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한울님
동학의 인간관은 한마디로 ‘인내천人乃天’, 즉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동학의 창시자 수운이나 그 제자 해월 대에 생겨난 명제가 아니라 동학의 발전 과정 속에서 의암 때 완결된 사상이다. 수운은 ‘시천주侍天主’,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 ‘천심즉인심天心卽人心’, ‘천인여일天人如一’을 말했고, 해월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주로 강조했는데, 이것을 의암이 ‘인내천人乃天’으로 집약한 것이다.
수운은 우주의 실재를 초월적 측면에서는 ‘상제’, ‘천주’, ‘한울님’등으로 지칭하고, 내재적 측면에서는 ‘지기至氣’로 표현하였다. 여기서 ‘지至’란 ‘극極’을 의미함으로써 만물의 본원, 천지의 본체를 뜻한다. ‘기氣’란 허령虛靈이 창창하여 모든 일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는 그 무엇이다. 그러나 모양이 있는 듯 하되 형상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 하나 보기 어려운 존재이다. 수운은 이런 우주의 본체를 인간의 경험으로는 알 수가 없고, 또 그런 경험에 기초한 인간의 지식으로도 알 수가 없으며, 오직 형이상학적 직각直覺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고 한다.
이 점은 동학을 창도한 수운 자신의 신비 체험에 잘 나타나 있다. 수운이 표현한 득도得道의 체험은 감각적으로는 천지가 진동하는 듯 했고, 마음이 섬뜩해지며 몸이 떨렸으며, 질병에 걸린 듯한 상태도 나타났으며, 밖으로부터 말씀이 들려오는가 하면 안으로부터 가르침이 내렸다. 그리고 생전 못 본 물형의 부도附圖도 뚜렷이 보였으며, 영기靈氣 같은 것이 몸을 감싸는 느낌도 받았다. 심리적 현상으로는 무섭고도 두려웠으며,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상태에 빠졌으며, 한울님의 실체감이 너무나 생생했고, 지금까지의 문제로 삼았던 과제들이 일시에 해결되어, 미래가 열리는 무한함을 느꼈다. 그리고 세계의 의미가 전도顚倒되어 충만함과 환희감이 고조되었으며, 무엇인가 피할 수 없는 사명감이 강압적으로 내리는가 하면, 새 역사의 창조 의욕이 넘쳐흘렀다. 이런 신비 체험의 궁극적인 경지는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나, 수운은 그것을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한울님의 마음이 곧 수운의 마음)’의 신인합일神人合一의 상태로 나타냈다.
이렇게 수운이 체험한 우주의 본체는 혼원渾元한 기氣로서, 주자학에서 말하는 이理와 기氣를 통일할 수 있으며, 물질도 정신도 아닌 우주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지기至氣는 ‘모든 것에 간섭하지 아니함이 없고 명령하지 아니함이 없는(無事不涉 無事不命)’ 것으로 보아, 현상 세계의 만물을 창조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즉 만물은 지기라는 본체에서 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수운이 말하는 지기至氣는 ‘자기 표현적 자율적 창조 능력을 갖춘 통일적 생명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수운은 천지, 귀신, 음양, 한울님을 이 우주 일원적 본체인 지기의 하나라고 말한다.
천상天上에 상제上帝님이 옥경대玉京臺에 계시다고 보는 듯이 말을 하니, 음양 이치陰陽理致 고사하고 허무지설虛無之說 아닐런가.
여기서 수운은 한울님이 개체의 인격을 갖추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을 낳은 음양 이치를 갖춘 전체 생명(온생명)의 격格임을 밝히고 있다. 또한 그는 천지자연과 귀신과 음양이 하나임을 주장한다.
천지天地 역시 귀신鬼神이오, 귀신 역시 음양陰陽인 줄 이같이 몰랐으니.
그리고 「논학문論學文」에서 수운은 한울님 말씀을 빌어 천심이 곧 인심이며 한울님과 귀신이 하나임을 말하고 있다.
나의 마음이 곧 너의 마음이다. 사람이 그것을 어찌 알겠는가. 천지를 알지만 귀신을 알지 못한다 귀신이 나이다(吾心卽汝心 人何知之 知天地 而無知鬼神 鬼神者吾也).
여기서 더 나아가 수운은 죽은 자의 귀신이라는 관념을 깨고 산 사람의 움직임을 귀신의 작용으로 설명하기까지 한다.
사람의 수족동정手足動靜 이는 역시 귀신이오. 선악간 마음용사 이는 역시 기운이오. 말하고 웃는 것은 이는 역시 조화로세. 그러나 하느님은 지공무사하신 마음 불택선악不擇善惡 하시나니 효박한 이 세상을 동귀일체同歸一體 하단말가
귀신은 원래 음양이치의 굴신屈伸 작용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러나 수운은 한울님의 현현양상으로 귀신을 설명한다. 그는 귀신을 천지와 음양과 같은 개념으로 보았으며, 구체적으로는 사람의 수족동정을 지칭해서 말하고 있다. 이런 수운의 사상은 사람의 생명 활동이 귀신, 즉 한울님의 창조적 활동과 연결되어 끊임없이 진화 발전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울은 대아大我이며, 개체인 나는 소아小我이다. 소아인 나는 대아인 한울에 융합 일치될 수 있다. 그래서 수운은 “무궁無窮한 이 울 속에 무궁無窮한 내 아닌가”라고 하였다. 앞에서 묘사한 수운의 종교 체험만을 보면 수운이 만났던 한울님은 기독교의 신처럼 바깥에 존재하는 초월적인 인격신처럼 보인다. 그러나 수운이 견지하고 있는 기본적인 세계관은 인격적인 신을 인정하지 않는 주자학이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한울님을 인격신이라고 말할 수 없다. 동양에서 말하는 절대 실재는 기독교와는 달리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깃들어 있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인 생각이다. 유교에서도 절대 원리인 태극은 인간의 마음에 이理로서 각인되어 있다고 본다. 이런 전통을 감안하여 본다면 수운의 한울님은 인간의 마음 속 깊은 곳에 있는 분(원리)이어야 한다. 내재성과 초월성을 모두 가진 신을 주장하는 것을 종교학적 용어로는 범재신론汎在神論(panentheism)이라고 한다. 동학에서 말하는 한울님은 초월성이나 내재성을 다 갖고 있지만, 내재성이 더 강조된다고 할 수 있다.
'인간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21-4. 지상신선의 사회 (0) | 2022.05.19 |
---|---|
21-3. 시천주 (0) | 2022.05.18 |
21. 동학의 인간론 (0) | 2022.05.15 |
20-6. 수기치인 (0) | 2022.05.14 |
20-5. 성인 (0) | 2022.05.1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