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주역周易의 인간론
2-2-1. 허물을 보완하여 길한 것을 취함
그리스 사람들은 자신의 운명을 알고 싶거나 국가의 중대한 문제가 발생했을 때 델포이(델피)에 가서 신탁의 소리를 들으려고 했다. 마찬가지로 중국 은殷나라 사람들은 거북점(卜)을 처서 길흉을 살폈다. 그들은 천지의 형상과 비슷한 영물인 거북의 껍질 위에 칼로 구멍을 뚫고, 그 구멍 주위를 불로 구었다. 그리고 구멍 주위에 생겨난 균열(조짐)을 보고 미래를 예측했다. 이것을 계승 발전시켜 주周나라 사람들은 거북점 대신에 시초점蓍草占(莁)을 쳤다. 쑥 종류인 시초는 가새풀로 고대인들은 시초에 귀신과 소통하고 영감이 일어나게 하는 효능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거북 등딱지의 조짐을 모방하여 8괘를 만들고, 그것을 중복하여 64괘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주나라의 역은 하나의 점서占筮였다.
이런 점서를 공자가 중시했다. 그는 죽간을 엮은 가죽 끈이 세 번이나 낡아 끊어지도록 주역을 읽었다. 주희도 ‘역경易經’이라고 이름 짓고 이것을 숭상하였다. 이런 주역은 단지 점치는 데에 쓰이는 것을 넘어, 세상의 변화를 읽고 그 원리를 이해하는 철학적 의미를 담게 되었다. 다산 정약용도 18년 유배 생활 동안에 주역에 천착해서 『주역사전周易四箋』을 지었다.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공정한 선의에서 어떤 일을 하려는데 그 결과가 좋을지 나쁠지 알 수 없을 때, 하늘의 뜻에 맞는지 헤아려 보기 위해, 성인들이 지은 책이 주역”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이런 철학적 내용 때문에 주역은 유학의 경전으로 가치가 인정되어 오경 중 으뜸이 되었다.
이런 『주역』에는 체계적인 존재론이 들어있다. 주역에서 보는 존재의 근원은 태극太極이다. 그리고 태극이 양의兩儀(음양)를 낳고, 양의가 사상四象을 낳고, 사상이 팔괘八卦를 낳았다고 말한다. 사상은 태양太陽, 소음少陰, 소양少陽, 태음太陰을 가리킨다. 건健,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괘가 팔괘이다. (이런 주역의 원리가 우리나라 태극기에 잘 도식화되어 있다) 건은 자연으로는 하늘을 상징하고, 태는 못을, 리는 불을, 진은 우레를, 손은 바람을, 감은 물을, 간은 산을, 곤은 땅을 상징한다. 가족으로는 건은 부, 태는 소녀, 리는 중녀, 진은 장남, 손은 장녀, 감은 중남, 간은 소남, 곤은 모를 상징한다. 이를 상象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주역을 논한 자는 우주 간에 가장 큰 것이 하늘과 땅이고, 하늘 위에서 가장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이 해, 달, 바람, 우뢰이고, 땅 위에서 가장 사람의 주의를 끄는 것이 산, 못이고, 생활에 가장 절실한 것이 물과 불로 보았다. 그리고 이것들을 우주의 근본으로 여겨 8괘로 안배하고, 또 인간의 부모와 자녀 간의 관계에 따라 그것들 간의 관계를 추정했다.
이런 주역에서 인간은 삼재三才 또는 삼극三極의 이념 속에서 이해된다. 삼재나 삼극이란 천天·지地·인人을 말한다. “역이란 책은 넓고 커서 모든 것을 갖추고 있다. 천도도 있고, 인도도 있고 지도도 있다. (...) 천·지·인 삼재의 도일 따름이다.” “육효의 움직임은 천·지·인 삼극의 도이다.” 삼재 또는 삼극이라 할 때 ‘재’나 ‘극’에는 근원적인 것, 가장 높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그래서 삼재, 삼극이란 우주 안에서 가장 귀한 세 가지로서 천·지·인을 말한다.
