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동학의 인간론
“사람이 곧 한울님이다(人乃天).”
21-1. 민중의 자각과 새로운 인간 관념
구한말은 우리나라의 전 역사를 통틀어 모든 면에서 가장 위태로운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 민족은 이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결국 역사상 최초로 나라의 주권을 일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외세의 충격 앞에서 지식인 계층은 크게 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와 개화파開化派로 나누어졌다. 위정척사란 바른 도인 성리학을 보존하고 사악한 도인 천주교 더 넓게는 서구문명 전반을 물리친다는 뜻이다. 척사파는 서학을 방치하면 국가의 존망이 위태롭기 때문에 쇄국을 주장하였다. 이에 반해 개화파는 국가의 문호를 개방하여 서구의 근대문명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부국강병의 첩경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런 양반층의 대응과 달리 민중들은 대외적으로는 외세의 침략과 대내적으로는 집권층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학정에 시달려야 했다. 정약용의 ‘애절양哀切陽’이라는 시에서 보듯이, 어떤 농부는 배냇물도 채 안 가신 아이 몫으로 군포를 물린 아전의 횡포에 항의하여 자신의 양물을 자르기도 하였다. 여기에 자연재해가 더해졌다. 인구 1천만도 안 되는 나라에 3,4년에 한번 꼴로 수십만의 기민이 발생하는 가뭄이 닥쳤다. 1821년부터 22년 사이에는 전국에 퍼진 윤질(진성콜레라)로 전 국토가 처참한 아수라장이 되었다. 텅 빈 마을, 골짜기 마다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하였다. 이런 암담한 현실에 농민들은 세상을 저주하고 말세末世라는 의식을 갖게 되었다. 농민들 사이에서 불국정토의 건설자이신 미륵님과 제세濟世의 성인이신 정진인鄭眞人의 출현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이런 엄청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다양한 분야에서 많은 노력들이 있었다. 그 여러 분야 가운데 정신적인 면에서 주체성을 찾으려는 시도가 바로 민족 종교 운동이었다. 그래서 서양 정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서교西敎, 즉 기독교가 잠입해 오자 깜짝 놀란 민족정신은 서둘러 수운 최제우崔濟愚를 배출하여 동학東學을 창도케 함으로써 기독교에 대항하게 하였다. ‘동학東學’이라는 말 자체가 서양의 종교도 아니고, 그렇다고 유교나 불교도 아닌 우리나라의 종교라는 뜻이다.
동학은 유불선儒佛仙과 샤머니즘, 예언서 그리고 서학을 종합한 학문이다. 이 중에서 무엇이 가장 근간을 이루는지는 말하기 쉽지 않지만, 전통 유교, 특히 성리학(주자학)에 대한 한국 민중적 재해석이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중국적 성리학이 갖고 있던 세계관을 나름대로 철저하게 극복하고, 대중적인 실천의 수준에까지 이르렀던 높은 사상이 바로 동학이다.
성리학에 따르면 우주 만물은 이理와 기氣로 되어 있다. 이理는 쉽게 말해서 어떤 사물로 하여금 그것이 되게 만드는 원리․이치를 말하고, 기氣는 그 원리에 따라 움직이는 질료와 같은 것이다. 이런 성리학이 갖는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인간을 만물과 동일 선상에 놓고 본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인간도 만물과 마찬가지로 이와 기의 총합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인간에게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이 안 되도록 하는 이가 있고, 그 이의 조종에 따라 뭉쳐지는 기가 있어 인간으로 성립된다.
이런 이기론은 인간의 심성 혹은 마음을 설명할 때도 적용된다. 이것이 본연지성本然之性과 기질지성氣質之性의 차이이다. 이理는 보편적이고 선하기 이를 데 없는 본연지성을 생겨나게 하지만, 기氣는 사물마다 타고난 정도에 따라 선하고 선하지 않고의 차이를 생기게 하는 기질지성을 형성하게 된다. 이런 세계관을 바탕으로 주자는 모든 인간이 동일한 이를 부여받았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현실적인 차이, 즉 신분의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 기질지성을 덧붙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이러한 주자의 성리학적 인간관이 조선조에 수입되어,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 같은 이론에서 더욱 정교한 모습을 띠지만 그 대강은 그대로 유지된다.
퇴계의 ?천명도설天命圖說?에 따르면, 지체 높은 사람과 보통 사람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의 차이는, 그들의 성품을 구성하는 기가 어떠냐 하는 것으로 판명된다. 지체 높은 사람의 기는 맑아 잡것이 뒤섞여 있지 않다. 보통 사람의 기는 맑지만 잡것이 조금 섞여 있다. 어리석은 사람의 기는 탁하고 잡것이 많이 섞여 있다. 모든 사람이 동일한 이를 부여받아 기본적으로는 평등하지만 기질에 따라 이렇게 차등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질의 차이가 개인의 노력이나 태만과 같이 후천적인 결과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아예 태어날 때부터 인간 안에 심어져 있다는 데에 있다. 이런 사상은 암암리에 인간의 불평등을 합리화한다. 즉 양반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양반의 기질을 갖고 태어난 것이고, 노비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모양 그 꼴밖에는 못하게끔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차별적인 인간 이해는 조선 시대 신분 차별을 가능케 하는 지배 이념이 되어 왕조 전반에 걸쳐서 영향력을 발휘했다.
인간이 혈연으로 나누어지고 계급으로 나누어지며, 혈연과 계급은 상호 연결될 수밖에 없다는 성리학적 의식은 계급주의를 강화하고, 불평등한 인간관을 지지하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계층 구조 속에서 핍박받는 집단이 처음으로 스스로에 대한 자각을 갖게 되었다. 자신들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중심 역량이라는 새로운 자각은 결국 새로운 인간에 관한 관념을 만들 수밖에 없다. 그래서 그들은 평등을 기초로 한 새로운 인간에 대한 관념을 만들어 내었다. 그들의 사상이 동학이다.
동학의 인간에 대한 관념은 바로 조선 왕조가 해체기에 접어들면서, 민중이 스스로의 힘을 자각함으로써 깨달은 평등한 인간관이다. 동학은 이 새로운 인간에 관한 관념을 민중과 지배 계층의 평등성을 뜻하는 것만으로 이해하지 않고, 그 의미를 한층 더 확장하고 제고시켜 인간에 대한 위대하고 독창적인 사상으로 발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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