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콩트(3. 이효범)

이효범 2021. 5. 20. 18:48

o 콩트(3. 편지)

 

구녕 이효범

 

인생은 참 묘하다. 시간이 있으면 돈이 없고 돈이 있으면 시간이 없다. 또 돈과 시간이 갖추어지면 체력이 떨어진다. 돈과 시간과 체력이 구비한 다음에 세계 여행을 떠나기란 불가능하다. 또한 세상 일이 완벽한 조건이 갖추어진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토인비 말처럼 자연의 도전이 있어야 문명이 시작되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전쟁의 한 가운데서 명상록을 썼다. 고호의 위대한 그림은 빈곤의 극치에서 나왔고, 프리드리히 휠덜린의 시도 정신질환에서 탄생했다. 인생이 그러하듯이 무언가 부족할 때 떠나는 것이 여행이다.

 

나는 안식년을 맞이하여, 적금을 깬 2000만원을 유로화로 바꿔 복대에 넣어 배에 차고, 200441일 만우절 날에, 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작정 혼자 유럽 배낭여행을 떠났다. 학교 선생인 아내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었다. 나의 여행은 정해진 기한은 없었다. 그야말로 정처 없이 돈이 떨어질 때까지 갈 데까지 가보는 여행이었다. 결국 5개월 만에 나는 아내에게 잡혀서 집으로 돌아왔다. 그 여행 중에 나는 가족 이외에 두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그 중 한 사람에게는 두 번을 썼다. 더 쓰고 싶은 사람은 많았으나 여자에게 편지 쓰는 일은 위험한 일이었고, 남자 친구에게 쓰는 일은 결국 나를 자랑하는 꼴이 되어 꾹 참았다. 두 번의 편지를 공개해본다.

 

바르셀로나에서 보낸 첫 번째 편지는 이렇다. “선생님께, 앞의 존칭을 생략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선생님께라고 하기에는, 제가 선생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왠지 쑥스럽고, ‘존경하는 선생님께라고 하기에는, 제가 선생님을 누구보다도 존경하지만 왠지 친밀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 거부감이 듭니다. 그러니 사랑하고 존경하는 선생님, 이제 유렵여행이 한 달이 넘었습니다. 가족 이외에는 선생님께 첫 편지를 씁니다. 그리고 선생님을 만난 지 10년 만에 첫 편지인 것 같습니다. 집을 떠나 보니 편지를 쓸 사람이 없다는 것이 저를 초라하게 만듭니다. 제가 자연스럽게 편지를 쓸 수 있고 제 편지를 부담 없이 즐겁게 읽어줄 수 있는 사람이 선생님 이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제 잘못인지 아니면 시대의 탓인지 나는 아직도 알 수 없습니다.

 

국경을 넘어 자유스럽게 왕래하니 유럽은 이제 한 나라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국경을 넘으면 왜 그렇게 주변 모습이 달라지는지, 그리고 한 나라 안에서도 지역별로 도시별로 왜 그렇게 특징과 인상이 구별되는지 신기할 정도입니다. 유럽연합은 경제적으로 거대한 국가로 통합되었지만 오히려 문화적으로는 자기의 고유한 정체성을 유지하려고 더욱 노력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 길을 돌아 그리고 힘들게 많은 경비를 들여 다른 지역과 유적지를 찾아가는 것은, 그것이 가장 높은 인간 정신이 빗어낸 걸작일 뿐만 아니라 자기 고유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국가가 아니라 한 지역의 주인공들인 주민들이 어떻게 특정의 생기 있는 얼굴을 만들어내느냐가 그 지역의 운명을 결정하는 요체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주마간산 식으로 피상적으로 찾아가는 관광여행은 주로 시각과 미각에 관련됩니다. 시각은 건축물, 박물관, 미술관, 공원, 자연 풍경 등에 해당하고, 미각은 먹거리와 관련됩니다. 그러므로 관광이 성공하려면 천혜의 자연이나 천재의 걸작들을 구비하든가 아니면 먹거리 문화가 풍부해야 합니다. 거대하고 특징 있는 미술관이나 박물관 그리고 천재적인 예술가가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예술가 중에서도 대중이 가장 접근하기 힘든 사람이 시인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시야말로 나름대로 보편성을 노래한다고 해도 정신 중에 가장 고귀한 정신, 언어 중에 가장 토착적인 언어로 빗어내는 예술이기 때문에, 관광을 즐기는 일반 대중이 그 맛을 향유하기에는 너무나 힘들 것입니다. 시가 자기만족이나 자기 구원을 넘어 역사나 지역공동체에 기여할 수 일이 무엇일까를 여행 중에 종종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분권화된 공간별로 시적 전통을 어떻게 계승해나갈 것인가를 고민해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10년 동안 줄기차게 모여 계룡산과 금강가에서 시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어떤 면에서는 이 지역에 보석을 박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여행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처럼 지구 곳곳에 박혀있는 빛나는 보석을 찾아가 감상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우리 고장에 우리의 얼굴을 닮은 우리의 보석을 창조하는 일, 그것이 무엇이고 어떻게 가능할지를 더욱 가열 차게 탐구해보겠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보고 싶습니다. 특히 여자 회원들이 많이 보고 싶습니다. 이 말을 우리 회원들에게 전해 주십시오. 여행이 언제 끝날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젊은 대학생들이나 하는 이런 배낭여행을 나이 50에 접어들어서 그것도 혼자서 하려니 좀 무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너무 힘들면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집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아직 유럽 여자와는 깊게 얘기를 나누지 못했습니다. 저에게 접근하는 여자는 소매치기든가 집시 여인 아니면 큰 도시의 거리의 여자가 전부입니다. 이제 편지를 줄이겠습니다. 선생님께 이렇게 편지를 쓸 수 있어 제게는 영광이고 참으로 힘이 됩니다.”

