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해탈하는 여덟 가지의 길
니르바나에 도달하기 위한 올바른 길을 붓다는 사성제의 진리 가운데 도제道諦에서 제시한다. 그것은 여덟 가지 바른 길(팔정도八正道)을 수행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 여덟 가지 길은 다음과 같다.
1. 올바로 보라(정견正見) : 아침 노을이 해가 뜨는 전조이듯이 올바로 보는 것(바른 통찰)은 행복과 구원에 이르기 위한 선행 조건이다. 인생의 괴로움에 대하여, 사성제에 대하여, 무상함에 대하여, 또는 연기에 대하여 언제나 바르게 통찰해야 한다. 정견의 반대는 십이연기 가운데 첫 번째에 나오는 무명無明이다.
2. 올바로 생각하라(정사正思) : 바른 생각은 정진征塵하는 자의 성격을 특징짓는 기본 자세이다. 사람은 번뇌에서 벗어나고 노여움이 없으며, 해를 끼치지 않는 입장을 취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3. 올바로 말하라(정어正語) : 이것은 거짓말하지 말라는 윤리적인 기본 요구이다.
4. 올바로 행동하라(정업正業) : 이것은 윤리적 기본 법칙들의 실현을 포괄한다. 붓다가 금지한 사항들은 긍정적 자세를 통해 보완된다. 예를 들어 “살생하지 말라”는 금지의 계율은 “몽둥이나 칼 없이 부드러운 감정으로 자비롭게 모든 생물의 행복을 생각하라”고 하는 긍정적 자세를 통해 보완될 수 있다.
5. 올바로 생활하라(정명正命) : 이것은 의․식․주를 구하는 방식과 관계한다. 자신의 생활이 다른 사람에게 불이익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불제자는 다섯 종류의 일을 포기해야 한다. 무기라든가, 살아 있는 것, 고기, 술 같은 흥분제, 독 같은 것을 거래하는 장사가 그것이다. 노동의 산물이나 거래하는 물건이 다른 이에게 괴로움을 주어서는 안 될 뿐만 아니라, 직업상의 거래에도 정직해야 한다. 사기를 치거나 감언이설로 남을 꾀어 이익을 내려고 하거나, 다른 사람을 험담하거나 단순히 이익만을 탐내는 마음은 피해야 한다.
6. 올바로 정진하라(정정진正精進) : 바른 노력에는 네 가지 국면(사정근四正勤)이 있다. 사정근이란 네 가지 바른 노력이라는 뜻으로, 이미 생긴 악은 없애려고 노력하고, 아직 생기지 않는 악은 미리 방지하고, 이미 생긴 선은 더욱 자라게 하고, 아직 생기지 않는 선은 생기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7. 올바로 상념想念하라(정념正念): 정념은 바른 기억이다. 특히 신체는 깨끗하지 못하며, 감각은 괴로움이며, 마음은 항상 변화하며, 모든 현상에는 불변하는 실체가 없다는 것을 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사념처四念處라는 수행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순간을 의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깨어나지 못하거나 구원되지 못한 인간은 불교의 견해에 따르면 진정 현재 속에서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그는 탐욕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에 순간에 만족할 수 없다.
8. 올바로 선정禪定하라(정정正定) : 바른 집중은 의식의 첨예화로 묘사된다. 이것은 온 주의력을 특정 대상에 집중시키는 것으로, 이를 통해 선禪의 과정이 일어난다. 바르게 마음을 집중하는 것을 삼매三昧라고 한다. 명상에는 사마디samadhi, 즉 삼매와 비파샤나vipasyana가 있다. 사마디는 마음을 집중, 통일시키는 수행이고, 비파샤나는 통찰하는 수행이다. 비파샤나는 특별한 방식으로 본다는 뜻이다. 이것은 일상적이고 피상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다. 수행자가 마음의 모든 때를 벗고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것은 마음의 고요한 집중과 함께 바로 이 통찰로 인해서이다. 수행자는 집중과 통찰, 두 가지가 균형을 이루도록 함으로써 명상을 완성으로 이끈다.
지금까지 말한 여덟 가지 올바른 길 가운데 정견과 정사는 지혜知慧로워지는 길이며, 정어, 정업, 정명은 계戒를 지키는 길이다. 그리고 정정진, 정념, 정정은 마음의 안정安定을 도모하는 길이다. 그러므로 팔정도는 계戒, 정定, 혜慧라는 세 가지 공부(삼학三學)로 종합되기도 한다. 계학戒學으로 탐하려는 욕심을 이기고, 정학定學으로 성내는 마음인 진에瞋恚를 이기고, 혜학慧學으로 어리석고 우매한 상태인 우치愚癡를 극복하는 것이 말하자면 고통의 원인을 제거하는 길이다. 탐貪, 진瞋, 치癡 세 가지의 잘못된 마음을 삼독三毒이라고 한다. 삼독은 본래 인간의 마음이 아니라 후천적으로 좋지 않은 생활 습관이 쌓이고 쌓인 결과로 생긴 업보이다. 그래서 불교는 마음을 다스리는 공부를 해서 탐, 진, 치의 마음이 계, 정, 혜의 마음으로 바뀔 때 인생은 고통에서 벗어나 고요하고 행복한 평화로운 상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어리석음을 딛고 깨달음으로 나아가는 것을 전미개오轉迷開悟라고 한다. 사성제 이외에 사법인四法印은 미오迷悟 간의 관계를 나타낸다. 모든 것에는 고정적 실체성이 없어(諸法無我), 영원불변하지 않다는 것(諸行無常)을 모른 채 어리석게도 일체에 집착하면 괴로움이 생기지만(一切皆苦), 그것을 체득하여 깨달으면 번뇌의 불꽃이 가라앉는다(涅槃寂靜)는 것이 사법인이다.
