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자본주의의 미래
자본주의를 자생적으로 발전시킨 중산적 생산자층을 지탱시켰던 개신교의 윤리는 자연히 두 개의 중심을 갖게 된다. 하나는 세속적 모습을 지닌 이웃 사랑 그리고 그 실천을 위해 헌신하고자 하는 태도, 즉 세속적 금욕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하나는 중산적 생산자층의 세속적 삶이 시장 경제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그들이 과연 전심 전력으로 이웃을 사랑하여 이웃에게 공헌했느냐 안 했느냐의 여부는 시장에서 결정된다는 것이다. 즉 기업 생산자인 그들이 이웃에게 공헌하기 위한 길은 좋은 상품을 생산하여 이웃이 필요한 시기에 싸게 공급하는 일이다. 그래서 시장에서 많은 수요자가 그 상품을 산다면 생산자는 그만큼 이웃에게 공헌한 셈이다. 그 결과로 생산자는 이윤을 많이 남기게 된다. 이제 이윤을 남겼느냐 남기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는 이웃 사랑을 재는 척도가 된다. 이윤을 얻는 일은 선한 일이고, 이윤 추구에 적극적인 윤리적 의미가 부여된 셈이다.
이처럼 자본주의의 정신에는 일 자체에 대한 전심 전력, 그리고 이윤 획득이라는 두 개의 중심이 포함되어 있다. 종교사회학자 오경환은 ?종교사회학?에서 베버가 뜻하는 자본주의의 정신을 정리하고 있다. 첫째, 돈을 버는 활동을 쾌락이나 욕구의 충족을 위한 수단으로 보거나 생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필요악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정당한 목적으로 본다. 돈을 버는 것은 도덕적 의무이고 소명이며 인생의 목적이다. 둘째, 재산 획득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무제한으로 돈을 모으는 것이 정당하다. 셋째, 재산취득의 활동은 항상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을 따라야 한다. 넷째, 경제 활동은 정직하고 조직적이며 계속적이어야 한다. 겉치레나 불필요한 지출을 반대하며 금욕적인 생활을 요구한다. 다섯째, 생산과 이익을 높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투자해야 한다.
초기 자본주의의 정신의 담당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고 또한 아담 스미스Adam Smith에게 있어서는 일과 이윤이 교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그러나 그후 ‘신神과 부富를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신약 성서의 말처럼, 돈을 버는 일과 이웃 사랑은 점점 유리되어 갔다. 무엇보다도 신의 선택에 대한 확신을 얻고자 하는 열성이 본래 세속적 금욕을 지탱하고 있었는데, 어느 사이에 그 종교적 열정은 힘을 잃어 갔다. 그 대신 이윤을 추구하고자 하는 열정이 점차 힘을 지니게 되었다. 그리하여 양자의 힘이 팽팽한 균형 상태를 이루게 되고, 다시 이윤 추구에 열중하는 힘이 전면에 나타나게 되어, 세속적 금욕은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로부터 이탈하여 오히려 영리 자체를 위하는 것이 되었다. 이리하여 세속적 금욕을 중핵으로 삼으면서도 영리 자체가 자기 목적이 되어버린 에토스가 생기게 되었다. 바로 이것이 자본주의의 정신인데, 18세기 영국에서 이 에토스가 자본주의 경제의 발달을 내면으로부터 촉진시켜 급기야 산업 혁명이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산업 혁명은 중산적 생산자층, 특히 그 부유한 상층부가 중심이 되어 추진되었다. 그러나 산업 혁명이 완료될 당시에는 영국의 중산적 생산자층은 크게 자본가와 임금 노동자라는 양극으로 분해되어 기본적으로는 역사의 무대로부터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정신도 사라지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미 확립된 자본주의 경제의 사회적 기구는 사람들의 행동을 내면으로부터 추동시키는 자본주의의 정신의 도움 없이도, 그 스스로가 결국 기아飢餓라는 채찍으로서 원래 세속적 금욕을 발생시킨 것과 동일한 금욕적 행동 양식을 외부로부터 사람들에게 강제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자본주의의 경제에 있어서는 윤리 같은 것이 필요 없게 된다. 결국 자본주의의 정신은 그 존립의 사회적 발판을 상실하게 된다.
자본주의 정신이 사라진 다음의 정신적 상황을 베버는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의 말미에서 그리고 있다.
외적인 재화에 대한 염려는 마치 ‘언제든지 벗어버릴 수 있는 얇은 외투’처럼 성도들의 어깨 위에 걸처져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운명은 이 외투를 쇠우리로 만들어버렸다. 금욕주의가 세계를 변형하고 세계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면서, 이 세계의 외적인 재화는 점증하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힘으로 인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는 역사에서 결코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날 금욕주의의 정신은 그 쇠우리에서 –영구적으로 그런 것인지 아닌지는 그 누구도 모른다- 사라져버렸다. 아무튼 승리를 거둔 자본주의는 기계적 토대 위에 존립하게 된 이래로 금욕주의 정신이라는 버팀목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 정신을 웃으면서 상속한 계몽주의의 장밋빛 분위기도 마침내 빛이 바래가고 있는 듯하며, 또한 ‘직업 의무’사상도 옛 종교적 신앙 내용의 망령이 되어 우리 삶을 배회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 베버는 장차 누가 이 쇠우리 속에서 살게 될까 하는 물음을 던지면서 다시 한 번 장래에 대한 전망을 시도한다. 자본주의의 거대한 발전이 끝날 때 어떻게 될 것인가? 그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고 전망한다. 하나는 새로운 예언자가 나타나 우리들이 가야 할 한층 더 옳은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바람직한 길인지 모른다. 또 하나의 가능성은 이전의 사상이나 이상이 강력하게 부활하는 길이다. 이것은 당장은 좋은 결과를 가져올지 모르지만 어떤 점에서 상당한 위험을 내포한 길이다. 제3의 가능성은, 오늘날처럼 계속 이 쇠우리가 점점 더 강화되어 간다면 일종의 기괴한 기계적 화석화가 일어나는 길이다. 결국 자본주의라는 쇠우리가 거대한 자동 기계로 변해 버리는 그러한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베버의 예측과는 달리 자본주의는 이제 공산주의와의 경쟁에서 승리하고 보편적 지위를 획득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자본주의에는 문제가 없는 걸까? 피터 드러커(P.F.Drucker)는 현대 미국의 자본주의를 관찰하고, 자본주의는 그것이 경제적으로 실패하거나 정치적으로 과오를 범했기 때문에 실패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지주를 상실함으로써 멸망하는 것이라고 진단한다. 기업에 있어서 이윤은 제2차적인 것이어야 하고, 사적 이익을 혁신하여 공적 이익에 결부시켜야 한다. 기업은 극대 이윤이 아니라 필요이윤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런 윤리정신이 없다면 인간의 본성에 가장 적합하다는 자본주의도 타락의 운명을 면하지 못하고, 베버가 그리고 있는 것처럼 우울한 종말을 맞이할 것이다.
■더 읽을거리
▪오경환, ?종교사회학?, 서광사, 1979.
▪이종수 편저, ?막스 베버의 학문과 사상?, 한길사, 1989.
▪그린 로버트, 이동하역, ?프로테스탄티즘과 자본주의: 베버 명제와 그 비판?, 종로서적, 1987.
▪大塚久雄, 최정순 공역, ?사회과학과 인간?, 형성사, 1982.
▪M. Weber, 김덕영 역,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길, 2010.
▪――――, 조기준 역, ?사회경제사?, 삼성출판사, 1988.
▪Raymond Aron, 이종수 역, ?사회사상의 흐름?, 홍성사,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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