 

한 달 뒤쯤 나는 빈에서 두 번째 편지를 보냈다. “여행이 두 달이 넘었습니다. 그 동안 안녕하신지요. 이제 날씨도 무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여행을 시작한 4월 초순에는 스페인 남쪽에 아카시아 꽃이 한창이었는데, 이제 이곳 오스트리아 빈에서도 아카시아 꽃이 만개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벚꽃이 남쪽에서부터 부상하듯이, 저는 아카시아 향기를 쫓아 유럽을 여행하고 있는 셈입니다. 짧은 기간에 세계적인 관광명소를 찾아 여행하는 것은 마치 며칠 만에 세계 100대 위인전을 읽는 거와 같습니다. 너무 위대한 것에 감동받았기 때문인지 이제 조그맣고 평범한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지금까지 좋았던 도시는 파리, 생말로, 투르, 톨레도, 리스본, 파티마, 코르도바, 그라나다, 바르셀로나, 아비뇽, 모나코, 피렌체, 피사, 시에나, 루까, 로마, 폼페이, 아시시, 베네치아, 인터라켄, 루체른, 인스부르크, 빈 등이었습니다. 모두들 독특한 개성을 갖고 있는, 참으로 살고 싶은 부러운 도시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오래된 유적이나 성당, 박물관과 미술관, 고요하고 그림 같은 풍경을 혼자 보기보다는 사람과 지지고 볶는 일상이 그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곳 빈의 유스호스텔에서 말레이시아에서 온 중국계 노인 두 분을 만났습니다. 그들은 모두 말레이시아 중국인 학교의 영어선생님과 중국어선생님이었는데, 이제 은퇴하고 세계 여행을 취미로 하는 분들이었습니다. 한 분은 61세이고 다른 한 분은 70세가 넘었는데 모두 저보다 정정하고 유쾌한 분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금방 친해져서 밤에 오페라도 보러가고, 제 일정에도 없던 도나우강을 햇살이 화살처럼 꽂히는 한 낮에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어렵게 걸어서 만난 도나우 강물은 노래 속에 나오는 것처럼 푸른 것이 아니고 황토색이어서 실망이 컸습니다. 이곳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5시간 30분쯤 가면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나온다고 합니다. 먹는 것은 싼 슈퍼마켓에서 사서 세끼 다 해결하고, 최소한의 경비로 최대로 여행을 즐기는 젊은 노인들에게서 저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지금이 가장 행복하고 다시 젊은 날 학교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은 제게는 단비 같은 경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사실 이것보다 더 좋은 경험이 하나 있습니다. 빈에 오기 전에 저는 뮌헨에서 3일을 묶었습니다. 하루는 큰 맘 먹고 밤에 유명한 관광명소인 큰 맥주 집에 들렀습니다. 남녀노소, 색다른 인종 가릴 것 없이 모르는 사람들도 친구처럼 큰 잔에 맥주를 들이마시며 즐겁게 떠들었습니다. 분위기에 약한 나는 오랜 만에 맥주도 실컷 마셔 기분이 한껏 상승되었습니다. 그래서 여기가 외국인 것도 잊고 술에 취하면 하던 버릇처럼 통로에 나가 계룡산에서 오래 연마한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조금 후에 팬이 생겼습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온 중년의 여인이 같이 춤을 추자고 옆으로 다가왔습니다. 저는 조금 긴장했지만 몹시 취한 척 허리도 강하게 껴안기도 하고 발도 가끔 밟아도, 취하고 흥이 난 그 남국의 여인은 연신 좋다고 웃으면서 몸을 부딪쳐 왔습니다. 나는 그녀가 귀여워서 맥주도 사주고 춤을 연신 추었습니다. 그러다가 현찰 유로가 들어있는 두툼한 지갑을 살짝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그 여인은 2차로 디스코에 가서 더 춤을 추자고 제안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밤 12시까지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반쯤 제 정신을 놓은 채, 되는 말 안 되는 말 마음껏 지껄이면서 소음 속에서 날뛰었습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전혀 낯선 이국에서 저는 외로운 혼자였습니다. 호텔 방도 비워있습니다. 겁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여자에게는 같이 여행하는 여자 친구 하나가 있었습니다. 밤이 깊어지니까 불안해진 그 여자 친구는 내 친구에게 가자고 조르는 것이었습니다. , 하느님. 그 정열의 남국 친구도 결국 나보다는 자기 여자 친구를 선택하고 말았습니다. 선생님, 제 이야기만 길게 늘어놓고 말았습니다. 자주 거처를 옮겨 다니고 산만한 외부 환경에 눈이 팔려 시는 쓰지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 회원님들께 안부 전해주십시오.”

 

새로운 도시에 들어가는 것은 새로운 책을 읽는 것과 같다. 여행은 점점 익숙해졌다. 동유럽과 북구는 또 어떤 풍경일까? 북구의 여름 해변은 나체 해변이라는데 기대가 되었다. 그런데 오랜 만에 아내한테 안부 전화를 하니까 청천 하늘에 날벼락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여름 방학에 유럽에 와서 나와 같이 여행을 하겠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고 물으니까 바람끼 많은 남편이 걱정이 되어 자기가 챙겨야겠다는 것이다. 나는 아직 건강하고 유럽은 치안이 좋아 그럴 필요가 전혀 없다고 해도 아내는 막무가내였다. 완고한 음성 뒤에는 어떤 노기가 숨어있는 것 같았다.

 

편지가 아내에게 들어갔을 리는 만무할 것이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좁다. 우리 시 모임에 아내와 친한 친구가 있다는 것을 나는 깜박 잊었다. 나는 선생님에게 편지를 모임에 가지고 갔는지를 차마 물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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