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2)

이효범 2021. 7. 21. 07:11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2)

 

o 선에 대하여(2)

 

구녕 이효범

 

선이란 말을 규명할 때 우리는 그 말이 문장 속에서 명사로 쓰이는지 아니면 형용사로 쓰이는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선은 쾌락이다.”물을 보면 지극한 선을 알 수 있다.”는 문장 속에서는 선이 명사로 쓰이고 있다. 그러나 이 사과는 좋은 사과다.”지식은 좋다.”와 같은 문장 속에서는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다. 이 점은 문장의 형식과도 관계가 있다. “이 사과는 좋은 사과다.”라는 발언과 선은 쾌락이다.”라는 발언은 논리적 성질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전자의 좋은이라는 형용사는 사과라는 대상에 적용된다. 이때의 좋은이라는 말의 뜻은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리고 이 경우에 설명 내지 검토되고 있는 것은 사과이다. 사과를 파는 사람이 이 사과는 좋은 사과다.”라고 말했는데, 사는 사람이 사과를 자세히 살펴보고, 사과의 한 부분이 썩어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이 사과는 좋은 사과가 아니다.”라고 반박할 수 있다. 그러면 사과 장수는 더 이상 우기지 못할 것이다. 썩은 사과는 좋은 사과가 아니라는 것을 두 사람이 동일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자의 문장 속에서는 자체가 문제가 되고 있다. 이 때 검토되고 있는 것은 쾌락이 아니라 선 그 자체이다. 쾌락주의자는 선이 쾌락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복주의자는 선은 행복이고, 행복은 결코 쾌락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행복은 쾌락으로 다 설명할 수 없는 더 고상한 무엇이라고 말한다. 이에 대해 두 사람은 밤새도록 논쟁할 수 있다. 이 때 논쟁의 초점은 어디까지나 선 그 자체이다. 선이 주어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