붓다의 교설은 소승小乘 불교를 지나 대승大乘 불교로 전개된다. 소승 부파불교에서는 인간수행의 과정을 4단계로 구분하고 그 위계에 이른 사람을 여러 이름으로 나타냈다. 제1위에 이른 사람은 수다원須陀洹이다. 인간세상의 미혹함을 끊고 성자의 영원한 평안함의 흐름에 방금 들어간 사람이라는 뜻으로 입류入流 혹은 預流라고도 한다. 제2위는 사다함斯多含이다. 이 사람은 천상이나 인간 세상에 단 한번만 다시 태어남을 보장받은 사람이다. 이 사람이 인간세에서 이 과果를 얻으면 반드시 천상으로 가고, 다시 인간세로 돌아와 열반에 든다. 그리고 천상에서 이 과를 얻으면 반드시 인간세로 가고, 다시 천상에 돌아와 열반에 든다. 그래서 이 사람을 일왕래一往來 혹은 일래一來라고도 한다. 제3위는 아나함阿那含이다. 이 사람은 욕계의 번뇌를 완전히 절단시킨 사람으로 사후에 색계, 무색계에 태어날망정 절대 두 번 다시 욕계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사람을 불래不來, 불환不還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제4위는 아라한阿羅漢이다. 아라한은 인간이 수행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이다. 그래서 아라한은 ‘마땅히 대접을 받아야 할 자’ 혹은 ‘존경받을 만한 사람’의 의미를 지닌다. 이 사람은 이미 학도가 완성되어 더 이상 배움이 필요 없기 때문에 ‘무학위無學位’라고도 하고, 열반에 들었기 때문에 미망의 세계에는 태어나지 않음으로 ‘불생不生’, ‘살적殺賊’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아라한은 부처는 아니다. 그 아래에 위치하는 존재다.
아라한이 되는 것을 인생의 최고 목적으로 하는 소승 불교에 대하여 비판적 견해를 제기하면서 서력기원전 1세기경부터 대승 불교가 등장한다. 대승 불교는 소승 불교가 스승이신 석가세존의 말씀만을 외우기에 급급하고 자기 자신이 스스로 지혜를 계발하려고 노력하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즉 소승 불교가 인간의 부정적인 측면만을 강조하고 세상을 비관하며 현실을 도피한다고 보았다. 그래서 연약하고 불쌍한 대중들을 위한 자비의 정신이 부족하며, 그들을 구하고자 하는 원력이 없이 자기 자신의 성불成佛만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대승 불교는 성불하기 위해서 석가세존이 전생前生에 힘겹게 보살菩薩로서 걸어야 했던, 그 보살의 길을 중시한다. 보살은 보리菩提(bodhi 깨달음)를 향해 가는 중생(살타薩埵, Sattva, 살아있으나 아직은 잘못 살고 있는 존재들)이다. 그러나 보살은 자기도 아직 고통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으나 먼저 남을 그 고통 속에서 건져주려는(自未度先度他) 자비의 마음이 충만한 사람이다. 이런 보살은 사홍서원四弘誓願을 발하고, 타인의 구제와 자신의 깨달음이 둘이 아니라는 정신으로,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중생을 구제한다(上求菩提 下化衆生).
보살은 보살의 행위를 수행해야 한다. 그 실천 윤리가 여섯 가지 파라밀다波羅蜜多(pramit, 완성)이다. 이것은 보시布施, 지계持戒, 인욕忍辱, 정진精進, 선정禪定, 지혜智慧라는 여섯 가지 덕목의 완성을 말한다. 보시는 베풀어 주는 일로서, 법法을 가르쳐 주는 것, 값어치 있는 물건을 주는 것, 불안과 공포를 없애 주는 것을 말한다. 지계는 계율을 지킨다는 말이다. 인욕은 챤티knti라고 하며, 참을 인忍자는 용서를 빈다는 뜻이다. 정진은 붓다가 열반의 자리에서 그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타이른 말로 더욱 유명하다. 방일과 나태하지 말고 부지런하고 알뜰히 앞으로 나아가라는 말이다. 선정은 단순히 세상을 버리고 고요한 곳에 머물며 자기 자신의 마음을 안정시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기쁜 마음으로 세상을 위한 공덕을 이끌어 내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지혜를 갖게 될 때 보살은 중생에게 참된 이익을 베풀어 줄 수가 있다.
■더 읽을거리
▪고익진 공저, ?불교의 진리관?, 경서원, 1982.
▪길희성, ?인도철학사?, 민음사, 1984.
▪동국대학교 불교문화대학 불교교재 편찬위원회, 『불교사상의 이해』, 불교시대사, 1997.
▪이기영, ?한국불교연구?, 한국불교연구원, 1983.
▪정승석, ?인간을 생각하는 다섯가지 주제?, 대원정사, 1997.
▪한자경, ?불교철학과 현대윤리의 만남?, 예문서원, 2008.
▪中村 元, 정태혁 역, ?원시 불교?, 동문선, 1993.
▪三枝充悳, 김진무 역, ?인간론 심리학?, 불교시대사, 1996.
▪E. Conze, Buddhism, Harper & Row, 1959.
▪Sarvepalli Radhakrishnan, 허우성 역, ?인도의 인생관?, 서광사, 1994.
▪월폴라 라훌라, 진철승역, ?붓다의 가르침?, 대원정사, 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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