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o 말 구녕 이효범 소리치는 말은 사실 빈 말이다. 또박또박 걷는 말은 우아하다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말은 힘차다 장애를 뛰어 넘는 말은 경이롭다. 하늘을 향해 헛발을 내지르는 말은 문법을 벗어난 말이다. 전산으로 처리되는 전쟁 마차도 사라진 시대 운명의 고삐를 풀고 말들을 벗어나려고 안달하는 말. 자정 넘긴 선술집에서 말상의 사내 하나가 자기 말을 몰라준다 울먹이면서 마침표로 말문을 닫고 있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1.02.07
참외 o 참외 구녕 이효범 참외를 먹은 다음 날은 들판에 나가 똥을 누고 싶다. 똥 속에서 빼꼼히 눈을 뜨고 싱싱하게 살고 싶어 하는 참외씨의 노란 꿈을 이루어 주고 싶은 것이다. 그 많은 씨들이 대지에 뿌리박고 들판 가득 주렁주렁 푸른 파도처럼 넘실댈 수는 없겠지만 한 여름의 왕자님, 목마름을 채워주고 집안 대대로 귀여움 받던 어린 것 그 조그만 하얀 종자를 아파트 변기통에 쑤셔 넣을 수는 없지. 임자 없는 강변에 나가 새들에게 들킬까 봐 수줍게 흰 볼기짝 들어내고 부디 번성하거라 간절히 주문 외우며 참외씨 박힌 똥 위에 호박잎도 몇 장 덮어주고 싶은 것이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2.19
시골 산책 o 시골 산책 구녕 이효범 햇살 고운 가을을 하루 종일 걸었습니다. 깊은 시골은 늙은 사람뿐이어서 곡식도, 과일도 훌러덩 옷을 벗고 온 몸을 태우고 있었습니다. 벗은 몸에 스스로 취한 여인을 몰래 엿보는 어린 아이 심정으로 들로 난 좁은 길을 따랐습니다. 내 거친 발자국에 놀라 나무 가지 위에서 졸던 뱀 떨어지고 그 뱀 소리에 놀라 안방 같던 공간이 바르르 몸 떨었습니다. 산속으로 가면 어두운 종교로 들어갈 것만 같고 개천을 넘으면 술집으로 향할 것만 같아 들국화 한 다발을 화들짝 꺾었습니다. 어둡기 전 고운님을 만나겠지. 황홀하게 노을 속을 혼자서 신나게 걷고 또 걸었습니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2.15
빈집 o 빈집 구녕 이효범 빈집이 아름다워라 비워 있어 더욱 아름다워라 흰 구름 종일토록 마음 없이 흘러가는 곳 세상에서 가장 선한 사람들 석양에 등을 펴고 마음 향하는 동구 반은 사람이 짓고 나머지 반은 자연이 짓는 집 외따로 남루 입은 사람처럼 서 있는 집 주인이시여 들어오소서 달빛처럼 들어와 편히 쉬소서. 빈집이 아름다워라 비어 있어 더욱 아름다워라 오래인 기다림 응답을 기다리는 곳 먼 길을 돌아서 홀로인 사람 별빛에 눈물 머금고 하늘 우러르는 언덕 반은 사람이 짓고 나머지 반은 자연이 짓는 집 고요에 몸을 떨며 운명처럼 서 있는 집 주인이시여 들어오소서 바람처럼 들어와 편히 쉬소서.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23
눈, 혹은 나 o 눈, 혹은 나 구녕 이효범 눈, 눈, 눈, 눈, 눈, 눈, 눈, 눈, 눈, 눈 눈눈눈눈눈눈눈눈눈 나이 들어 길거리에 내몰려 검은 흰 눈을 내려다보니 눈은 너무나 나를 닮았다. 나나나나나나나나나 나, 나, 나, 나, 나, 나, 나, 나, 나, 나 나, 눈, 눈, 나, 나눈눈나나 오, 눈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21
정류장 o 정류장 구녕 이효범 버스가 오고 버스가 가고 사람이 내리고 사람이 타고 시간이 가고 시간이 오고 응답의 환호성 무응답의 고요함. 무언가가 오고 무언가가 가고 기쁨이 내리고 슬픔이 타고 有가 가고 無가 오고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19
소 o 소 구녕 이효범 이른 봄 초원에 나와 소들이 풀을 뜯고 있다. 우리의 양식이 천천히 걸으면서 저들의 양식을 먹고 있다. 조금만 참으면 내 입에 들어올 저 튼튼한 뒷다리. 잘 먹고 잘 자라거라. 한 접시 제물로 올려질 나의 영혼도 누군가 탐낼 수 있다면 좋겠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18
3월의 나무 o 3월의 나무 구녕 이효범 언제부턴가 3월의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낙원의 아담과 이브처럼 전라의 모습이 저렇게 고혹적일 수가 없습니다. 잔가지 하나하나 그 끝까지 물이 차오르는 모습을 보십시오. 주어진 공간을 균등하며 아 터질 것 같은 몸. 차라리 다음에 올 잎과 꽃은 남루한 옷과 같습니다. 나의 몸이 저처럼 힘찰 수만 있다면 나의 몸이 저처럼 순수할 수만 있다면 나도 대지 위해 저 태양 빛 속에 꼿꼿하게 벌거숭이로 서고 싶습니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16
나무를 껴안다 o 나무를 껴안다 구녕 이효범 가을날 빈 들판을 지나 잎이 다 진 늙은 나무에게 간다. 나무는 아프리카 수도원의 수녀처럼 거기 서서 평생을 기도하고 있다. 나무가 수줍게 인사를 한다 나는 부끄럽게도 빈손이다. ‘나무야, 너는 전생의 나인 것 같다.‘ 나는 용기를 내어 나무를 껴안는다 마음 속 그 사람처럼 따뜻해진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12
단풍나무 아래에서 o 단풍나무 아래에서 구녕 이효범 아무라도 좋으니 나를 사랑하여 가을날을 뚜벅뚜벅 걸어올 사람에게 아름답고도 굳센 총을 주어라. 그 매혹적인 손 탕, 방아쇠가 당겨지고 심장의 피가 솟구쳐 저녁노을처럼 서쪽 하늘을 물들이게 해다오. 초점이 맞지 않아 파편으로만 쓸쓸했던 지난날 삶의 조각들이 보석처럼 어둠에 박혀 모두 별이 되리라. 붉은 단풍나무 아래에서 이제 유일한 희망 나의 심장에 총을 겨눌 그 누군가를 기다린다. 나무를 껴안다(시집) 2020.11.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