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o 친구여, 놀러 오렴 구녕 이효범 친구여, 대전을 지나다가 문득 생각나면 들러 주렴. 우리집은 대덕과학연구단지 내 신성동에 있는 (럭키) 하나 아파트 101동 403호이니 호남고속도로 유성 톨게이트를 빠져 나와 충남대 후문을 지나 인삼연구소를 찾으면 쉽다구. 나는 과학자들 틈에서 살지만 언제나 과학 너머를 꿈꾸고 있지. 가까이에 구즉 할매 묵집이 있고 숯골 냉면집도 있으니 좋다면 같이 갈 수도 있네 물론 돈은 내가 내지. 방이 넷이니 며칠 묵어도 좋아 단지 담배만 조심하면 된다구. 나야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아내에게 잘 보이고 싶으면 색깔 고운 초 하나면 족하지 초를 사오는 남자는 멋이 있다나 철학자 부인 같은 이야기이지. 아내가 낭만에 젖어 고기를 굽는 동안 우리는 촛불을 밝히고 술을 하자구 흥이 나면..

o 가물치 구녕 이효범 해산한 아내을 위해 묻고 물어 시장 한 모퉁이 가물치를 찾았더니 아주머니 빙그레 웃으시며 누런 종이에 물 몇 모금 적셔 꾹꾹 말아 검정 비닐 봉지에 싸주시네 오는 길에 책방에 들렀더니 가물치는 놀란 듯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시집 앞에 섰던 단발머리 소녀가 해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네 소녀는 알 리가 없지 이것이 가물치인 걸 설령 보여준다 해도 모를 거야 언젠가 그녀도 이것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징그럽고 두툼하고 미끄러운 가물치를 씻어 들통에 넣고 기름을 붓고 가스불 위에 올렸더니 잠잠하던 가물치는 화들짝 기겁을 하네 온 힘으로 뚜껑을 누르며 가물치의 운명을 생각한다 너는 어느 강에서 나서 누구의 손을 거쳐 아내의 허기진 배를 위해 여기에 와 있는가 친구들은 수초 사이에서 맘껏 뛰놀..

o 입맞춤 구녕 이효범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해보셨나요 첫 입맞춤을요 당신은 언제부턴가 각본을 짜고 장소를 물색하고 벼르고 별러 큰 일을 수행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 내일을 기약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찾아오는 법 노란 은행잎 밑이어도 좋고 고운 노을이 지는 한적한 들판도 괜찮아요 아니면 아무 곳이면 어때요 영화 장면 같지 않아도 당신과 그녀가 있으면 그곳이 다 그곳이에요 연습도 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떨렸을까요 당신은 두려웠을 거예요 무례하다고 그녀가 가버린다면 어쩌나 입술은 보기보다는 훨씬 더 감미로운 곳 어떠했나요 그녀가 화를 냈나요? 화를 내지 않았다면 당신이 첫 남자가 아니에요 어떠했나요 다시는 안 만난다고 했나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첫 사랑이 아니에요 어떠했나요 말없이 그냥 떠났나요? 그..

o 가물치 구녕 이효범 해산한 아내을 위해 묻고 물어 시장 한 모퉁이 가물치를 찾았더니 아주머니 빙그레 웃으시며 누런 종이에 물 몇 모금 적셔 꾹꾹 말아 검정 비닐 봉지에 싸주시네 오는 길에 책방에 들렀더니 가물치는 놀란 듯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시집 앞에 섰던 단발머리 소녀가 해맑은 눈을 동그랗게 뜨네 소녀는 알 리가 없지 이것이 가물치인 걸 설령 보여준다 해도 모를 거야 언젠가 그녀도 이것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징그럽고 두툼하고 미끄러운 가물치를 씻어 들통에 넣고 기름을 붓고 가스불 위에 올렸더니 잠잠하던 가물치는 화들짝 기겁을 하네 온 힘으로 뚜껑을 누르며 가물치의 운명을 생각한다 너는 어느 강에서 나서 누구의 손을 거쳐 아내의 허기진 배를 위해 여기에 와 있는가 친구들은 수초 사이에서 맘껏 뛰놀..

