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다섯 가지 요소로 되어 있는 인간
그러면 새로운 차원의 존재 원리인 연기설을 바탕으로 해서 붓다는 인간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붓다는 두 가지의 서로 다른 자기를 생각하고 있다. 그 하나는 악덕 번뇌의 바탕으로서의 자기로서 멸각滅却되어야 할 대상(소아小我)이다. 다른 하나는 이상으로서 실현되어야 할 자기(대아大我)로서 회복되어야 할 자기이다. 전자는 이상으로부터 괴리되어 항상 타락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는 성자가 구현하고 있는 인간이 항상 추구해야 할 당위적이고 규범적인 자기이다.
그런데 번뇌 망상에 사로잡혀 항상 근심, 동요, 불안, 죽음의 고통 속에 있는 범부는 일상 생활 속에서 인정되는 자기(소아)를 진실한 자기(대아)라고 잘못 생각하고 있다. 그런 일상적 자기는 끊임없이 변한다. 영원한 자기, 즉 아트만의 진정한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것을 불교에서는 ‘일체一切는 눈과 색, 귀와 소리, 코와 냄새, 혀와 맛, 몸과 촉감, 의지와 법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즉 눈, 귀, 코, 혀, 몸, 의지라는 사람이 갖고 있는 여섯 가지 인식 기관(육근六根)과 색, 소리, 냄새, 맛, 촉, 법이라는 인식 기관(능력)의 대상(육경六境)을 합한 것이 나의 모든 것, 즉 나 자체(일체)라고 규정하는 것이다(이런 육근六根과 육경六境을 합쳐 십이처十二處라고 한다).
여기서 일체란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삼라만상森羅萬象이나 일체만유一體萬有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나의 생존을 구성하고 있는 내적이거나 외적인 모든 요소를 가리킨다. “초기 불경은 범부 하나하나가 만들고 유지하고 강화해 나가는 나의 세계, 그런 주관적인 세계에 관심이 있었다. 그런 세계를 로카loka라고 불렀다. 주로 세간世間이라고 한역되었던 이 말은, 범부가 소유하고 있는 낱낱의 소유물을 포함할 뿐만 아니라 그런 소유물로 이뤄진 세계 전체를 지칭한다.” 이런 인간을 구성하는 인식 기관과 그 대상은 독립된 실체도 아니고 불변하는 요소도 아니다. 그것들은 상호 조건적으로 관계 맺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육근이 육경을 인식하는 과정, 그것이 곧 인간의 전부의 모습인 것이다. 그 속에 따로 나라고 할 것은 없다. 나는 무아無我인 셈이다.
불교는 이런 무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서 오온설五蘊說을 주장한다. 오온설에 따르면 인간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 이름 붙일 수 있는 다섯 가지 부분으로 조직되어 있다. 이를 오온이라고 하는데 이들 하나하나에 대한 설명은 다음과 같다.
색(rpa) : 형태가 있는 것으로 파괴될 수밖에 없다는 뜻을 지닌다. 단순히 시각적인 것뿐만 아니라 소리, 냄새, 맛, 촉감을 포괄하는 일체의 감각적인 것을 가리키며, 일반적으로 변화하는 물질적 성질의 전체이다. 이것은 인간의 육체, 즉 물리적 요소를 가리킨다. 그래서 육신을 색신色身이라고도 한다.
수(vedan) : 느낌, 감수의 뜻으로 감각 기관이 외부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서 고苦, 락樂, 불고불락不苦不樂의 느낌을 수용하는 것이다.
상(saj) : 생각, 표상의 뜻으로 물질적인 것이나 정신적인 것이나 그것의 표상을 취하는 것이다.
행(saskra) : 형성, 결합의 뜻으로 감각 기관과 그 대상에 대해서 능동적으로 행위 하고 작용하는 의지를 말한다.
식(vijna) : 의식, 식별의 뜻으로 대상을 구별하는 판단 이성의 작용이다.
