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5-4.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이효범 2021. 12. 9. 08:18

5-4.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

 

베버는 개신교의 어떤 일정한 해석이 자본주의적 체제 형성에 유리한 여러 동기 가운데 어떤 것을 창출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처음부터, 사회 현상은 사회적 사건이며 바로 이것이 사회학의 주된 연구 대상이라고 주장했던 프랑스의 사회학자 뒤르켕Emile Durkheim?자살론Le Suicide?에서 제시한 것과 비슷한 통계적 분석을 행하고 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목적을 가졌다. 독일에 있어서 여러 종교가 혼합되어 있는 지역에 개신교들 특히 어떤 일정한 종파에 속한 개신교도들 이 엄청나게 불균형한 많은 비율의 부를 소유하고, 경제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들의 비율을 엄청나게 불균형하게 많이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람들과 집단들이 그들의 활동에 임하는 태도에 종교적 사상이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다. 베버는 이러한 통계학적 분석을 아주 빨리 살펴보는데, 그러한 분석은 더 철저한 연구를 위한 하나의 서론으로 제기하고 있다.

그 밖에 베버는 개신교의 윤리와 자본주의의 정신 간에 지적 또는 정신적 친화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한다. 이것은 세상에 있어서의 종교적 사고방식과 어떤 일정한 행위, 특히 경제 행위의 문제에 대한 태도간의 이해적인 상관관계를 고찰하는 예이다.

끝으로 베버는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에 관한 연구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과연 여러 문명들 중국, 인도, 원시 유대교, 이슬람교 에서 사회적 조건이 서구형 자본주의의 발전에 유리하였던가 불리하였던가를, 그랬다면 어느 정도까지인가를 발견하려 한다. 그는 종교적 변수가 왜 서양 문명 밖의 어느 곳에도 서양의 자본주의가 발전할 수 없었는가를 설명해 줄 것인지를 물었다. 베버의 주장은 서양 이외의 여러 문명에서도 많은 자본주의적 현상이 존재하였으나 서구 자본주의가 갖는 특정한 특징, 즉 무제한적인 이윤의 추구와 노동의 합리적 규율의 결합이 역사의 과정에 있어서 오직 한 번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 사상에 의해서 결정되는 독특한 노동에 대한 태도가 과연 어느 정도로 서구에는 존재하고 딴 곳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차이적 요인인가를, 또 그것이 바로 서구 역사의 독자적인 과정을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닌가를 설명하려는 것이다.

베버는 자본주의를 가져온 서구 근대인이 경제 활동에 대해서 취하는 태도가 어떤 일정한 종류의 개신교 정신과 일치하며, 그것이 이번에는 자본주의의 정신과 일치한다는 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정신과 개신교 정신간의 의미 있는 대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이다. 어떤 일정한 세계관과 어떤 일정한 경제적 양식 활동 간에는 정신적 친화성이 있다.

베버가 관심을 가진 개신교 윤리는 본질적으로 칼뱅주의다. 그는 다음 다섯 가지 점으로 칼뱅주의적 사상을 요약하고 있다.

첫째, 이 세상을 창조하고 그것을 통치하지만, 인간의 유한된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접근할 수 없는 절대적이며 초월적인 하나님이 존재한다.

둘째, 이 전능하고 신비로운 하나님은 인간 개개인을 구원하던가 아니면 영원히 저주를 받도록 미리 예정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탄생하기 전에 이미 내려진 하나님의 명령을 우리의 노력으로서는 변경할 수 없다.

셋째, 하나님은 당신 자신의 영광을 위해 세상을 창조하셨다.

넷째, 인간은 구원을 받건 영원한 저주를 받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며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를 창조할 의무를 갖는다.

