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콩트(2. 미리암 할머니)
구녕 이효범
1991년 2월 26일 아침, 드디어 프린스턴(Princeton) 대학교 내에 위치한 매기(Magie) 아파트에 도착했다. 김포국제공항에서 델타 항공기를 타고 미국 서부 포틀랜드에 내려, 국내선으로 갈아타고, 솔트 레이크 시티에 도착하여 5시간을 비행장에서 머문 다음, 다시 비행기를 바꿔 타고 뉴욕 존 에프 케네디 공항에 내려, 뉴저지에 있는 친구 동생네에서 하루 밤을 자고, 여기까지 왔으니 도대체 며칠이 걸린 것인가. 그것도 단출하게 나만 몸만 온 것이 아니라 온 식구가 고추장은 물론 김치까지 담아, 남대문 시장에서 산 질긴 검은 천 트렁크 5개에 이사 오는 것처럼 짐을 끌고 왔으니, 내가 30대가 아니었으면 아마 불가능했으리라.
영어를 전혀 모르는 두 딸은 매기 아파트란 말에 “왜 매기 아파트라고 했지? 오히려 붕어 아파트라고 하지.”라며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매기의 추억’이라는 노래가 먼저 떠올랐지만, 여기서는 건조한 철학만 파고들지 말고 멋지고 신나는 추억을 만들고 싶었다. 아파트 뒤편은 카네기 호수가 펼쳐져 있고 주변은 숲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호숫가에는 캐나다 천둥오리들이 놀고 있고, 호수에는 학생들이 배를 젓고 있었다. 어릴 때 옥스퍼드 대학생들과 캠브리지 대학생들이 조정경기 하는 사진을 보고 감탄한 적이 있는데 이제 그런 광경을 실물로 본다는 것이 믿기어지지 않았다. 붉은 벽돌로 된 아파트는 백만장자나 살만한 풍수 좋은 터였지만 1965년에 지어진 내부는 참으로 검소했다.
프린스턴은 역사적이고 아름다운 대학도시였다. 고속도로로 1시간을 달려 남북으로 위치한 필라델피아와 뉴욕은 아주 살벌해도, 이곳은 도둑 하나 없는 깨끗한 동네였다. 학교 앞 나소 스트리트에는 영국 식민지 시대의 건물들이 이층으로 줄서 있고, 큰 집들과 넓은 잔디밭, 울창한 숲 그리고 전봇대에 헌 구두를 예술품으로 걸어놓을 줄 아는 여유로운 곳이었다.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프린스턴 대학도 명문임이 틀림없다. 학부학생 4500명, 대학원생 1500명, 교수 820명을 가진 245년 역사의 사립대학이었다. 총장이 집무하는 나소홀은 미국 독립전쟁 당시 가장 큰 건물 중 하나였고, 총장실로 올라가는 돌계단은 움푹 패여 있어 걷는 느낌이 불편할 정도였다. 내가 간 철학과도 미국과 세계 철학을 이끌고 있는 명문 학과였다. 학과 사무실은 철학과답게 비좁고 낡은 1879홀에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있었다. 인간 가치를 종합적으로 연구하기 위한 기금으로 록펠러가 2100만 달러를 기증했는데, 그 중 100만 달러는 건물을 짓는데 사용할 수 있도록 지목되었다. 600만 달러가 필요한 이 건물의 나머지 비용 중 400만 달러를 이 대학 졸업생 맑스(Mark)가 기증하기로 했다. 그래서 앞으로 준공될 그 건물은 막스관으로 명명한다고 한다. 자유 한국에서 온 내 문제는 아니지만 그 기증자의 이름이 칼(Karl)이 아닌 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미국에 오니 아내는 무척 들떠 있었다. 모처럼의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많은 경험을 하려고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모든 일이 말이 통해야 가능하기 때문에, 아내는 먼저 이 지역 카운티 대학인 머서대학 어학코스에 등록했다. 그리고 프린스턴 고등학교에 개설된 야간 어학 강좌를 신청했다. 또 프린스턴 대학 내 외국인을 위한 국제관에 의뢰해서 자원봉사자 한 명을 주기적으로 만났다. 그것도 부족한지 교회도 안 나가던 사람이 외국인들끼리 하는 목요일 성경읽기 모임에 나가고, 끝내 그 교회를 통해 조지 할아버지와 미리암 할머니를 소개 받았다.
그들 노부부는 30분 정도 차를 달려 일주일에 한 번씩 아내에게 영어를 가르치려고 우리 아파트에 왔다. 할아버지는 존슨앤존슨 제약회사에 다니다 퇴직했고, 할머니는 초등학교 교사로 은퇴했다. 딸만 넷 둔 그들은 세 딸은 출가해서 외국과 먼 지역에 살고 있고 아직 결혼 하지 않은 막내는 혼자 뉴욕에 나가 있어, 부부끼리만 살고 있었다. 얼마 안가 우리는 그들과 친해졌다. 그들은 아내가 만드는 잡채와 김치를 좋아했고, 할아버지는 정력에 좋다는 내 구라를 정말로 믿었는지 오실 때마다 인삼차를 요구했다.
