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6(사리아)
o 인문학으로 떠나는 산티아고 순례길 26(사리아)
구녕 이효범
어제는 3시간 동안 어렵게 고개를 올라, 오 세브래이로에 도착했는데, 예약한 숙소가 없어 택시 타고 다시 고개를 내려가고, 오늘 아침은 다시 택시를 타고 고개를 오른다. 이번 순례길의 최대 오점이다. 잊지 못할 것이다. 기기를 다루는데 본래 어둡기는 하지만, 수첩에 적어가며 조심하고 또 조심했는데, 왜 이런 실수를 저질렀는지 아직도 모르겠다.
택시 타고 어디까지 갈까? 오늘은 조금만 걷고, 사리아(Sarria)에 가서 정신을 다시 가다듬은 다음, 나머지 100km 구간을 잘 걷는 것이 좋겠다. 구글 지도를 보니 오 세브레이로에서 트라야카스텔라까지는 순례길이 차량 도로에 접해 있다. 차량 도로에 접해 있는 길을 걷는 것은 건조하다. 차도가 중심이 되니 정신이 분산되고, 차량이 지나가면 풍경이 깨진다. 트라야카스텔라에는 두 가지 길이 나 있다. 하나는 계속 차량 도로를 따라 걷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한동안 따로 걷다가, 다시 차량 도로에 합치는 길이다. 트라야카스텔라에서 사리아까지는 약 25km가 된다. 그래 그 정도면 적당하겠다.
트라야카스텔라에서 온전한 순례길을 따라 걸은 3시간은 내게는 환상적이었다. 9부 능선 정도 되는 임도 같은 길은, 저 아래로 광활한 목장들을 굽어보며 걸을 수 있는 목가적인 길이었다. 하이델베르크에 있는 철학자의 길처럼 철학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나는 그 시간 동안 최근에 관심을 가지고 시를 썼던, 붓다, 공자, 소크라테스, 예수를 생각했다. 공자와 소크라테스는 실제의 모습이 구체적으로 쉽게 그려진다. 그러나 아무리 많은 불상을 보았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만났어도 두 분의 모습은 안개 속에 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이고, 기독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한다. 붓다가 깨달은 자신의 진정한 모습과 예수가 불렀던 아버지는 과연 누구일까? 예수의 아버지는 초월적인 존재이고, 붓다의 자아는 내재적인 존재이다. 그들이 만났던 그 절대자는 철학적으로는 존재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초월하고 초월하여 거기 그 자체로 계시면서 만물의 근거가 되는 분이 아버지이고, 내재하고 내재하여 거기 여여하게 있으면서 만물의 근거가 되는 존재가 본래의 자아이다. 그런데 그 두 존재는 서로 다른 걸까? 만날 수는 없는 걸까? 혹은 한 존재의 다른 두 모습은 아닐까? 내가 지금 걷고 있는 길도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 오르막만 있거나 내리막만 있을 수는 없다. 둘은 서로 의존하고, 사실은 하나의 길의 다른 두 모습이다. 초월로 가면 아버지이고 내재로 가면 一心이다. 둘은 음과 양처럼 절대자의 다른 두 모습이지 않을까? 이런 생각들에 골몰하는데, 길이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피자를 먹고 다시 길을 나서니, 길은 차량이 다니는 도로와 다시 합하고 산만해졌다. 여기 개들도 점심때는 사람처럼 시에스타를 하는 것 같다. 사지를 깔고 늘어지게 자면서 주위를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개도 하물며 그런데, 이런 시각에 사람이 걷는다는 것은 이들의 아름다운 풍속을 거슬리는 행위이다. 걷기 싫었으나 다행히 길은 계속 내리막으로 이어져 그리 어렵지 않게 사리아에 도착했다. 여기에 오니 정말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다. 내일부터는 다시 등에 8kg짜리 배낭을 메고 걸어보자. 그리고 오래 감추었던 조개도 꺼내 딸각거리는 소리도 들어보자. (2024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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