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자본주의가 만든 인간의 소외疎外
마르크스가 말하는 소외는 자본주의의 병폐가 무엇인가를 요약하는 개념이다. 즉 소외라는 개념은 자본주의 사회의 몇 가지 병폐의 특징들에 대한 설명과 동시에 그 근본적인 병폐에 대한 가치 판단을 두루 포함하고 있다.
원래 소외(alienation)라는 개념은 어원적으로는 ‘판매(alienate)’라는 말에서 유래된 개념으로, 이미 헤겔은 ?정신현상학?에서 ‘정신의 발전 과정에서의 소외’를 말한 바 있다. 이어 포이어바흐Feuerbach는 ‘신은 인간의 자기 소외’라고 규정하였는데, 여기서 소외란 자기 자신에 의해서 생산된 것이 자신에 대해 소원해지고, 대립적으로 되고, 심지어 자기를 지배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마르크스 역시 이런 의미로 이 개념을 사용하여 자본주의하에서의 인간, 특히 노동자의 삶의 모습을 규정하고 있다.
위에서 구분한 ‘노동’은 상이한 수준에서 일련의 생산품을 구성하는 결과를 낳는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하나의 신체적 존재로서 생존을 지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노동의 가장 근본적인 형태는 경제적이다. 즉 노동은 사용 가치나 교환 가치를 보유하며 생산 과정에서 일어나는 생산품이나 물품을 결과로 초래하는, 목표 지향적 생산 활동의 사회적 표현으로 정의될 수 있다. 생산품은 노동 활동을 하나의 물건 형태로 구체화함이다. 노동을 통해서 인간은 하나의 특정인이 되고 자신을 하나의 작업자로 정의하게 된다. 또 다른 의미에서 노동자는 그가 수행하는 노동에 따라 정의되기 때문에, 노동자가 생산한 물품은 대상화對象化되고 외표적인 형태에서 노동자 자신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노동자의 봉급이 그가 생산한 물품의 교환 가치보다 열등하기 때문에 노동은 잉여 가치의 구성 및 축척을 초래한다. 그리고 생산 수단의 소유자 또는 자본가는 이 잉여 가치를 사유 재산으로 변형시킨다. 그러므로 노동의 또 다른 결과는 자본주의를 위한 필요조건을 생산하고 재생산再生産하는 것이다. 이러한 조건 속에서는 자본주의 사회가 전제하고 있는 계급 분열과 이런 형태의 사회 안에서 통용되고 있는 사회관계가 포함되어 있다.
개인이 자신을 대상의 형태로 객관화하는 것은 그의 잠재력을 실현하고, 자신을 하나의 개체적 존재로 발전시키는 데 필요한 수단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는 생산품 또는 노동자의 객관화가 노동하는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가에게 귀속되기 때문에 노동은 소외를 잉태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소외 현상의 경제적 형식에 주의를 집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자본주의에 나타나는 인간의 소외 현상을 ?경제 철학 수고?에서 다음 네 가지 형태로 구분하고 있다. 자기의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 활동으로부터의 소외,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 동료로부터의 소외가 그것이다.
1)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는 생산물의 양은 점차 증가하는 반면, 노동자에 의해 점유되는 양은 점차 감소한다는 사실에서 발생한다. 그리하여 노동자에 의해 생산된 상품은 노동자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적인 지위를 갖게 되고, 심지어 노동자는 자기가 생산한 노동 생산물로부터 소외될 뿐만 아니라 그 생산물에 예속되기까지 한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노동자가 만드는 생산품은 자기 노동의 객관화이다. 그러나 임금 제도를 통해서 노동자는 생산품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자신에게 대한 무엇을 상실한다. 그 이유는 자기가 만들어낸 것의 완전한 가치를 유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노동의 생산품이 품삯으로 반환되는 것이다. 더욱이 노동자가 창조해 내면서도 유지하지 못하는 것이 노동자에 맞서서 노동자를 지배하는 힘이 된다.
노동자는 더욱 더 가난해지고 그가 만들어 내는 부가 더욱 많아지면 많아질수록 그의 생산은 힘과 범위를 더욱 더 증가시킨다. 이 모든 결과들은 노동자가 자기 노동의 생산품이 격리된 물체로서 관계를 가지게 되는 사실로부터 생긴다. 왜냐하면 노동자가 노동에서 자신은 점점 더 소비하면 할수록 그가 자기의 면전에서 만들어 내는 물체의 세계는 더욱 더 강력하게 되며, 그는 내적 생활에 있어서 더욱 더 가난하게 되고, 그는 점점 더 자신에게 대한 소속감이 줄어든다는 전제가 명확하기 때문이다. (…) 노동자는 자기 생명을 물체로 바꾼다. 그래서 그의 생명은 더 이상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물체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활동이 크면 클수록 그는 더 적게 소유한다. (…) 노동자의 자기 생산품에 대한 소외는 그의 노동이 물체로 되는, 즉 외부적 존재를 가정할 뿐만 아니라, 그 자신의 외부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그것이 자율적인 힘으로 그에게 맞서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가 물체에게 부여한 생명은 그 스스로가 그에게 격리되고 적의에 찬 힘으로서 맞서게 된다.
