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오늘(시집) 21

권주가

o 권주가 구녕 이효범 먹세, 먹세, 잔 돌리며 먹세, 말은 짧게 하고, 눈이 즐겁게 먹세, 자연의 오묘한 맛이 이 한잔에 모두 녹아 있으니, 먹세, 먹세, 목이 타도록 마시세, 내가 나를 벗어나는 길은 오직 술뿐, 그래서 술은 신이 준 고마운 선물, 선물 주신 이를 위해 우선 건배, 삼백육십오 가지 술먹는 이유가 있으니, 밤새워 먹세, 배짱 좋게 꺾세, 돈 없으면 어떤가?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고 무엇이 대수인가? 아내도 얻고 자식도 있으니 더 이상 무엇을 바랄건가? 골치 아픈 문제는 그 잘난 정치인들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저 오늘 하루 꽃피고 벌과 나비 나는 것에 감사할 뿐, 술 모르는 자는 사랑도 모르고, 술 취하지 않는 자는 우정도 없나니, 먹세, 먹세, 술잔 바닥을 머리에 엎으며 껄껄 웃으며 마..

왓찰롱 사원

o 왓찰롱 사원* 구녕 이효범 사원이 무상으로 열려 있다. 세상의 가장 가난한 장사꾼들이 세상의 가장 가난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가장 하찮은 물건들을 세상에서 가장 싸게 팔고 있다. 세상의 가장 힘없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크게 웃고 있다. 세상의 개들도 거침없이 걷고 있다. 세상에 감출 보화가 없으므로 사원은 스스로 지켜지고 있다. * 태국 푸켓에 있는 사원

어금니

o 어금니 구녕 이효범 어금니가 빠졌다. 남자가 사라졌다. 갈비를 뜯어본 자는 알리라. 밀림을 호령하는 사자처럼 산다는 것은 어금니로 먹이를 갈갈이 찢어놓는 일. 쩝쩝 피맛을 즐기고 씨익 웃으며 흙묻은 손으로 입가를 슬쩍 닦아내는 짓. 또 이 생에 무엇이 남았다고 죄수처럼 치과에 끌려가는가? 견딜 수 없을 때는 왼손을 드세요. 왼손을 드세요? 키스해 주세요. 어금니가 쏙빠지도록. 차라리 벌어진 입으로 백기를 들어라. 어금니를 깨물어야 앞으로 질주할 수 있다. 질주하여 먹이를 단 번에 잡지 못하면 그것은 사자가 아니다. 그것은 남자가 아니다.

황홀

o 황홀 구녕 이효범 황홀. 듣기만 해도 황홀하다. 꽃피는 것도 구름이는 것도 낙엽지는 것도 눈내리는 것도 황홀하다. 당신을 만난 것도 아이가 태어난 것도 황홀하다. 그러나 젊었을 때는 세상이 전쟁이었다. 사방팔방이 한숨이었고 눈물이었다. 꿈꿀 때나 꿈 깨서나 한결같이 지옥이었다. 그러나 나는 모르겠다. 그것이 운명이었는지, 우연이었는지 시간이었는지, 신이었는지. 맹세코 모르겠다. 그것이 물이었는지, 불이었는지. 몸이 헐렁해진 날 황홀이 나에게 왔다. 바닥에 쓰러진 정신을 언덕에 세웠다. 멀리 저녁노을이 황홀하다. 밤하늘의 별도 황홀하고 되돌아보면 도시의 불빛도 황홀하다. 우주 너머 우주가 있듯 황홀 넘어 황홀이 있다. 모든 날이 황홀하다.

바닥

o 바닥 구녕 이효범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이 두꺼운 얼음인 것을. 땅 위를 걷어가는 사람은 입술로 말한다. 파닥 뛰어 얼른 나오라고. 온 몸의 열기로 녹여야만 하는 얼음 얼음이 녹기 전에 내가 얼음이 되는 얼음.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은 안다. 바닥이 깊은 그리움인 것을. 온 정신으로 지워야만 하는 그리움 그리움을 지우기 전에 내가 지워지는 그리움. 바닥에 떨어져 본 사람은 안다. 바닥에는 바닥이 없음을.

개와 친구

o 개와 친구 구녕 이효범 나이든 친구들은 개를 기른다. 개를 싫어했던 사람도 변명하며 개를 기른다. 개를 기를수록 개 이야기가 늘어난다. 같은 사람들은 욕하면서 모든 개는 찬양한다. 개는 배반하지 않고, 개는 가식이 없고, 개도 똥·오줌을 가리고, 개도 생각을 하고, 개도 배려를 한다. 개를 기를수록 개와 하나가 된다. 개와 밥 먹고, 개와 대화하고, 개와 산책하고, 개와 잠잔다. 나이든 친구들은 개 같은 얼굴이 된다.

오래된 오늘

o 오래된 오늘 구녕 이효범 사람은 오늘 죽는다 내일이 아니라 오래된 오늘 죽는다 묘지에 쓰인 날짜는 타인의 죽음이다. 고양이에게 쫓긴 쥐가 어두운 구멍으로 도망쳐 들어가듯 오늘 막다른 순간 빈 구멍으로 홀로 내가 연습도 없이 빨려 들어간다. 내일이면 세상은 있어도 내가 없다 나의 죽음은 글자가 된다 나의 죽음은 타인의 먹이가 된다 나는 밝은 어둠으로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