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6-3.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

이효범 2021. 12. 15. 07:34

6-3. 인간은 사회적 관계의 총체

 

마르크스의 인간 개념에서 가장 독특한 관점은, 인간의 진정한 본질이 사회적 관계의 총체성이라는 점이다. 이 말은 한 개인이 어떤 종류의 개인이며 어떤 종류의 일을 행하는가는, 그가 살고 있는 사회가 어떤 성격의 사회인가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참으로 현실적인 인간이란 주어진 사회와 계급의 성원으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한 사회에서 본능적인 것으로 보여지는 것도 다른 사회에서는 전혀 다른 것일 수 있다. 우리가 먹고, 자라고, 성교를 하고, 배설하는 방식조차도 사회적으로 습득된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회적 존재가 그들의 의식을 결정한다. 이 점이 정치경제학비판의 머리말에 잘 나타나 있다. “물질적인 생산양식은 삶의 사회적, 정치적, 정신적 차원들을 결정한다. 인간의 의식이 그들의 존재를 규정짓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들의 사회적 생활이 의식을 좌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마르크스에게 인간의 개인적인 본질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서 인간 본질을 규정하는 하나의 보편적인 개념을 찾으라고 한다면, 그것은 인간을 활동적(생산적) 존재라고 본 점이다.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은 자연과 사회에 동시에 속하는 이중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자연 안에서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살아가고 있으며,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살고 활동한다. 개인을 이러한 연관에서 고립시켜 생각하는 것은 다만 추상일 뿐 실제가 아니다.

인간 존재의 자연적이고 사회적 측면은 욕구 현상을 통해 관계되어 있다. 자연적 존재로서 인간은 그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외계의 존재를 필요로 하며, 사회적 존재로서 인간은 집단적 규모로 개인적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함께 노력한다. 그렇다면 결국 사회적 구조는 인간이 욕구에 대응하여 자연을 동화同化하는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욕구는 이중적이다. 한층 더 기본적인 욕구는 생식 욕구 또는 생존 욕구이다. 이런 욕구는 인간에게만 있는 특수한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이 가지는 공통적인 욕구이다. 그런데 인간이라는 종에 특유한 점은 인간이 그들의 생존 수단을 생산함으로써 기본 욕구에 대처하는 방식이며, 이것은 마르크스의 표현에 의하면 인간이 자신을 동물로부터 구별하는 행위이다.

생식 욕구와 구별되는 또 다른 욕구는 인간적 욕구이다. 인간적 욕구는 생식적 욕구에 비해 우선은 덜 중요하지만 급기야는 더 중요하게 된다. 욕구 충족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는 전자의 경우와는 달리, 인간적 욕구의 충족은 다른 목적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목적 자체이다.

이런 인간적 욕구는 이중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우선 그것은 인간을 사회적이든 비사회적이든지 간에 자신의 생명을 계속하는 데 필요한 수준 이상으로 전개하지 않는 다른 형식의 생명으로부터 구별 지워 준다. 더 나아가서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충동은 인간 역사의 원천이라고 할 수 있다. 실로 인간 역사는 자연 안에서 그리고 자연을 통해서 인간의 자유自由를 발전시키는데 있어서, 인간이 점증적으로 자연을 지배해 간 과정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는 모두가 생명의 인간적 표현의 복합체를 욕구하고, 자기실현自己實現을 내적 필연성, 곧 욕구로서 삼고 살아가는 부유한 인간에 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충족 가능한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그에 대응하는 잠재력도 보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선 인간 모두에게 공통적인 잠재력으로서, 우리는 생식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실질적인 가능성에 대응하는 하나의 잠재력을 들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잠재력은 일상적으로 숱한 방법에 의해 실현되고 있지만, 다른 의미에서 보면 이 잠재력은 역사적으로 인간이 자연을 점증적으로 지배하는 과정 가운데서 서서히 실현된다. 이러한 생식적 욕구에 관한 잠재력뿐만 아니라 인간은 인간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잠재력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마르크스는 이러한 인간적 욕구가 자본주의에서는 실현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오직 자본주의를 대체하는 공산주의에서만 실현될 수 있고 또 실현될 것이라는 주장한다.

사회와 자연의 관련 속에서 욕구와 잠재력은 활동活動에 의해 중재된다. 마르크스는 이 활동을 가장 중요하게 여겨, 인간을 근본적으로 활동적인 존재로 보았다. 그런데 그의 저작 속에서 활동은 대체로 목적론적目的論的, 준물리적準物理的, 생산적生産的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중에서 우리는 경제 과정 내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과 관련된 생산적 측면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즉 마르크스는 하나의 종의 전체적 특성이나 유적 성격類的性格 그의 생명 활동 방식에 놓여 있다고 말한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유적 성격이란 인간의 본질을 말한다. 그런데 이것은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지만, 실상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고, 역사 속에서 인간의 생산 활동에 의해 현실화된 것이다.

괴테는 ?파우스트?에서 소유도 권력도 욕정도 자기 삶에 중요한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을 충족시켜 줄 수는 없다고 주장하고, ‘활발하게 생산할 때에만사람은 자기 삶을 뜻있게 살고 있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능동적 활동에 관한 강조는 괴테 이전에 이미 스피노자의 윤리학에서도 나타난다. 스피노자는 정서를 수동적인 것과 능동적인 것으로 나누고, 전자는 인간이 수동적으로 감내하는 정열 같은 것으로, 실재에 대한 적절한 관념을 낳지 못한다. 그러나 후자는 곧 행위로서 인간을 자유롭고 생산적인 존재로 만드는 정서이다. 이와 같이 마르크스도 인간은 생산적인 활동을 할 때에만 생동적일 수 있으며, 자기의 고유한 능력을 표현하고, 이 능력의 도움으로 자기 밖의 세계를 자기화하여 세계를 포용할 때에만 생동적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인간은 생산적이지 못하고 수용적이고 수동적인 한 아무것도 아니며 죽은 것과 다름없다. 인간은 이와 같은 생산적 과정 속에서만 자신의 본질을 실현할 수 있으며, 자기의 고유한 본질에로 복귀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에 의하면 인간은 생산 속에서 자기실현을 추구하는 창조적(생산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이론에서는 암암리에 인간 활동에 두 가지 구별되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마르크스는 자주 그의 용어 사용에 있어서 일관성을 상실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작업이나 노동(Arbeit)의 형식으로 인간 활동을 언급했다. 이런 의미의 인간 활동은 그 자체에, 인간에, 자연에,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의 인간성을 실현하는 데 소외된 활동이다. 둘째로 소외되지 않은 노동또는 자유로운 인간 활동혹은 단적으로 활동이라고 부른 인간 활동이 있다. 이것은 인간의 보편적인 본성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서의 자유롭고 의식적인 활동을 말한다. 첫째 형태의 활동은 자본주의 속에서 행해지는 시대 특유적인 것이며, 둘째 형태의 활동은 공산주의에서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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