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오늘(시집) 21

호박 이야기

o 호박 이야기 구녕 이효범 먼 옛날이야기입니다. (안 들으셔도 나는 원망하지 않습니다) 대전 변두리에 우리 집이 있었습니다. 집 뒤는 동산이 넓었습니다. 동산 위에는 명문 여고가 위용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을 호박밭이라고 놀렸습니다. 공부를 잘하면 모두 동글동글해지는지, 그래서 호박꽃은 꽃이 아닌 줄 알았습니다. 나이 들어 고향을 떠났습니다. (나는 확실히 고향을 떠난 줄 알았습니다) 남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결혼식 날 장미를 얻어 좋아했는데 호박밭 출신이었습니다. 아이를 낳은 후 호박죽을 먹였습니다. 오랫동안 호박덩이는 살색으로 곱게 빛났습니다. 개똥벌레처럼 40년을 호박밭에서 굴렀습니다. 호박을 마구 찔러대던 나의 야무진 붉은 고추는 시들었습니다. 이제 꼭지에서 떨어진 호박이 동산에서 구..

24절기

o 24절기 태양은 우리의 宗敎 스스로 빛을 나투어 만물을 변화시킨다. 첫 번째 절기 입춘 지나 대동 강물 풀리는 雨水 좋은 씨앗 고르는 우수 지나 개구리가 잠에서 깨는 驚蟄 만물이 생동하는 경칩 지나 낮과 밤이 같아지는 春分 들나물 캐어먹는 춘분 지나 청명에 죽으나 한식에 죽으나 하는 淸明 하늘 맑아지는 청명 지나 봄비 내려 백곡이 기름지는 穀雨 못자리 만드는 곡우 지나 신록이 진해지는 立夏 보리 이삭 패는 입하 지나 바람 불어 설늙은이 얼어 죽는 小滿 냉이국 먹는 소만 지나 보리 베고 모심는 芒種 까끄라기 곡식 종자 뿌리는 망종 지나 낮이 가장 긴 夏至 열 받는 하지 지나 작은 더위 오는 小暑 습도 높고 비가 많은 소서 지나 장마 끝나는 大暑 염소 뿔도 녹는 대서 지나 가을의 시작 立秋 벼가 익고 배..

감자

o 감자 구녕 이효범 아침 식탁에서 감자를 먹는다. 땅을 닮은 감자가 맛이 있다. 또 먹고 싶어 혀를 다신다. 내일 다시 감자를 사러 마트에 가야겠다. 그러면 부지런한 농부는 감자를 심으리라. 산더미처럼 수확한 감자에서 제일 좋은 감자를 종자로 고르리라. 겨울 내내 어둠속에 보관하였다가 내년 봄, 바람 좋은 날, 기름진, 넓은 들판에 심으리라. 감자, 둥글맞은 감자, 뼈 없는 감자, 쉽게 까지는 감자, 발이 없는 감자, 생각 없는 감자, 불쌍한 감자. 그러나 99개 모두를 내어주고 단 1개만 숨길 줄 알아 둥근 감자는 무궁하다. 돌아 돌아 먼 길을 아슬하게 돌아 오늘 아침 내게 온 감자에게 고개 숙여 경배한다.

나그네

o 나그네 구녕 이효범 알지 못하는 곳에서 와서 알지 못하는 곳으로 가는 나그네여 당신은 소식이다. 새로운 소식이 나의 눈을 뜨게 한다. 알지 못하는 때에 와서 알지 못하는 때에 가는 나그네여 당신은 노래이다. 새로운 노래가 나의 귀를 열게 한다. 오! 나의 나그네여 나는 오늘 문을 열고 온 몸으로 온 종일을 운명처럼 기다리노라니 당신은 바람이다. 새로운 바람이 나의 영혼을 깊게 한다.

콩나물의 신비

o 콩나물의 신비 콩에 물을 준다. 부드러운 둥근 것이 딱딱한 둥근 것을 두드린다. 응답이 없다. 또 물을 준다. 소귀에 경을 읽듯이 주고 주고 또 준다. 다정하게 지나가는 것이 막힌 귀를 뜨게 한다. 오래 포기하지 않는 것이 앉은뱅이 몸을 일으켜 세운다. 어머나? 모든 창을 닫고 완벽하게 마침이던 것이 마침내 마침을 마치고 무엇인가 되고 있다. 팥이 아니고 기어코 콩나물이 되고 있다.

o 봄 구녕 이효범 봄은 문을 열고 나와 보라고 봄이다. 그래, 걸어 나와야 봄이다. 몸도 나오고 영혼도 따라 나와야 봄이다. 산 속에서 물도 나오고, 언 땅에서 새싹도 나오고, 고목에서 잎도 나오고, 뱀도, 벌도, 나비도 나와 화엄을 이루는 세상 그런 찬란을 보라고 봄이다. 햇살 위에 햇살이 겹치고 파도 위에 파도가 덮치듯이 영혼 위에 영혼이 넘쳐 새롭게 보라고 봄이다. 바닥없는 바닥에서 어둠 없는 어둠에서 보이지 않는 것들이 보이는 것들을 만들고 있는 저, 성스런 선한 손길을 보아라. 아주 먼 길을 숨차게 달려온 생명들은 환희로 자신의 존재를 노래한다. 그러나 그 노래는 고등어 등처럼 비릿하다. 그러나 그 노래는 거미줄에 걸린 이슬처럼 아슬하다. 비릿하고 아슬한 노래만이 이 땅의 진리이다. 그런 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