여기서 온蘊(skandha, aggregates)이란 말은 ‘모여 쌓인다’라는 뜻으로 보통 ‘집합’이라고 말하지만, 실제적 의미의 사물의 집합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과정의 유형(a type of process)’을 뜻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끊임없는 흐름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색이 있다고 하는 것은 물질이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며, 감각적 인상의 유동적 집합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수도 심리적 존재물로서의 느낌이나 감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으로 수용하는 끊임없는 흐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오온설은 자연과학에서와 같이 순수한 대상으로서 인간을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험을 중심으로 하는 구체적 현실의 여러 측면을 파악한 것이다. 상식적으로 말하면 이 가운데 색은 물리적 측면을 가리키고, 수, 상, 행, 식은 심리적 측면을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분석은 인간 존재를 정신과 육체라고 하는 이원적 실체에 의해 파악하는 것과는 매우 다르다. 즉 오온설은 인간의 전체 구성을 문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방식을 문제로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오온이 인간인 것이 아니라, 오온이 있음에 의해서 인간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불교에서 인간을 뜻하는 말인 ‘유정有情(sattva)’은 오온에 대해 탐욕하고 집착한다는 의미가 들어있다. 깨닫지 못한 유정자는 오온에 집착해서 그것을 나라고 보는 것이다.
그런데 오온의 화합을 나라고 볼 때 인간은 색이라는 육체와 수, 상, 행, 식이라는 마음으로 구별된다. 이때 마음과 육체는 나라는 유기적 생명체 속에서 서로 의존하고 조건 지우는 관계로 파악된다. 이 관계는 우연적 관계도 아니며 인과적 관계도 아닌 상호 조건적 관계이다. 그러므로 마음을 떠난 신체도 없고 신체를 떠난 마음도 없다. 그러나 불교적 관심은 마음의 존재 방식에 의해서 생존 방식이 결정된다는 점에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전은 “모든 것은 마음을 앞세우며, 마음을 주로 하고, 마음에 의해 이루어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은 자는 마음을 밝게 하며 육신에 대한 바른 견해를 가짐으로써, 화살을 맞았을 경우에도 육신의 고통은 느끼지만 마음의 고통은 느끼지 않게 된다고 한다. 따라서 불교는 내적인 안정을 기하여 자기가 자기의 주인이 되라고 가르치는 것이다.
그러나 오온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세상을 보면 색, 수, 상, 행, 식의 오온도 모두 무상無常하게 보인다. 나의 육체와 마찬가지로 마음이라 불리는 것도 나뭇가지 사이를 오가는 원숭이와 같이 잠시도 정지하지 않고 변한다. 또 오온의 어느 것도 나의 자유에 의해 지배되는 것은 없다. 몸을 병들지 않게 할 수 없고 마음도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오온의 어느 것도 나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오온이 나인 것도 아니고 내가 오온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니며, 내 속에 오온이 있는 것도 아니요 오온 속에 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이처럼 오온설은 어떤 것도 나라고 할 수 없다는 무아설無我說의 전제로서 설명된 것이다. 즉 인간의 변함없는 주체라는 개념을 없애기 위한 틀로서 제시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오온 무아설은 실재하지 않는 실체적 나에 대해 집착하지 않음은 물론, 집착을 적극적으로 제거해야 할 실천의 당위성을 일깨워준다. 그러므로 궁극적으로는 불교의 이상인, 나에 대한 집착에서 따라오는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키고자 한다.
?잡아함경?에서 보면 붓다는 갓짜야나라고 하는 수행승에 대한 가르침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상 사람은 집착 때문에 결박당하고 있으나, “이것이 나의 아트만이다”라고 집착하지 않는다면, 괴로움이 현실로 생하고 있을 때에는 괴로움이 생하는 것을 보고, 괴로움이 현실로 멸하고 있을 때에는 괴로움이 멸한 것을 보고, 미혹되지 않고 의혹하지 않으며, 남에게 의지하지 않으면 여기에 지혜가 생한다. 이런 것만으로도 올바른 견해가 일어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해탈(니르바나)이다. 해탈이란 인도에서 정신적인 해방을 뜻하는 가장 일반적인 말이다. 붓다는 망집을 끊는 것으로 니르바나에 도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색, 수, 상, 행, 식에 집착하여 걸리기 때문에 “나는 있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난다. 그것들에게 집착하여 걸리지 않는다면, “나는 있다”고 하는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 보거나 듣거나 생각하거나 식별한 쾌락과 좋은 사물에 대한 욕망이나 탐욕을 제거하는 것이 불멸의 니르바나의 경지이다. 이 사실을 잘 알고, 마음을 잘 써서 현세에 있어서 완전히 번뇌를 떠난 사람들은 항상 안온함으로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세간의 집착을 초월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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