천·지·인 삼재(삼극)은 우주 속에서 가장 귀한 존재지만 그것을 나타내는 도道는 각각 다르다. 천도는 음양론陰陽論으로, 지도는 강유론剛柔論으로, 인도는 인의론仁義論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주역의 변화 속에서 지도는 천도에 흡수되었다. 그래서 천도의 음양론과 인도의 인의론이 서로 매개되면서 천인합일의 철학으로 발전되었다. 그리고 천도의 음양론, 지도의 강유론, 인도의 인의론을 통하여 구명된 지극한 이치를 태극太極이라고 한다. 이 태극은 대상에 따라 달리 표현된다. 물질에 있어서는 리理, 인간에 있어서는 성性, 하늘에 있어서는 도道 또는 명命으로 나타난다.
주역의 토대를 삼재론이나 천인론이나 태극이라고 하더라도 그 중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인간이다. 궁극적으로 진리의 담지자가 인간이기 때문이다. 천과 지는 자연自然으로,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진리의 원천인 동시에 그것을 구현하는 실천의 무대가 된다. “진실로 그것을 파악하고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없으면, 도 그 자체가 홀로 행해지지는 않는다.” 이런 의미에서 주역의 천지론은 인간론에 수렴된다고 볼 수 있다.
주역에서 인간은 엄밀하게는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가 그야말로 삼재로서의 인간이다. 그는 만물과 달리 만물을 낳은 천지와 동격의 존재이다. 즉 한낱 피조물에 머물지 않고, 천지의 만물화육萬物化育에 참여하는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자연인으로의 인간이다. 그는 한 마디로 우환의 인간, 허물 많은 인간, 결핍의 인간을 말한다. 주역의 「괘효사卦爻辭」에서는 ‘무구无咎’라는 용어가 120여회, 「전傳」에서는 10여회가 나온다. ‘무구’란 ‘선보과善補過’ 즉 허물을 잘 보완하여 길한 것을 취하고 흉한 것을 피한다는 뜻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자연인의 개과천선改過遷善을 강조하는 것이 주역이라고 할 수 있다. 청대의 역학자 이도평李道平은 주역의 384효는 일언이폐지 하면 ‘선보과’라 하였다. 이렇듯이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은 어쩔 수 없이 과오를 저지르는 존재이다. 주역에는 ‘무구’ 이외에도 ‘회悔’와 ‘린吝’이 많이 나온다. 회는 잘못을 인정하고 이를 고치는 태도이며, 린은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이를 고치지 않는 태도를 말한다. 쉽게 말해 회하는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고 린하는 사람은 교만한 사람이다. 회는 결국 길상吉祥으로 이어지고 린은 흉화凶禍로 이어진다. 그래서 자연인은 옳은 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고 잘못인 줄 알면서도 고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고 항상 근심 속에서 살아간다.
주역의 점사에서 많이 나오는 무구는 결국 선보과를 권유하기 위함이다. 무구 즉 허물(대과)이 없다는 것은 역리상易理上 중정中正을 위미한다. 이것은 곧 인간이 덕성德性을 실현한 상태이다. 그런 인간이 진정한 삼재로서의 인간이다.
주역에서 무구를 위해서 제시된 방편이 서술역筮術易에서는 점서占筮이고, 의리역義理易에서는 성덕成德이다. 점서는 불안이나 허물이 생겼을 때 상제나 절대자 또는 하늘의 뜻을 묻는 방식이다. 성덕은 자신의 실패를 돌아보고 덕을 쌓은 것이다. 점서와 성덕 이 두 가지 방편 중에서 보다 보편성을 지니며 합리적인 것이 성덕이다. 천지의 덕을 본받아 신명의 경지에 이르고, 미래에 올 것을 앞서 알고, 미세한 것을 살펴 변통함으로써, 이로움을 극대화하는 것이 주역의 사업이다. 이런 길을 가는 사람이 군자이고 이를 이룬 사람이 대인大人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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