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1-3.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이효범 2021. 10. 15. 08:45

1-3.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다

 

세계는 시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세계는 공간적으로 유한한가 무한한가? 정신과 육체는 같은가 다른가? 여래如來는 사후에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 안 하는 것도 아닌가?

붓다는 이 같은 질문(사류십난四類十難)에 대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침묵하는 태도(avyaka, 무기無記)를 보인다.

무기의 이유로서 붓다는 이러한 문제들에 대한 논의가 인생의 급선무인 행복이나 열반에 드는 것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으므로 이 문제를 추구하는 것은 이롭지 못하다는 실용주의적 설명을 한다. 이 점이 ?전유경箭喩經?에서는 흥미 있는 독화살의 비유로 나타난다.

 

어떤 사람이 독이 묻은 화살을 맞아서 괴로워하고 있다고 하자. 그의 친구와 친족들이 그를 위해서 의사를 불러오려고 할 것이다. 그러나 화살에 맞은 당사자는 나를 쏜 자가 왕족인가, 바라문인가, 서민인가, 노예인가를 알지 못하는 동안은 이 화살을 뽑지 말라. 또한 그 자의 성이나 이름을 알지 못하는 동안은 뽑지 말라. 또한 그 자는 키가 큰가, 작은가, 중간인가. 피부 빛깔이 검은가, 누런가, 혹은 금빛인가. 그 사람은 어디에 사는가. 그의 활은 보통의 활인가, 강력한 활인가. 활시위나 활자루나, 그 깃의 재료는 어떤 것인가. 그의 활의 모양은 어떤 것인가. 이런 것을 알 수 없는 동안에는 이 화살을 뽑으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이런 일들을 알 수가 없으므로 드디어는 죽고 말 것이다. 그와 같이, 만일 어떤 사람이 거룩하신 스승께서 나를 위하여 세계는 상주인가, 상주가 아닌가 등에 대해 그 어느 한쪽을 단정해서 말해 주지 않는 동안에는, 나는 거룩하신 스승 밑에서 청정한 행을 닦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그렇다면 수행을 완성한 스승은 그런 일을 설할 수 없으므로 그 사람은 (고뇌 속에서) 죽고 말 것이다.

 

붓다가 무기한 이유를 설명하는 다른 입장에서는, 이치와 합하지 못하며 마땅한 도리에 맞지 않는다고 하는 진리성의 입장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사류십난 같은 형이상학적 문제는 경험적인 근거를 가지고 그 진위를 확인할 수 없기 때문에, 서로 상반되는 결론이 다 같이 참일 수 있는 이율배반의 관계가 성립한다. 따라서 아무리 논의해도 문제의 해결은 불가능하다. 이 점은 ?순수 이성 비판?에서 칸트가 말하는 이율배반과 비슷한 면이 있다.

예를 들어 육체와 영혼의 동일성을 주장하여 육체의 죽음에 의해 모든 것이 끝난다고 하는 단멸론斷滅論, 그 자체가 해탈을 부정하는 주장이다. 또 죽음과 관계없이 연속되는 자아가 있다고 하는 상주론常住論, 아트만을 범아일여梵我一如의 경지에까지 심화해 놓고, 그러한 아트만이 윤회의 주체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해탈은 있을 수 없다. 또한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의 자기가 연속적인 동일성을 가진 존재로서 상주불멸常住不滅한다면, 성장과 변화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거꾸로 자기가 찰나 찰나에 단절한다고 보면 기억이나 경험의 연속성을 무시하는 셈이 된다. 따라서 옛날의 자기가 지금의 자기와 같다고도 할 수 없고 다르다고도 할 수 없으며, 연속되는 자아가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붓다의 무기중도無記中道의 입장은 이런 문제를 단순히 회피하거나 회의론에 빠진 것이 아니라, 문제의 성격을 통찰함으로써 단, , , 를 초월한 새로운 차원에서 대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새로운 차원의 대답이란 연기설緣起說을 의미한다. ?상응부경전相應部經典?에서 연기가 잘 설명되고 있다.

