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7. 폴 테일러)
환경에 대한 윤리는 크게 세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인간중심주의(anthropocentrism)이다. 이것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의무와 책임을 설명하기 위해, 별다른 생태윤리학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입장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권리와 의무는 전통적인 인간중심적 윤리설에 의해서도 만족스럽게 설명될 수 있다고 본다. 또한 우주에서 차지하는 지위에 있어서 인간은 다른 존재들보다 우위에 있다. 오직 인간의 이익이나 행복과 불행만을 도덕적인 고려의 대상으로 삼아야 한다. 다른 종이나 개체는 도덕적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인간적 특성만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 다른 종이나 개체를 고려하는 이유는 그 종이나 개체가 인간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 도구적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인간 이외의 존재나 환경에 대해 인간이 책임을 진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간접적인 것이다. 자연보호란 인간이라는 종의 보존을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 자연환경이 파괴되면 인간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에 궁극적으로는 인간을 위해서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생태중심주의(자연중심주의, 탈인간중심주의, ecocentrism, non-anthropocentrism)이다. 이것은 자연을 보호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종의 이기주의를 지키는 수단으로 생각돼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자연은 인간의 이익을 벗어나 그 자체로 보호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인간은 다른 종보다 우월한 것이 아니고 단지 생태계 전체의 한 부분을 구성할 뿐이다. 모든 생명체들은 그 고유한 가치를 지닌다.
이 두 입장의 중간에 생명중심주의(biocentrism)가 있다. 이것은 전통적인 윤리이론들을 개조하고 수정해서, 생태학적인 가치들과 의무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새로운 규범윤리를 발전시키자는 입장이다. 생명중심주의는 인간중심주의 윤리적 폐쇄성을 탈피하여 모든 생물들에게 윤리 공동체의 문호를 개방하고, 그들을 도덕적으로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또한 지구와 인간의 생명 유지 시스템의 파괴를 막기 위해서는 새로운 생명중심주의 윤리를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강조한다. 인간 이외의 생명체들은 인간을 위한 단순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동등한 내재적 가치를 지닌다. 이런 생명중심주의 윤리를 체계화 한 철학자가 폴 테일러(Paul Taylor)이다. 그의 저서로는『Respect for Nature』가 있다.
테일러는 슈바이처의 생명경외 사상을 이론적으로 체계화한다. 슈바이처는 강조한다. “인간은 도와줄 수 있는 모든 생명을 도와주라는 명령에 따르고, 살아 있는 것은 어떤 것이건 해치지 않을 때에만 진정으로 윤리적이 된다. 그는 이 생명, 저 생명이 귀중한 존재로서 우리의 동정심을 얼마나 받을 만한가를 묻지 않는다. (---) 생명은 그 자체로서 그에게 신성한 것이다.” 슈바이처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인간도 다른 생명체처럼 살려고 애쓰는 하나의 생명체일 뿐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윤리란 바로 여기서 출발한다. 그러면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하는가? 더 크게는 인간은 왜 자연을 존중해야 하는가?
이런 질문에 대한 테일러의 철학적 논변은 다섯 단계를 걸쳐 이루어진다.
(1) 어떤 존재는 자기 고유한 선(善)을 가지고 있는 반면에, 다른 어떤 존재는 자기 고유한 선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예를 들어 아이는 자기 고유의 선을 갖는다. 왜냐하면 선이 증진된다면 아이는 이득을 얻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생물인 모래더미는 그렇지 않다. 아이처럼 생명체의 목적은 성장, 발전, 생존, 번식이다. 생명은 이러한 목적을 향해 나간다는 의미에서 목표 지향적이다. 각각의 생명체는 이러한 목표 지향적 활동의 중심(목적론적 삶의 중심, teleological –center-of-life)이다. 그런 의미에서 ‘생명체가 자기 고유의 선을 갖는다’고 말하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런데 이런 주장(판단, 명제)은 사실에 관한 기술적(記述的, descriptive) 주장이다. 이런 주장에서 곧바로 도덕에 관한 규범적 주장이 도출되지는 않는다. 즉 생명체들이 그들 자신의 선을 가진다고 해서, 우리가 그 생명체들을 소중히 여기고 존중해야 한다는 결론이 도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사실(is)과 가치(규범, ought) 사이에는 건너갈 수 없는 간극(gap)이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영국 철학자 데이비드 흄은 ‘is-ought gap’이라고 불렀다. 예를 들어 우리는 ‘담배를 피우면 폐가 손상된다’(사실판단)라는 전제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나쁘다’(가치판단)라는 결론을 추론할 수 없다. 이렇게 추론하면 ‘자연론적 오류(naturalistic fallacy)’에 빠진다고 영국의 분석윤리학자 무어(G. E. Moore)는 지적한다. 가치를 자연적인 속성으로 환원하기 때문이다. ‘이 사과가 좋다’라고 할 때의 ‘좋음’이라는 성질은, ‘이 사과가 노랗다’라고 할 때의 ‘노랑’이라는 자연적인 성질하고는 전혀 다른 성질이다. 이것을 혼동할 때 자연론적 오류에 빠진다. 테일러는 자신이 주장하는 생명중심적 관점을 받아들이면 이 간극을 메꿀 수 있다고 주장한다.