o 입맞춤 구녕 이효범 사랑하는 사람과 입맞춤을 해보셨나요 첫 입맞춤을요 당신은 언제부턴가 각본을 짜고 장소를 물색하고 벼르고 별러 큰 일을 수행하려 하지만 번번이 실패 내일을 기약하지만 내일은 반드시 찾아오는 법 노란 은행잎 밑이어도 좋고 고운 노을이 지는 한적한 들판도 괜찮아요 아니면 아무 곳이면 어때요 영화 장면 같지 않아도 당신과 그녀가 있으면 그곳이 다 그곳이에요 연습도 할 수 없었으니 얼마나 떨렸을까요 당신은 두려웠을 거예요 무례하다고 그녀가 가버린다면 어쩌나 입술은 보기보다는 훨씬 더 감미로운 곳 어떠했나요 그녀가 화를 냈나요? 화를 내지 않았다면 당신이 첫 남자가 아니에요 어떠했나요 다시는 안 만난다고 했나요? 그러지 않았다면 그녀는 첫 사랑이 아니에요 어떠했나요 말없이 그냥 떠났나요? 그..

o 불쌍한 남편 구녕 이효범 한 달의 노동의 대가로 내게 오는 건 가벼운 월급명세서일 뿐 실질은 모두 아내에게 가네 아내는 통장과 도장을 쥐고 하루의 용돈으로 나를 조종하니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해도 쩔쩔매고 예쁜 여자를 보아도 힘이 없네 언제나 돈을 초월하려고 해도 돈이 허락하는 곳까지만 갈 수 있으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지만 사실은 돈이 문제다 아내는 집에 있어도 세상을 알고 그 노동의 대가로 품삯을 받지 못해도 예속되어 있지 않네 나는 강단에 서서 겉으론 철학과 인생을 논하지만 언제부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돈으로 계산되고 돈으로 치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 불쌍한 존재여 그대 이름은 남편이니라

o 불쌍한 남편 구녕 이효범 한 달의 노동의 대가로 내게 오는 건 가벼운 월급명세서일 뿐 실질은 모두 아내에게 가네 아내는 통장과 도장을 쥐고 하루의 용돈으로 나를 조종하니 유붕(有朋)이 자원방래(自遠方來)해도 쩔쩔매고 예쁜 여자를 보아도 힘이 없네 언제나 돈을 초월하려고 해도 돈이 허락하는 곳까지만 갈 수 있으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지만 사실은 돈이 문제다 아내는 집에 있어도 세상을 알고 그 노동의 대가로 품삯을 받지 못해도 예속되어 있지 않네 나는 강단에 서서 겉으론 철학과 인생을 논하지만 언제부턴가 존재하는 모든 것은 돈으로 계산되고 돈으로 치환되지 않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 불쌍한 존재여 그대 이름은 남편이니라

o 3개월이 중요해 구녕 이효범 늦게 들어올 수 있느냐, 없느냐 술을 맘껏 먹느냐, 못 먹느냐 걸레질을 하느냐, 안 하느냐 눈치를 살펴야 하느냐, 안 살펴도 되느냐 아내의 사랑스런 모습에 빠져 부드러운 유혹에 빠져 간절한 애원과 눈물에 빠져 주체성을 잃고 한없이 나약해진다면 한때의 달콤함 긴긴 날의 후회 아주 현명한 자는 하루면 깨닫고 중간인 자는 3일이면 깨닫고 모자라는 자도 3개월이면 깨닫는다는데 이제 10년 넘어 조심스레 실토하건대 결혼 후 3개월이 중요해

o 현명한 판단 구녕 이효범 나는 뱀띠 아내는 말띠 나이는 한 살 위지만 싸움하면 뱀이 불리해. 나는 에이형 아내는 오형 에이형은 조용하고 오형은 활달하니 싸움하면 에이형이 불리해. 나는 눈이 발달했고 아내는 입이 발달해 눈은 도망가는 데 좋고 입은 공격하는 데 좋으니 싸움하면 내가 불리해. 아무리 남편은 하늘이고 아내는 땅이라고 외친들 모든 정황이 약세이니 집안에선 죽어 지내는 게 최고.

o 공주사대에 와서 구녕 이효범 스물아홉에 공주사대에 와서 시골 대학 전임강사가 되어 쥐죽은 듯 10년을 보냈더니 멀리 금강 가를 도는 산들이 누워 있는 여인처럼 보인다. 얼마를 더 쥐죽은 듯이 살면 그 여인이 일어나 살며시 옷을 벗고 내게 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