 

카티야야나여, 이 세간의 사람들은 대개 두 입장에 의거해 있다. 그것은 즉 유와 무이다. 어떤 사람이 올바른 지혜를 갖고 세간의 출현을 여실히 관하면, 세간에 있어 무는 있을 수 없다. 또한 어떤 사람이 올바른 지혜로서 세간의 지멸을 관하면, 세간에 있어 유는 있을 수 없다. () 카티야야나여, “일체가 있다라고 한다면, 이는 하나의 극단설이다. “일체가 없다라고 한다면, 이것도 제2의 극단설이다. 인격을 완성한 사람은 이 두 극단설에 가깝지 않은 중()로서 법을 설한다.

무명無名에 의하여 행이 일어나며, 행에 의하여 식이 일어나며, 식에 의하여 명색名色이 일어나며, 명색에 의하여 육입六入이 일어나며, 육입에 의하여 촉이 일어나며, 촉에 의하여 수가 일어나며, 수에 의하여 애가 일어나며, 애에 의하여 취가 일어나며, 취에 의하여 유가 일어나며, 유에 의하여 생이 일어나며, 생에 의하여 노, , 슬픔, 고통, 걱정, 염려가 있다. 이리하여 이 괴로움의 집적 전체가 나타난다. 그러나 무명이 멸하면 행이 멸하며, 행이 멸하면 식이 멸하며 () 생이 멸하면 노, , 슬픔, 고통, 걱정, 염려가 멸한다. 이리하여 이 괴로움의 집적 전체가 멸한다.

 

여기서는 내(일체)가 불멸하는 실체로서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모두 극단으로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진리는 중도에 있는데 그 중도의 구체적 내용이 연기설이라는 것이다.

연기란 모든 것이 상호 의존적으로 발생한다는 뜻이다. 연기란 말은 말미암아 일어난다는 뜻인데, 연기를 말하는 산스끄리뜨어 쁘라띠땨 사무뜨빠다Pratitya samutpda’, ‘Pratitya’때문에’ ‘~에 의해서’, ‘~로 말미암아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samutpda’태어남’ ‘형성’ ‘생김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연기란 일체의 존재 모두가 그럴 만한 조건이 있어서 생겨났다는 것, 홀연히 우연히 혹은 조건 없이 존재하는 것은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뒤집어 말한다면, 일체의 존재는 그것을 성립시킨 조건이 없어질 때 그 존재 또한 없어져 버린다는 것, 따라서 독립하거나 영원하여 불변하는 것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리풋다Śriputra(사리불舍利弗)?노속경蘆束經?에서 비유를 들어 연기를 설명한다.

 

이를테면 여기에 갈대단이 있다고 하자. 그 갈대단은 서로 의지하고 있을 때는 서 있을 수가 있다. 그것과 같이 이것이 있음으로써 그것이 있는 것이며, 그것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두 단의 갈대에서 어느 하나를 제거한다면 다른 갈대단도 역시 넘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없으면 그것도 없는 것이며, 그것이 없고 보면 이것 또한 있지 못하는 것이다.

 

불교에서 연기의 전형적 모습은,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라고 표현된다. 이 연기의 공식은 두 부분으로 나누어진다. 그 하나는 이것 있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있고 이것 생김에 말미암아 저것이 생긴다말미암아 생긴다는 측면이다. 또 다른 하나는 이것 없음에 말미암아 저것이 없고 이것 멸함에 말미암아 저것이 멸한다말미암아 멸한다는 측면이다. 잡아함경335에서는 이 연기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이 있기 때문에 저것이 있고(此有故彼有)

이것이 생기기 때문에 저것이 생긴다(此起故彼起)

이것이 없기 때문에 저것이 없고(此無故彼無)

이것이 사라지기 때문에 저것이 사라진다(此滅故彼滅)

 

이런 연기는 상호 의존적인 상의성相依性을 나타낸다. 연기는 이것과 저것과의 관계를 시간적인 생성 관계와 공간적이고 논리적인 유무 관계로 규명한다. 즉 연기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생멸변화의 흐름에 바탕하는 현상적이고 물질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시간의 경과와는 상관없는 논리적이고 개념적인 관계까지도 포괄하여, 원인과 조건들이 상호 의존함으로써 결과적 상태를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따라서 단순한 인과율과는 다르다. 불교는 연기의 입장에서 모든 것을 상호 조건 지우는 관계로 파악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과 모든 존재에 대한 규정도 기존의 다른 인도 사상의 입장과 달라지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