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여행기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7(포르토마린)

이효범 2024. 5. 12. 01:00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7 (포르토마린)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7 (포로토마린)

 

구녕 이효범

 

어제 사리아 강변에서 저녁으로 먹다 남은 케밥과 음료수로 간단히 아침을 마쳤다. 떠나려는데 사위와 딸들로부터 전화가 온다. 어버이날이라고 안부를 묻는 인사이다. 나는 별로 해준 것이 없는데 걱정해 주니 고맙다. 늦둥이 아들은 소식이 없다. 잘 지내는지 궁금하다. 등에 배낭을 매려는데 묵직하다. 3개월 먹을 혈압약, 별로 입지 않은 반바지, 치약과 크림도 줄었을 것이니 처음보다는 가벼워졌을 것이다. 그래도 쓸데없는 것은 다 버린다. 아직도 순례 시작할 때 산 초코렛이 남아 있는데, 망설이다가 이것만은 그냥 남겨둔다. 730분 문을 여니 안개가 자욱하다. 그래도 순례길은 만원이다. 순례길의 분위기가 조금 변한 것 같다. 고뇌의 길이 아니라 축제의 장처럼 느껴진다. 대만에서 온 남자 둘에 여자 다섯의 단체팀은,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고 하니까, 여자 다섯은 한쪽 다리는 들고 다른 한쪽 손은 하늘을 가리키며 요란을 떤다. 내가 엄지척하니까, “안녕하세요.”라고 인사를 한다. 내가 일본 사람으로 보이지 않아서 참 다행이다.

 

순례길을 걷다 보니 이 계절 스페인은 물이 풍부하다. 여기 갈리시아 지방도 마찬가지이다. 비가 와서 그런데 계곡물은 맑고 수량도 풍부하다. 물길들은 거대한 거인인 지구의 표면을 흐르는 혈관 같다. 혈관의 피가 저렇게 깨끗하고 힘차게 흘러야 땅들이 건강하고, 땅 위에 사는 생명들이 활기를 띈다. 우리 몸도 그럴 것이다. 피가 오염되고 막히면 결국 병들어 죽게 될 것이다. 1시간 반 정도 지나니 안개가 걷힌다. 날씨가 맑아지고 온도도 올라가니, 기분도 덩달아 상승한다.

 

이 구간은 참 걷기가 신난다. 길들이 다채롭고 자연을 해치지 않을 정도로 잘 정돈되어 있다. 누가 일부러 심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길가에 있는 거목들은 경탄을 자아내고, 순례길을 그늘로 덮는다. 순례길이 넓은 목축 지대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이따금 소들의 인분 냄새가 코를 찔렀지만, 참기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소들 때문인지 길의 많은 구간이 돌담으로 처져 있다. 일부는 무너진 돌담이 보이지만 그대로 자연스럽다. 갑자기 시적 감흥이 일어났다. “이끼 긴 돌담은 한 모서리가 무너져 있다. 저도 쉬고 싶은 것이다. 바닥에 누워 있던 길도 한 모퉁이가 파혀 있다. 저도 흐르고 싶은 것이다. 오랜 성곽을 이루었던 나의 몸이여! 피비린내 나는 싸움도 멈추었다. 너도 저 싱싱한 풀밭으로 돌아가고 싶은가? 우리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

 

그런데 이 길을 걷고 있는 저 많은 순례자들은 누구인가? 모두 사람이다. 그들은 부모의 덕택으로 태어나서, 교육받고, 성장하여, 직업을 잡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여, 자식을 낳아 기르다가, 때가 되면 죽는다. 그런데 그들은 인생의 어느 변곡점에서 이 길을 걷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왜 힘든 이 길을 걷고 있을까?

 

모두 사정이 다를 것이다. 한 사람의 삶은 모두 하나의 서사이고 긴 스토리이다. 그 스토리가 하늘의 별처럼 충만하고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를 기원해 본다. 친한 중고등학교 동기 중에 이경재 검사가 있었다. 10년 전에 심장혈관에 문제가 있어 일찍 세상을 떠났다. 검찰총장은 물론 법무부 장관도 아주 잘할 능력 있는 친구였는데, 통탄스럽다. 그가 대구지검장으로 승진하고 대전에서 동기들이 축하 파티를 여는데, 나는 다른 일이 겹쳐서 참석하지 못했다. 전화를 걸었더니 여러 이야기 끝에, 밑도 끝도 없이 내가 부럽다고 말한다. 아니 권력의 핵심이 있는 친구가 지방대학 교수가 무엇이 부러워, 지금도 그 말의 진의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지만, 그 말이 가슴에 오래 찡하니 남는다. 또 표찬영이라는 다정한 친구가 있었다. 능력에 비해 잘 안 풀린 친구이다. 그 녀석이 살아 있어 여기에 같이 왔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마 우리는 음식과 숙소에 대해 두 번은 싸웠을 것이다. 그는 대범하고 나는 소심하므로. 그러나 우리는 곧 화해했을 것이다. 틀림없이 여자에 대해서는 아무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아내만 아는 애처가이니까.(아마 어떤 친구는 읏으면서 나는 아니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갈수록 친구 사귀기가 어렵고, 깊은 마음을 나눌 친구도 적어진다. 자주 친구를 만나고 술을 조금 줄여야겠다.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큰 호반이 있는 포르토마린에 왔다. 마을 입구에서 한국 카톨릭 단체에서 온 27명의 성지순례자들을 만났다. 얼굴이 참 밝았다. 사진을 찍어준 성도는, 중간에 이 순례길을 8번째 오는 부부를 만났다고 이야기 해준다. 그러면서 여기에 안 온 사람은 많아도, 한 번 온 사람은 없다고 한다. 온 사람은 다시 온다는 말이다. 글쎄 나는 아직 모르겠다. (2024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