 진리의 빛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속적인 욕망에 휘둘리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아무리 권세가 세고, 겉으로 보아 그럴듯해도, 그런 곳은 다 가짜이고 사이비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사이비의 길로 가지 않은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나는 서강대 철학과를 마치고 몹시 미국으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여러 여건이 안 되어서 결국 못 갔지만,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인생을 다 걸고 모험을 하고 싶다. 그래서 내가 프린스턴 대학교 철학 교수가 될 수만 있었다면 얼마나 멋졌을까? 그곳에서 세계 철학계의 최고 지성들을 만나고, 그들과 고색창연한 영국식 캠퍼스를 거닐면서 철학을 논할 수 있었다면, 그럴 때 프린스턴 대학 옆에 있는 고등연구소에서 물리학을 연구하는 아인슈타인의 후배들이 참가하고, 천문학 전공자와 인공지능을 연구하는 교수까지 합세하여, 우주의 시작과 끝을, 시간의 처음과 마지막에 대하여 열띤 토론을 할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렇다고 내가 평생 근무했던 공주사대를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금강이 흐르는 백제의 아름다운 고도 공주에서 나는 참으로 행복했다. 중고등학교에서 윤리를 가르칠 유능한 교사를 양성하는 일은 보람 있는 일이었다. 학생들은 가난했지만 똑똑했고 인성도 훌륭했다. 그렇지만 내가 더욱 연구하고 제자들에게 더욱 엄격하지 못한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된다. 그곳에서 나는 평생을 함께하는 좋은 동료 교수들을 만났다. 골프를 늦게 배운 나는 동료들의 밥이었지만, 그래서 내기 골프에서 매번 돈을 잃어 3년 동안은 이불을 쓰고 울었지만, 아직도 골프장에서는 누가 공을 슬쩍 옮기나 서로 고양이 눈을 뜨고 경계하지만, 그래도 그들과 어울리는 것이 재미있다. 지금은 내가 가끔 돈을 따는 경우도 생겨 더욱 즐겁다.

 

사실 유학을 못 간 것이 한이 되기는 해도, 철학은 국내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학문이다. 오히려 원효, 지눌, 퇴계, 율곡, 다산으로 이어지는 한국의 철학사는 국내파들이 이룬 업적이다. 수많은 재능있는 외국 유학파들이 공부를 마치고 국내에 들어와 그 시대를 화려하게 장식했지만, 각각의 시대마다 이 땅의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여 참다운 결실을 내놓은 이는, 여기를 떠나지 않은 우둔하고 미련한 자들이다. 해방 후 우리 철학계는 한동안 독일 유학파가 석권하더니, 언제부터인가는 미국 유학파가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철학의 시대는 사라졌다. 대학에서 철학과가 폐과되고, 아무도 철학을 중시하거나 거들떠보지 않는다. 그렇지만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그의 영혼이듯이, 민족과 그 문화를 기반하는 것은 철학이지 않을 수 없다.

 

나는 유학을 가지 못해 프린스턴 대학의 교수가 되지 못하고 공주사대 교수가 되었지만, 그러나 철학은 얼마든지 국내에서도 할 수 있다면, 그렇다면 너의 철학은 무엇인가? 불행하게도 아직 나의 철학은 없다. 그러나 나는 이제 진지하게 賢者(wise man)’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현인의 철학을 세우고자 한다. 현자들은 시장으로 간 사람들이 아니라, 산이나 동굴이나 광야로 간 사람들이다. 그곳에서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기고, 보통 사람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본 사람들이다. 산 정상에서 산 너머까지를 본 사람들이며, 인류의 지성이 걸어온 지난 길을 높은 곳에서 꿰뚫어 본 사람들이다. 그들은 존재의 근거에 가까이 간 사람들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들은 바로 길을 걸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 시대 사람들에 앞서는 지혜를 갖고 있다. 정보나 지식이 홍수처럼 사람을 침몰시키는 이 시대에 그런 현자들의 지혜가 절실하다. 시간이여, 나에게 조금 더 머물어다오. 나는 그런 현자의 철학을 세우겠다.

 

포르토마린에서 팔라스 데 레이까지는 26km밖에 안 되지만, 고개를 오르고 내리고를 반복하여 힘든 길이었다. 천천히 걷기는 했지만 8시간이 걸렸다. 중세 때 이 마을은 순례의 마지막 단계에서, 순례자들이 쉬거나 함께 가는 그룹을 만들었다는 곳이다. 그러나 나는 내일도 혼자 걸을 것이다.(2024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