다섯째, 세상사, 인간성 및 육체는 죄와 죽음의 질서에 속하고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베버에 따르면 이 모든 요소는 다른 종교들 속에는 따로 따로 존재하나 칼뱅주의 속에서는 한데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새롭고 독자적이며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런 질서에 관한 전망은 모든 신비주의를 배제시킨다. 왜냐하면 피조물의 유한된 정신과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무한한 정신 사이의 의사소통은 정의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와 똑같은 이유로 이러한 사상은 반의례적反儀禮的이다. 그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과학이 탐색하여야 할 자연 질서를 인정하게 한다. 따라서 이러한 종교적 철학은 간접적으로 과학적 연구의 발전에 유리하며 모든 형식의 우상 숭배와 의례주의를 반대한다.

그러면 이렇게 해석된 세계에서 칼뱅주의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대답은 간단하다.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느냐에 대해서는 칼뱅주의자들 사이에서도 다양한 해석을 내렸다. 자본주의의 발달을 가져왔다는 점에 유리한 해석은 가장 독창적인 것이 아니며, 가장 순수하고 바른 것도 아니다. 칼뱅주의적 세계관을 기초로 우리는 칼뱅 자신과 같이 하나님의 법에 충실한 공화국, 즉 일종의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려고 노력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칼뱅의 신학 사상에 따라 칼뱅주의자는 자기가 구원을 받게 될 것인지 영원한 저주 속에 들어갈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러한 결론은 결국 사람을 견딜 수 없게 만든다. 따라서 논리적이 아니고 심리적인 성향에 따라 칼뱅주의자는 이 세계에서 자기가 택함을 받았다는 징조를 찾게 된다. 베버는 바로 이 성향 때문에 어떤 칼뱅주의 종파는 결국 이 세상에 있어서의 성공, 심지어 경제적 성공 속에서 택함을 받았다는 증표를 발견하기 위하여 노력했다고 주장한다. 즉 개인은 자기의 영원한 정명定命에 관한 불확실성의 필연적 결과로 나오는 불안을 극복하기 위하여 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합리적이고 규칙적이며 꾸준한 일이 신의 계명에 대한 복종으로 해석되기에 이른 것이다.

이런 점이 베버가 자본주의 정신의 화신이라고 본 미국의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묘비명에서 발견된다.

 

인쇄공, 벤자민 프랭클린의 육신이 (마치 낡은 옛 책의 표지처럼 그 내용은 찢겨져나가 활자도 주형鑄型도 허물어버린 채 낡은 책의 표지처럼) 여기 누워 있나니, 이젠 벌레의 먹이일 뿐이다. 하지만 그 업적은 소멸하지 않을지니, 다시 한 번 (그가 생전에 믿었듯) 글 쓰신 이의 손으로 교정과 수정을 받고 한층 더 새롭고 우아한 제본으로 다시 태어남을 믿음이니라.(The body of B. Franklin, Printer (Like the cover of an old book, Its contents torn out And scripts of its lettering and gilding) Lies here, Food for the Worms. But the Work shall not be Lost; For it will ( as he believ’d) Appear once More, In a new and more Elegant Edition Revised and Corrected By the Author.)

 

또한 프랭클린은 젊은 상인에게 주는 충고라는 글에서 구약성서 잠언 2229절을 인용한다. “네가 자기 사업에 근실한 사람을 보았느냐? 이러한 사람은 왕에 설 것이오.” 여기서 프랭클린은 직업을 통한 부의 획득을 구원받기 위한 하나의 의무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칼뱅주의적 논리와 자본주의적 논리의 어떤 일정한 요구간에는 놀랄 만한 일치점이 있다. 개신교 윤리는 이 세상의 일을 경계하도록 명령한다. 육체는 죄에 갇혀 있으니 이 세상에서 금욕주의는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윤을 얻기 위해서 합리적으로 일을 하지만 그 이윤을 소비하지 않는 것이 자본주의의 발전에는 필요하다. 왜냐하면 자본주의야말로 이윤을 소비하지 않고 재투자하는 것을 요구하는 체제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점에서 개신교와 자본주의적 태도간의 정신적 친화성이 가장 명료하게 드러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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