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콩트(4. 소프론의 추억)
구녕 이효범
2004년 내가 혼자 유럽 배낭여행할 때 일이다. 오스트리아 여행 중에 만난 우리나라 중년 남성이 내가 앞으로 헝가리에 갈 예정이라니까, 친절하게 말을 받았다. “가볼만한 곳이지요. 물가도 싸고 볼 곳도 많고요. 또 그곳에서는 헝가리 말을 하나도 몰라도 불편하지 않아요. 신통하게 우리말을 다 알아들어요.” 의젓한 신사가 하는 말이라 나는 반신반의했다.
헝가리에 오니 우선 호텔에서 날짜 기입하는 순서가, 우리와 같이 연, 월, 일순으로 되어 있어 친근감이 들었다. 또 서유럽에 비해 상대적으로 물가가 싸서 적이 안심이 되었다. 더 나아가 이 나라 국화가 무궁화인가 싶을 정도로 전 지역에 무궁화가 피어 있어 너무나 반가웠다. 그런데 오랜 공산화가 가져온 빈곤으로 너무나 많은 값진 문화유산들이 낡고 방치되어 있어 가슴이 아팠다. 공산사회 때 지은 싸구려 낮은 아파트들이 쓰러질 듯 허물어졌고 차들도 20~30년 넘은 고물이 대부분이었다. 한때 대국이었던 항가리가 이렇게 볼품없는 헝그리 국가로 전락하다니 믿기어지지 않았다.
투르크 계통의 유목기마민족인 마자르가 세웠다는 헝가리의 말은 어순은 우리와 같을지 몰라도, 길거리를 지나다니며 귀를 쫑긋 세워도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부다페스트 서쪽에 위치한 ‘죄르’라는 도시의 기차역 앞에 있는 호텔에서 만난 지배인은 한국인은 처음 만난다고 반가워했다. 우리나라 여권을 신기한 듯 종이가 뚫어져라 살펴보았다. 그리고 하나에서 열까지 우리말을 말해줄 수 있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고, 내가 또박또박 말하니까 그것을 꼼꼼히 헝가리 말로 적었다. 그리고 그것을 우리말로 완벽하게 발음해내었다. 와, 내가 감탄하니까, 어깨를 으쓱하더니 다시 한 번 복습하는 것이었다. 손님이 별로 없었던지 그는 밤이 깊어 호텔 입구 공중전화에서 통화를 끝낸 나를 기다렸다는 듯이 다시 붙잡고, 일상적으로 자주 쓰는 한국말을 물어보았다. 내가 한국말을 가르쳐주면서 그것을 헝가리말로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같은 것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그 신사가 나를 놀리느라고 뻥을 쳤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괘씸했다.
헝가리를 다 돌고 오스트리아 빈에 다시 가기 위해 나는 빈에서 60km 정도 떨어진 헝가리 국경 도시인 소프론(Sopron)에 여장을 풀었다. 내가 걱정이 되어 막무가내로 유럽에 온다는 아내가 빈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이었기 때문이었다. 소프론은 쇼팽과 쌍벽을 이루는 대음악가 리스트의 고향으로, 아름다운 중세 유적이 남아있는 음악과 문화의 도시였다. 이 도시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시민들이 투표를 통해 오스트리아가 아닌 헝가리로 남길 희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헝가리의 자부심을 가진 소프론도 공산화의 저주를 비껴가지는 못했다. 건물들은 윤기를 잃고 도시는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싼 숙소를 찾는 나에게 인포메이션 센터에서 소개한 곳이 방학 동안 비워 있는 여자대학 기숙사였다. 기숙사도 역시 낡았으나 한적했고 한낮이나 그런지 사람들이 하나도 보이지 없었다. 내게 배정된 방이 212호였다. 무거운 배낭을 짊어지고 끙끙거리며 3층에 올라 방문을 열려고 열쇠를 돌렸더니 도무지 문이 열리지 않았다. 나는 처음에는 자기 방이 외부에 공개되기를 꺼린 그 방의 여학생들이 대학 방침을 몰래 어기고, 내부에 어떤 장치를 걸어 문이 열리지 않는 줄 알았다. 그런데 바꿔준 그 옆 213호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접수를 보던 뚱뚱한 아주머니는 화가 나서 누군가를 크게 소리 내어 불렀다. 그러자 술 냄새를 풍기는 나이 든 바짝 마른 아저씨가 느리게 와서는 땀을 흘리며 자물통을 교체했다. 나는 돈을 낸 손님이었지만 조수처럼 아저씨를 도와 드렸다. 그는 작업이 끝나자 힘든 전투에서 승리한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게 돌아갔다.
나는 이제 되었다 싶어 방에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짐을 풀고, 침대 시트를 새로 깔고 누워 잠시 휴식을 즐겼다. 그런데 고요 속에 있으니 비로소 잊었던 허기가 찾아왔다. 점심이 한참 지난 시간이었다. 외출하여 굶주림을 해결하려고 문을 여는데 아뿔싸, 다시 문이 열리지 않는 것이었다. 이리저리 돌리고 아무리 애써 봐도 허사였다. 이번에는 방밖이 아니라 방안에 갇힌 것이다. 순간 두려움이 엄습했다. 처음에는 젊잖게 문을 두드리며 “Please, help me.”를 외쳤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접수하던 곳은 0층 멀리 떨어져 있었다. 내 방은 큰 건물의 3층 정원 안쪽 구석에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현기증이 났다. “Help me.”를 있는 힘을 다해 아무리 크게 외쳐대도 그리고 문을 아무리 두드려도 어떤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배가 파산되어 무인도에 혼자 있는 느낌이었다. 그 때 “Help me.”로는 무언가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살려주세요.”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반응이 없었다. “이 새끼들아, 여기 사람이 죽고 있단 말이야. 문 열어라.” 악을 썼다. 아무도 모르는 이국에서 객사할 것만 같았다. 곧 방학이 되어 아내가 빈 국제공항에 올 텐데 그러면 누가 낯선 공항에 나가 아내를 맞이하나. 나도 걱정이었지만 아내도 걱정이 되었다. 그렇게 오지 말라고 말렸는데도 온다고 고집하는 바람에 나는 어렵게 여행 노선까지 바꿨는데, 아내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래도 내가 기어코 여기를 빠져나가 아내를 살려야 할 것 같아, 비장한 마음까지 들었다. 나는 창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고 마지막 목소리를 다해 발광을 했다. 얼마가 지났을까? 온몸에 진이 다 빠져나갈 때 문밖에서 사람들의 시끄러운 소리가 났다.
“살려주세요.”라는 말을 그들이 알아들었을까. 아닐 것이다. 독일에서 만난 또 다른 오래 여행하던 우리나라 아주머니는 “독일 말이 전부 우리말로 들려요.”라고 말한 것이 생각났다.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쓰고, 우리는 사실 그 언어를 모르고 있는데도, 우리는 그 소리를 우리말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오스트리아에서 만난 신사도 전혀 틀린 말을 한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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