(2) 테일러의 생명중심적 관점(the biocentric outlook on nature)을 받아들인다. 생명중심적 관점은 4가지 핵심 신념으로 구성된다. (가)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똑같은 이유에서 지구의 생명공동체의 구성원이다. (나)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종은 상호의존 체계의 일부이다. (다) 모든 생명체는 자기 고유의 방식으로 자기 고유의 선을 추구한다.(목적론적 삶의 중심이다) (라) 인간이 다른 생명체보다 내재적으로 더 우월한 것은 아니다. 테일러는 이런 생명중심적 관점은, 합리적인 과학적 근거에 확고하게 기초한 관점이라고 주장한다.
(3) 테일러의 생명중심적 관점을 채택하게 되면, 모든 생명체의 내재적 가치를 인정하는 것이 그러한 관점과 일관된, 생명에 대한 유일한 관점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런데 ‘어떤 존재가 내재적(inherent) 가치를 가진다’는 것은 규범적(가치적) 주장이다. 이 주장이 성립되면 자연스럽게 (4)와 (5)의 주장이 추론된다.
(4) 어떤 존재가 내재적 가치를 가진다면 그런 존재를 우리는 존중해야 한다. 이 말은 바로 우리가 자연존중을 궁극적인 도덕적 태도로 채택하는 것을 의미한다
(5) 그러면 인간은 자연환경에 대해 도덕적으로 책임 있는 방식으로 행위해야 한다.
이런 다소 현학적이고 복잡한 논리를 통해 테일러는 인간이 왜 자연을 존중해야 하는지를 증거한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우리는 어떻게 자연을 존중해야 할까? 테일러는 자연존중의 태도에서 4가지 의무가 나온다고 정리한다.
(1) 불침해(nonmaleficence)의 의무: 다른 생명체에 해를 가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소극적 의무이다. 인간은 자기가 야기하지도 않은 해를 방지할 적극적인 의무는 없다. 또한 다른 생명체가 자기의 선을 달성하는 것을 도와줄 의무도 또한 그들의 고통을 덜어줄 의무도 없다.
(2) 불간섭(noninterference)의 의무: 이것도 소극적 의무이다. 인간은 개별 유기체의 자유를 간섭해서는 안 되고, 생태계나 생명공동체에 간섭해서도 안 된다. 또한 유기체가 자기의 선을 추구하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되며, 그들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데 필수품을 얻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된다.
(3) 성실(fidelity)의 의무: 이것은 야생동물에게만 적용된다. 인간은 인간보다 지능이 낮은 야생동물을 속이거나 기만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냥, 낚시, 덫은 안 된다.
(4) 보상적 정의(restitutive justice)의 의무 :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해를 끼쳤을 경우 마땅히 피해를 보상해주어야 한다. 이 4가지 의무 중에서 불침해의 의무가 가장 근본적이다. 그리고 불간섭의 의무보다는 성실의 의무, 성실의 의무보다는 보상적 정의의 의무가 우선적이다.
테일러는 또한 인간과 다른 생명체들의 윤리적 권리주장이 상충할 경우 이것을 해소해주는 우선권의 원리가 있다고 말한다.
(1) 자기 방어(self-defense)의 원리: 도덕적 행위자들의 존재를 유지하고, 그들이 도덕적 행위능력을 행사하도록 하는데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행위는 허용된다. 이것은 인간의 정당방위와 비슷하다.
(2) 비례(proportionality)의 원리: 인간의 기본적이지 않은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들이 야생의 동물들과 식물들의 기본적인 이익을 공격할 때, 그 행동들은 금지되며, 또한 자연존중의 태도와 모순된다.
(3) 최소해악(minimum wrong)의 원리: 만약에 인간들의 어떤 기본적이지 않은 이익을 추구하는 행동들이 자연존중의 태도와 모순되지 않고, 또한 그러한 인간들의 기본적이지 않은 이익을 추구하는 어떤 다른 방법도 더 적은 해악을 포함하지 않는다면, 심지어 그 행동들이 야생의 동물들과 식물들의 기본적인 이익을 공격할 때에도 허용될 수 있다.
(4) 분배적 정의(distributive justice)의 원리: 이득과 부담은 관련 당사자들 간에 공평하게 분배되어야 한다.
(5) 보상적 정의(restitutive justice)의 원리: 최소해악의 원리를 따르게 될 때마다 혹은 분배적 정의의 원리를 불완전하게 따르게 될 때마다, 만약 우리의 행위가 자연존중의 태도와 완전하게 모순이 없으려면 어떤 형식의 배상이나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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