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를 껴안다(시집)

참외

이효범 2020. 12. 19. 08:18

o 참외

 

구녕 이효범

 

참외를 먹은 다음 날은

들판에 나가 똥을 누고 싶다.

똥 속에서 빼꼼히 눈을 뜨고

싱싱하게 살고 싶어 하는

참외씨의 노란 꿈을 이루어 주고 싶은 것이다.

 

그 많은 씨들이

대지에 뿌리박고

들판 가득 주렁주렁

푸른 파도처럼 넘실댈 수는 없겠지만

한 여름의 왕자님,

목마름을 채워주고

집안 대대로 귀여움 받던 어린 것

그 조그만 하얀 종자를

아파트 변기통에 쑤셔 넣을 수는 없지.

 

임자 없는 강변에 나가

새들에게 들킬까 봐

수줍게 흰 볼기짝 들어내고

부디 번성하거라 간절히 주문 외우며

참외씨 박힌 똥 위에

호박잎도 몇 장 덮어주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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