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트

콩트(1. 맞선)

이효범 2021. 5. 15. 18:36

o 콩트(1. 맞선)

 

구녕 이효범

 

짝을 만나는 방식은 다양하다. 지금은 학교나 직장이나 종교 단체나 사회의 여러 클럽에서 자유스럽게 만나 결혼하는 것이 제일 많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는 주로 맞선에 의지했다. 그래 쑥스럽지만 내 얘기를 해보자. 내 얘기를 한다고 미화하거나 없는 이야기를 만들지는 말아야겠다. 그러기 위해서는 얼굴에 철판을 깔고 사실 그대로 기록하는 수밖에 없다.

 

사건이 터진 그날은 눈이 귀했던 겨울이 거의 지나갈 무렵이었다. 쌀쌀한 바람을 등으로 막으며 나는 오랜만에 약간은 흥분된 마음으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늦은 나이지만 새로운 만남에 대한 호기심, 그리고 그녀가 어쩌다 재수 좋으면 나의 사랑스런 아내가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은 버스를 달팽이보다도 더 느리게 만들었다.

 

맞선을 안본 것은 아니었다. 실망도 했고 채이기도 했다. 이런 날 하필이면 안경 낀 여자가 떠올랐다. 애써 지우려고 머리를 흔들었지만, 그녀는 잔치 날 찾아오는 거지처럼 끈덕지게 찾아와 나의 경사를 방해했다. 한때 내가 미쳐 따라다닌 그녀는 나에게 평생 남을 상처를 주었으니, 물론 거지같은 여자는 아니었다. 지성을 갖춘 야생마라고나 할까. 그녀로 인해 나는 여자가 얼른 빈 자루에 주워 담으면 되는 떡이나 오기로 기어오를 수 있는 산이 아니라는 것을 배웠다. 분위기도 잡고, 아양도 떨고, 자신감도 보이고, 진심을 말하기도 하고, 때론 거짓말도 하고, 울렸다가 울리기도 하고 이제 나는 그녀에게 자신이 있었지만, 이미 그녀는 남의 아내가 되어 있었다. 나는 아직도 이따금 바보 같았던 나의 실수 때문에 발을 동동 구르거나 머리를 벽에 박기도 한다.

 

이윽고 버스가 왔다. 애써 그녀를 떨쳐버리고 버스에 올랐다. 뒤 자석의 젊은 여자 곁의 자리가 비워있었다. 여자는 노란 잠바 차림으로 깔끔히 앉아 무엇인가 깊이 생각하는 듯 차창 밖을 쳐다보고 있었다. 스물 서너 살 쯤 될까. 콧등이 오뚝하고 눈썹이 잔잔히 흘렀다. 결코 싫지 않은 자리였지만 그날의 사정은 달랐다. 나를 뻔히 잘 아는 친구의 중매라 도중에 한 눈을 파는 것은 예의가 아닌 것 같았다. 가끔 세상일은 질서가 뒤죽박죽 한다. 차곡차곡 좋은 일이 찾아오면 좋으련만 좋은 일도 슬픈 일도 한꺼번에 찾아와 사람을 정신 못 차리게 한다. 오늘 만남이 역시나 여서 실망하여 돌아오는 버스에서 이 여자를 만났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시하였을 것이다. 지금까지 연마한 연애의 정석을 가지고 담대하게 시도한다면 그녀는 즐거운 호감으로 다음의 만남을 약속하리라. 그것은 당연할 것이다. 곧 봄이 오고 화사하게 꽃피는 금강가를 낭만 많은 여자라면 그 누구와도 걷고 싶어 할 것이니까.

 

그러나 나는 한 시간 후면 만나게 될 여자를 생각해보았다. 믿을만한 친구가 소개하니까 분명히 A+일 것이다. 그녀는 우선 예쁘리라. 약간의 수줍음도 곁들었을 것이다. 이마에서 솟아나는 지혜와 일본여자처럼 복종적인 태도는 좋은 집안의 전통을 말해주는 것이겠다. 물론 이따금 고집도 피우고 법석도 떨겠지. 그러나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신선한 생명의 힘이 아닐까. 초롱한 눈망울을 굴리며 호기심어린 투정이라면 싫을 리 없다. 값진 자식을 둘 수 있는 상서로운 징조다. 어떤 때는 낭만에 젖어 술집에 가서 맥주잔을 권한다면 그야 그녀가 술값까지 낸다면 얼마나 근사한 일이랴.