딸들이 리버사이드 초등학교에 잘 적응하고 우리가 현대 소나타 차도 사고 미국 생활에 조금 안정될만하니까 노부부는 주말에 우리 가족을 초대했다. 델라웨어 강이 보이는 언덕 위 숲속에 난 아름다운 집이었다. 그들은 집 여기저기를 안내하면서 그들의 부모가 쓰던 오래되고 볼품없는 가재도구들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할머니는 6살 때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모로부터 받은, 천으로 만든 색이 바라고 못생긴 조그만 여자 인형을 소중히 들어 우리 앞에 놓았다. 그리고 마치 그 시절을 음미하는 듯이 기쁨에 들떠 장황하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나는 눈을 크게 뜨고 감탄사를 연발하였지만, 인형 때문이라기보다는 아직도 나이든 할머니가 저런 소녀의 감정을 가지고 있구나 하는 점이 놀라왔다. 식탁에 나온 음식은 푸짐하지는 않았지만 정갈했다. 그리고 초록천이 깔린 식탁 위에는 촛불이 음악과 함께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달콤한 포도주가 곁들여졌다.
나는 어릴 적 할머니 집에 온 것처럼 주변이 편안해졌고 노부부에게 어떤 응석을 부려도 모든 것이 용서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심술궂게 깜짝 제안을 했다. 손님이 한국 사람이니 미국 신사라면 마땅히 한국식으로 대접을 해야 한다고. 그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나는 한국의 주법에 대해 말하고 한국식으로 술잔을 하나로 돌리자고 제안했다. 잠시 머뭇거리다가 그들은 입가에 웃음을 띄우며 동조를 표시했다. 포도주 잔이 두 바퀴 돌은 후에 나는 다시 음주가무의 한국철학에 대해 힘들여 설명하였다. 초등학교 교사출신 할머니의 노랫소리는 감미로웠다. 나는 진심으로 앙코르를 외쳤다. 할머니도 스스로 자랑스러운 듯 흐뭇한 표정으로 앙코르를 받아주었다. 할아버지도 시골 교회 합창단 출신이라니 못하는 실력은 아니었다. 아내도 음치는 아니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다닌 불교학생회에서 비록 어떤 친구보다는 조금 잘했지만 그래도 그 학생회의 삼대 음치에 드는 실력이었다. 나는 술을 먹든가 흥미 나면 남의 눈치 안보고 큰 소리로 줄기차게 가곡만 부른다. 박목월이 작사한 ‘이별의 노래’가 나의 18번이다. 우리 아이들도 신이 났는지 시키지도 않았는데도 자꾸만 노래하겠다고 하여 애를 먹었다.
그런데 만찬이 거의 끝날 즈음 아내는 더듬거리는 영어로 무엇인가를 할머니에게 말하고 있었다. 가만히 훔쳐 들으니 남편 흉보는 것이었다. 한국 남자, 그 중에서도 우리 남편은 특히 주방에 들어가기를 아주 싫어한다고. 할머니는 어디 야만족 습속인가 놀라는 표정을 크게 지었다. 아내는 남편이 미국에 왔으니 고루한 남편이 선진국 문화로 빨리 개화하도록 할머니가 우리 남편에게 설거지를 시키라고 간청했다. 할머니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나에게 명령했다. 어느새 할아버지도 인삼차를 얻어먹어서 그랬는지 내 손을 잡아끌고 있었다.
돌아가신 어머니는 남자가 주방에 들어가면 불알이 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결혼해도 법도를 엄격히 지키라고 훈계하셨다. 그러나 어머니, 여기는 미국입니다. 불효를 용서해주세요. 나는 어쩔 수 없이 충청도 양반의 체통을 접고 접시를 닦기 시작했다. 할아버지도 내 옆에서 커피를 끓였다. 주방에서 뒤돌아보니 여자들은 모두 응접실 소파에 앉아 웃고 떠들고 있었다. 나는 가족들을 떼어놓고 미국에 혼자 오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했다. 어떻게 하면 오늘의 이 주도면밀한 아내의 골탕을 앙갚음하나. 그리고 나는 쉬익 웃었다. 첫눈 올 때 보자고 속으로 다짐하였다. 얼마 전 프린스턴 대학 신문을 보니까, 프린스턴에 딸을 보내려는 어떤 학부모가 보낸 편지가 실려 있었다. 프린스턴 대학에서는 첫눈 오는 날 기숙사에 사는 서퍼모어(2학년) 전 학생이 한밤에 나체로 뛰어다닌다는데, 그게 정말로 사실인가? 그렇다면 어떻게 과년한 딸을 프린스턴으로 보낼 수 있는가 하는 내용이었다. 나는 혹시 몰라 그 기사를 아내에게 말하지 않았다. 참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이런 앙갚음보다도 당장의 걱정은 아내가 이런 야만적인 미국문화에 깊이 물들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하는 순간 어떻게 하면 실추된 내 권위를 되찾을 수 있을까 묘수가 떠오르지 않았다.
헤어질 때 할아버지는 악수를 하는 나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는 나를 품으로 안아 깊게 그리고 오래 포옹을 해주었다. 묘한 감정이 들었다. 여자 냄새가 났다. 아내 말처럼 나는 충청도 산골 너무나 고루한 집안에서 자라서 아내조차 좀처럼 포옹하지 못하는 숙맥이었다. 아파트에 와서 소주를 더 한 것이 화근이었다. 다음 날 아침에 아내는 한밤중에 꿈속에서 할머니를 왜 불렀느냐고 다그쳤다. 나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 후 아내는 할머니의 영어 개인 교습을 끊었고, 우리는 두 번 다시 강 언덕 아름다운 집을 방문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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