노동자가 자신의 산물의 노예가 된다면 그는 ‘살아 있는’, 그리고 ‘욕구를 가진’ 상품으로의 전락이기 때문에 가장 비참한 상품으로 격하하는 꼴이 된다. 즉 노동자는 자신이 창조해 낸 부의 힘에 의해 희생된다는 것이다.
노동자가 알차게 일하는 바가 한층 더 많으면 많을수록 그가 만들어 내는 소원한 대상적 세계는 그만큼 한층 강력해지고, 그의 내면 세계는 그만큼 한층 가난해지고, 자신의 것으로 속하는 것은 그만큼 한층 적어진다. 종교에 있어서도 이와 같아서 인간이 신 속으로 투입하는 것이 많으면 많을수록 자신 속에 보존하여 가지는 것은 그만큼 적게 되는 것이다. 노동자는 그의 생명을 대상 속에 투입한다. 그러나 그 생명은 벌써 자신에게 속하지 않고 대상에게 속하고 있다.
인간의 개성이 연장된 것들이, 또 인간의 개성을 풍요롭게 하기 위하여 직접적으로 봉사해야 할 것들이 독자적인 위치와 권력을 확보하여 인간의 지배자로서 인간 위에 군림하게 된다. 그리하여 인간은 바로 이러한 것들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2)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
이것은 노동자가 생산 과정과 생산 행위 그 자체에서 소외된 것을 말하는데, 소외의 모든 형태 가운데 한층 더 근본적인 측면을 가리킨다. 노동 생산물로부터의 소외가 생산의 결과인 데 비하여 노동 과정으로부터의 소외는 생산의 전제를 이루고 있다.
마르크스에 따르면 노동의 참다운 형태란 인간이 노동을 통해서 참되게 자기를 실현할 수 있어야 하고, 자기의 가능성이 충분히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휴식을 통해서가 아니라 노동을 통해서 창조적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하에서 행해지고 있는 소외된 노동은 인간의 능력을 실현시키지 못하고, 기쁜 것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한 것이 된다. 마르크스는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에게 나타나는 노동 과정을 이렇게 말한다.
노동자는 그의 자유로운 육체적, 정신적인 에네르기를 발전시키지 않고 그의 육체를 괴롭히고 그의 정신을 파멸시킨다. 따라서 먼저 노동자는 노동을 하지 않고 있을 때의 자기가 자기 자신이라고 느끼고, 노동을 하고 있을 때의 자기는 자기 자신이 아니라고 느낀다. (…) 그러므로 그의 노동은 욕구의 충족이 아니고 노동의 밖에 있는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다. (…) 육체적 강압이나 다른 강제 수단이 존재하지 않게 되는 즉시 노동은 마치 열병인 것처럼 회피된다.
자본주의하에서 노동자가 생산 행위 자체에서 소외된 원인은, 노동이 노동자의 본질에 속하지 않으며, 자발적인 노동이 아니라 강요된 노동이며, 노동이 그 자신에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 노동은 노동자에게서 외적인 것이다. 그것은 그의 본성의 일부분이 아니며, 따라서 그는 자신을 자기의 노동 속에서 성취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부정하는 것이며, 잘 산다는 감정보다는 비참한 감정을 가지게 되고, 자기의 정신적 및 신체적인 힘들을 자유롭게 발전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신체적으로 고갈되고 정신적으로 퇴폐하게 된다. 그러므로 노동자는 단지 자기의 여가 시간에만 자기에게 안온한 기분을 가지게 되며 노동 시간에는 불안을 느끼게 된다. 그의 노동은 자발적인 것이 아니라 부과되는 것이며 강요당하는 것이다. 그것은 필요의 충족이 아니고 타인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이러한 소외의 특징은 신체적인 혹은 다른 강박이 없어지는 순간 그 소리가 전염병 같이 사라져 버리는 사실에 의해서 분명히 보여진다. 외부적인 노동, 즉 인간이 자신을 소외시키는 노동은 자기 희생의 노동, 굴욕의 노동이다. 결국 노동자에게서 노동의 외부적인 특징은 그것이 자기 자신의 일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위한 일이며 그 일 속에서 자기가 자신에게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에 의해서 보여진다.
그래서 마르크스에 따르면 자본주의하에서 인간은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고, 아이를 낳기도 하는 것과 같은 동물적 기능에 있어서만 자유로이 행동하고 있다고 느끼는 반면, 인간적인 기능에 있어서는 동물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라고 느낀다. 즉 동물적인 것이 인간적인 것이 되고 인간적인 것이 동물적인 것이 된다는 것이다.