 

그런 여자를 얻기 위해서는 성실한 인내와 신사다운 매너 그리고 올바른 지혜가 필요하다. 그런데 사실 그것보다도 외모와 신의 은총이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곧 나의 자신 없는 외모가 떠올랐다. 얼굴은 그런대로 밉상은 아니지만 문제는 키였다. 여자는 보통 자기보다 15cm 큰 남자를 좋아한다는데 나는 한국의 평균 키보다도 작았다. 나의 꿈은 혼선이 왔다.

 

그때 버스 안에 있는 현실 공간의 여자가 난처해했다. 나는 곧 그것이 꼬불꼬불한 길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에게 흔하게 나타나는 차멀미임을 알아차렸다. 나는 한 겨울 내내 무겁게 닫혀있던 차창을 힘들여 열고, 차장 아가씨를 불러 위생봉투를 부탁했다. 그녀는 생기가 돌며 공손히 고마워했다. 긴 흰 목이 고와보였다. 몸이 약한 나는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가 차멀미를 감소시킨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중대사를 앞에 놓고 치밀하게 작전을 짜야 할 시간이 아닌가. 눈을 돌렸지만 자꾸만 불편해 하는 여자의 표정이 나를 난감하게 했다. 그래 좋다. 약간의 입놀림은 결전 전에 워밍업으로도 좋을 것이다.

 

올겨울은 눈이 부족했다는 날씨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녀가 어디를 가느냐고 하는 뻔하고 시시한 것은 묻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가는 떨리는 나의 출정식을 그런 일상적인 대화로 시작하고 싶지 않았다. 소나무 위에 앉은 계곡의 눈과 그 위에 빗살 치는 석양빛 그리고 차갑고 두터운 지각 속에서 존재하고자 하는 존재자의 언어는, 한 겨울을 사랑해서 홀로 외롭게 들판을 걷지 않는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는다. 나는 신비와 외로움에 관해 말했다. 그녀는 광야의 산맥을 스쳐 가슴 속에 고이는 시베리아 바람 소리도 음악처럼 들어야 한다고 말을 받았다. 커다란 바람 속에 있으면 찾아가야 할 길만 보일 뿐 일상의 잡담과 유혹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 나는 속으로 움찍 놀랐다. 그러나 젊은 날은 누구나 시인인 것이다. 단지 입으로 만 아름다움을 지껄이는 것은 장삼이사도 할 수 있다.

 

길이 곧아졌다. 버스는 다리를 지나 빨리 달렸다. 우리의 말도 빨라졌다. 그런데 말할수록 그녀는 아름다움과 영원한 것을 좇는 수녀 같았다. 목적지에 가까워올수록 나는 초조해졌다. 나는 보잘 것 없는 지위에, 형편없는 가난에, 마음까지 좁아터진, 키 작은 남자였다. 그녀는 이미 속속들이 나를 알고 있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녀와 더 이야기 하고 싶어졌다. 오늘과 내일, 가능하다면 죽는 날까지.

 

이제 새롭게 꾸밀 수도 없다. 나의 부주의를 탓해보아야 아무 소용이 없다. 맘에 드는 여자를 만나면 사용하려고 외웠던 명구들, 음악과 영화 이야기, 적절한 집안 자랑과 외국 여행담 이런 소재들을 하나도 소비하지 못하고 이 여자를 곱게 보내야 한단 말인가. 맞선보러 가는 것까지 아는 그녀에게 후일을 약속하기란 여간 먹먹한 일이 아니었다. 입에서 맴도는 것을 참고 나는 천만근의 발길을 돌렸다. 억지로 한 가닥의 새로운 희망을 가지려고 애썼지만 힘이 빠졌다. 목욕탕 앞을 지났다. 사람은 다 때가 있는 것이다.

 

약속 장소에 들어갔다. 친구가 먼저 나와 웃고 있었다. 옆에서 엉뚱한 여자가 같이 웃고 있었다. 징그러웠다. 도망가고 싶었다. 그런데 다행히 선 볼 여자는 아니었다. 아직 맞선 볼 여자는 나오지 않았다고 친구는 저으기 나를 안심시켰다. 친구는 그녀를 그냥 만나자고 했다고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워낙 까다로워 나오지 않을 여자라서.

 

그 때 한 여자가 동쪽 문으로 들어왔다. 엉뚱한 여자가 소리쳤다. 나도 소리쳤다. 버스 속 여자였다. 그러나 난 며칠 밤 며칟날을 공들여 준비해간 그 자신만만한 작전을 쓸 수 없었다. 기뻤지만 맥이 풀렸다. 여자도 놀란 듯 얼굴에 홍조를 띄고 옆에 와 앉더니 다소곳이 웃었다. 나는 적이 안심이 되었다.

 

남자들은 버스와 여자는 기다리면 온다고 말한다. 기다렸더니 버스가 왔다. 그리고 사랑스런 아내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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