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 86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6, 부활)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6, 부활) o 부활 구녕 이효범 삼대째 이어오는 음식점에 간다. 빛바랜 사진들이 벽에 가득하다. 사진들 사이로 작은 실개천이 흐른다. 그 물이 문을 열고 떨어질 즈음이면 백 년이 빚은 뜨거운 국물이 한 사발 수줍게 온몸을 드러낸다. 나의 혀는 체면을 잃는다. 어두운 배속으로 사정없이 내려간다. 오래 기다릴 것도 없다. 정신 속에서 꽃으로 피어난다. 국물이 빚어내는 환희의 세상. 이렇게 다시 태어나기 위해 누군가는 숨죽여 낮게 탄식했고 누군가는 오래 논물로써 기도했다. 우리의 삶도 꽃처럼 모두 누군가의 부활이다.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5, 저녁)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5, 저녁) o 저녁 구녕 이효범 아니고 아니고 또 아니고,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것도 아니고,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노란 것도 파란 것도 빨간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하얀 것도 아니고, 우우 우우우,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는 것도 아니고, 말도 아니고 말 아닌 것도 아니고, 우우 우우우, 우우우.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4, 꽃)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4, 꽃) 구녕 이효범 꽃은 늘 누워있는 돌멩이가 아니다. 그것은 있어야 할 시간이 지나가면 흔적 없이 사라지는 말씀이다. 그 말씀을 듣기 위해 낡은 몸을 이끌고 대지에 나가 경배한다. 꽃은 빛에 빛을 더해 새로운 빛을 발한다. 꽃은 하늘과 땅 사이를 향내로 이어준다. 꽃은 그냥 부는 바람이 아니다. 그것은 있어야 할 선물이며 비로소 이루어진 약속이다. 약속의 땅이 성스럽다.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3, 봄꽃)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3, 봄꽃) o 봄꽃 구녕 이효범 젊은 시절엔 여름을 사랑했으나 나이가 드니 봄으로 기울어진다. 상서로운 비 온 들판에 피어나는 첫사랑 소녀의 연분홍 입술 황천으로 기울어진 배를 돌리게 하는 외로운 자리서 늘 빛나는 등대 온몸을 바치려는 듯 천기를 누설하려는 듯 이 봄이 다 가고 이글거리는 세상이 오기 전에 로제타석에 쓰여진 이 신성한 문자들을 한 줄이라도 해독할 수 있을까.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1, 운동)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1, 운동) o 운동 구녕 이효범 사람으로 태어났으니 숨쉬기 운동은 해야 할 것이다. 가급적이면 오래도록 하라. 너를 증오하는 사람들이 모두 멈추어도 너는 이를 악물고 지속해야 한다. 대통령이 못된 김종필이 중시했던 운동이다. 가난한 대학생 시절 친구들은 테니스를 했다. 나는 부르주아 운동이라고 비난했다. 이제 보니 돈이 많이 드는 운동도 나쁜 운동은 아니다. 어설픈 이념을 접고 신나는 사람들과 어울려라.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운동이 제일 어렵다고 불평한다. 사실은 다른 운동도 마찬가지이다. 근육을 만들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땀 흘리지 않고 되는 운동이라면 벌써 사라졌을 것이다. 운동과 노동의 경계는 모호하다. 호랑이를 잡지 못하면 온 식구가 굶어죽는 사냥꾼의 신..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0, 당근을 썰다)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0, 당근을 썰다) o 당근을 썰다 구녕 이효범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한국의 대철학자임을 아직도 모른다. 짙게 화장을 하고 동창회에 나가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잠옷차림의 내게 명령을 내린다. “당근을 썰어 놓으세요.” 처음에 양보하는 게 아니었다. 청소하고 빨래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설거지를 할 때만 해도 아내는 가끔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제는 자기 혼자 밥 먹고도 빈 그릇을 던져 놓는다. “존경하옵는 한석봉님이시여, 당신은 글씨를 쓰고 나는 당신의 어머니처럼 생활을 썰고 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눈을 감고도 떡을 똑바로 썰었지요. 나는 눈을 뜨고도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당근이나 썰 위인은 아닙니다. 당신의 감탄스런 문..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9, 산책)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9, 산책) o 산책 구녕 이효범 산책은 철학자의 비밀병기다. 산책하지 않는 철학자는 삼류다. 서재에 앉아 밤새워 남의 글을 베껴 쓴다. 하이델베르크에는 네카르강을 따라 철학자의 길이 나있다. 칸트가 산책할 때 쾨니히스베르크 시민들은 시간을 맞추었다. 산책할 때 썩은 생각들은 가라앉고 살아있는 생각들만 의식의 지평으로 떠오른다. 세종 금강가에 가면 점심 후 걷고 있는 철학자를 볼 수 있다. 키는 작고 허벅지는 소크라테스를 닮았지만 얼굴은 온화하다. 왼쪽 눈은 동양을 오른 쪽 눈은 서양을 직시하고 부처처럼 이마에 제3의 눈을 기다리고 있다. 거북이처럼 걷고 있는 그에게 말을 걸어보라. 100중에 99는 모른다는 답변이다. 정치도 모르고 돈도 모르고 여자는 더더욱 모른다. ..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8, 아름다움)

o 나이 70애 부르는 인생 노래(8, 아름다움) o 아름다움 구녕 이효범 사랑에 눈 먼 젊은이여, 너의 사랑은 고결하다. 너의 사랑이 성취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도다. 그러나 젊은이여, 아름다움은 처녀의 몸을 즐겨 지나가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그 때 아름다움과 몸이 하나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종족을 보존하려는 자연의 간특한 계교이다. 속지마라. 부디 몸을 좇지 말고 아름다움을 좇아라. 몸은 물거품이고 허수아비다. 흔적 없이 사라지고 허망함만 남는다. 세상에 아름다움만이 영원하다. 아름다움은 오캄의 면도날을 좋아한다. 그 면도날로 불필요한 수염을 과감히 밀어버려라. A2+B2=C2. 얼마나 단순한 정리인가! 단순한 것이 아름답다. 아름다움은 잡것을 싫어한다. 아름다운 사랑은 긴 변명을 ..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7, 역설)

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7, 역설) o 역설 구녕 이효범 어릴 때 태권도를 배우다 보면 누구와 싸워도 이길 것 같은 젊은 봄날 철도길을 걷다 보면 기차와 부딪쳐도 살아남을 것 같은 저녁에 죽어도 좋을 듯이 도를 닦다 보면 자신이 신의 아들이 된 것 같은 술 취해 하루 종일 다방에서 기다리다 보면 떠나간 사람이 다시 올 것 같은 만 권의 책을 읽다 보면 만고의 진리를 터득한 것 같은 하늘이 깨어져 가슴을 찌르는 날이 있다.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없는 날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