3) 유적類的 존재로부터의 소외
마르크스는 앞의 두 가지 소외로부터 ‘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라는 제3의 규정을 이끌어 낸다. 이는 유적 삶을 개인적 생존의 수단으로 삼음으로써 빚어지는 소외이다.
마르크스가 인간을 유적 존재(Gattungswesen)라 할 때 그것은 ‘유’라는 말의 일반적 의미인 인간이 단순히 보편적인 존재라는 것을 뜻하기보다는 오히려, 인간이 세계의 목적이라는 의미가 더 강하다. 유와 목적의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의 전통에서는 강하게 결합되어 나타난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 세계에서 자기의 목적을 실현하는 주체적인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유적 존재의 구체적 실현은 진정한 노동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진정한 노동은 자연적 재료를 변형시켜 인간적 목적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변형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역전시키며, 인간의 생명 활동과 그의 존재를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시킨다. 이렇게 인간의 유적 본질이 단지 개인의 육체적 생존의 수단으로 전락된다면 인간과 동물의 구별은 모호해진다.
인간이 직접적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제약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의식적 생명 활동은 인간을 동물적 생명 활동으로부터 직접 구별한다.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인간은 유적 존재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오로지 의식적인 존재로만 관계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인간에게 자신의 삶은 대상으로 되는데, 왜냐하면 바로 인간은 유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활동은 자유로운 활동이다. 소외된 노동은 이 관계를 전도시킨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 자신이 의식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그의 생명 활동, 그의 본질을 단지 자기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따라서 소외된 노동은 자연과 인간의 정신적 유적 능력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유적 존재를 인간과 소원한 존재, 즉 개인적 생존의 수단으로 변화시킨다.
따라서 인간 본질(유적 존재)로부터의 소외는 결국 실존적 이기주의로 유도된다. 결국 인간은 그의 개체적 존재에 있어서 각기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어 살아가게 되며, 인간의 본질인 사회적인 관계를 극히 단편적으로만 반영하며 살아갈 뿐이다. 본인이나 그가 부양하는 가족의 생존을 위해 정신적, 육체적 노동이 모두 자본의 끝없는 증식을 위한 도구로 전락되는 노동자는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가 된다. 그의 유적 삶이 그의 생명 활동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4) 동료로부터의 소외
앞서 말한 삼중의 소외로 인해 인간은 자본가와 노동자로 계급이 분화되고, 지배와 피지배 관계가 발생하며, 인간이 인간의 목적을 실현하여 동물적인 상태로부터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본적인 욕구만 충족시키려 한다. 즉 노동자와 자본가는 서로를 적으로 여기게 되고, 서로를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게 된다.
마르크스에게 자유와 인간 본성의 실현은 자연과 사회 속에서 자유로운 활동을 통해서만 가능한데, 지배피지배 관계하에서 서로 투쟁하는 인간은 타인으로부터 소외되었고 인간 본질에서도 소외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삶의 활동으로부터 소외됨으로써 인간은 그의 동료로부터 소외된다. 그의 동료는 자기 나름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와 경쟁하는 이방인이며 또 다른 개인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의 보편적인 인간 활동으로부터 소외되어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 대해 이방인이다.
인간은 서로 소외된 채 이방인으로서 대인 관계를 수립하게 된다. 그래서 노동자는 소외된 노동을 통해 그 자신의 생산을 현실성의 박탈이나 징벌로, 그리고 그 자신의 활동을 자기 것이 아닌 타인에 양도함으로써 노동이나 노동 과정에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는 다른 사람과 관계를 갖게 된다.
만일 노동자의 활동이 그에게 고통이라면 그 활동은 다른 사람에게는 향유가 되고 다른 사람의 삶의 기쁨이 될 것임에 틀림없다. (…) 만일 인간이 낯설고 적대적이며 권력적인, 그와 무관한 대상으로서 그의 노동 생산물, 곧 그의 대상화된 노동과 관계하고 있다면, 그는 다른 사람, 곧 자기에게 낯설고 적대적이며 권력적인 그와 무관한 사람이 이 대상의 주인이 되도록 그 대상과 관계 맺고 있는 셈이다. 만일 인간이 부자유스런 활동으로서 자기 자신의 활동과 관계를 맺는다면, 그는 어떤 다른 사람의 종살이나 지배, 강제, 그리고 멍에하에 있는 활동으로서 자기 자신의 활동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마르크스에 의하면 소외 문제는 단지 노동자에게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다.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 모두가 자기 소외를 경험한다. 사유 재산 제도는 소외된 노동의 원인이고, 노동의 소외는 모든 형식의 계급 사회에 특유한 분업으로 이끌어 간다. 따라서 자본주의에서 인간 관계는 서로의 인격에 의해 맺어지기보다는 교환하는 상품에 의해 맺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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