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를 찾아서5

이효범 2023. 3. 10. 07:28

o 헨리 데이빗 소로를 찾아서 5

 

구녕 이효범

 

1854년에 월든이 출판되었으니 약 170년 전의 일이다. 이때는 지금처럼 오염이나 환경문제가 제기되는 시대가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소로가 비록 체계적이고 성숙한 이론은 아니지만, 생태학적 사고를 전개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그는 우선 우리가 사는 지구를 단순히 죽은 물질로 보지 않았다. “지구는 책장처럼 차곡차곡 층층으로 쌓여, 주로 지질학자와 고고학자들의 연구 대상이나 되는 단순한 죽은 역사의 조각이 아니다. 그것을 살아있는 시이며, 꽃과 열매에 앞서 피어나는 나무의 잎 같은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모른 채 지구를 함부로 파괴한다. 그래서 소로는 1858년에 이미 야생보호지역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곰과 표범, 그리고 사냥꾼들이 존재하고, 문명화되지 않은 야생보호지역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곳의 숲은 게으른 스포츠나 음식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영감과 참된 레크레이션을 위해 존재해야만 한다.”

 

야생지는 영감의 근원이다. 봄날 아침 그곳에 서면 인간의 모든 죄는 용서를 받는다. 그런 날은 모든 악덕에 대한 일시 휴전의 날이다. 그러한 태양이 내리비치는 동안은 가장 사악한 죄인도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순수함을 되찾는다면 우리 이웃 안에서도 순수함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소로가 그리는 자연은 천국이다. “나는 먼저 1피트 깊이의 눈을 치운 다음 다시 1피트 두께의 얼음을 깨서 발아래 호수의 창문을 연다. 그러고는 무릎을 꿇고 물을 마시며 물고기들의 조용한 거실을 내려다본다. 호수 속은 마치 불투명한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것 같은 부드러운 광선이 사방에 퍼져 있으며, 바닥에는 여름이나 마찬가지로 밝은 모래가 깔려 있다. 호박색의 저녁노을이 질 때와 같은 영원한 물결 없는 고요가 이곳을 다스리고 있다. 그 고요는 이곳에 사는 거주자들의 침착하고 평온한 기질에도 상응하는 것이리라. 천국은 머리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발밑에도 있다.”

 

그래서 소로는 요구한다. “어찌하여 교도소장은 감옥의 문을 열어놓지 않으며, 판사는 그가 맡은 사건을 기각하지 않으며, 목사는 그의 회중을 집으로 돌려보내지 않는가? 그것은, 이들이 신이 내리는 계시를 듣지 않고, 그가 만인에게 아낌없이 베푸는 용서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이다.” 소로는 자연의 배후에 더 큰 존재가 있다고 믿는다. 우리는 그의 소리를 경청해야 한다. “내가 지금 서 있는 숲에는 땅 위에 깔린 솔잎들 사이로 벌레 한 마리가 기어가면서 나의 시야에서 숨으려 하고 있다. 나는 왜 이 벌레가 그처럼 좁은 소견을 품고서 어쩌면 자기의 은인이 될 수도 있고 벌레의 족속에게 좋은 소식을 가져다줄지도 모르는 나로부터 자신의 머리를 감추려드는가 하고 나 스스로에게 물어본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나라는 인간 벌레 위에 서 있는 더 큰 은인’, 더 큰 지성을 가진 어떤 존재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소로는 자연 파괴의 주범을, 자연을 재산획득의 수단으로만 보는 욕심에 있다고 생각한다. 월든 호수로부터 1마일 정도 떨어진 곳에 월든 보다 훨씬 큰 플린트(Flint)’ 호수가 있다. 이 호수 이름은 이 호수의 주인인 프린트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그런데 소로는 흥분한다. “이 농부는 한 번이라도 참다운 눈으로 이 호수를 본 적이 없으며, 호수에서 멱을 감은 일도 없고, 호수를 사랑하거나 보호한 일도 없다. 또한 호수를 칭찬하는 말 한 마디 한 적이 없으며, 하느님이 이 호수를 만들어놓은 데에 대하여 감사한 적도 없다.” 그런데 그런 이름을 붙이다니 그 권리를 도저히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로는 모든 것을 금전적 가치로만 계산하는 프린트의 노동을 경멸한다. “그는 단 몇 푼이라도 받을 수만 있다면 경치라도, 아니 그가 믿는 하느님이라도 시장에 가지고 나가 팔려고 한다.” 소로는 더 나아가 국가에서 권장하는 소위 모범농장이라는 것이 다 이 모양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소로는 통나무집을 직접 짓고 자급자족했다. 그러나 이런 개인적인 자급자족은 현대 문명사회에서는 불가능하다. 지금은 지속 가능한 생태적인 농업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또 중요한 것은 소로가 자발적으로 가난을 선택했다는 사실이다. “당신이 가난하기 때문에 활동 범위에 제한을 받더라도, 예를 들어 책이나 신문을 살 수 없는 형편이 되더라도, 당신은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경험만을 갖도록 제한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은 가장 많은 당분과 가장 많은 전분을 내는 재료만을 다루도록 강요를 받게 된 것이다. 뼈 가까이에 있는 살이 맛있듯이 뼈 가까이의 검소한 생활도 멋진 것이다. 당신은 인생을 빈둥거리며 보내지 않도록 보호받게 된 것이다. 어떤 사람도 높은 수준의 정신생활을 하는 것으로 인해 낮은 차원에서 손해를 보지 않는다. 남아돌아가는 부는 쓸모없는 것들밖에 살 수 없다. 영혼에게 필요한 단 한 가지의 필수품을 사는 데는 돈이 필요 없다.” 소로가 권하는 삶은 물론 실천하기 어려운 삶이다. 아마 소로의 고백처럼 나는 내 자신의 본연의 자세에 돌아와서야 마음이 편한 사람이다. 나는 남의 눈에 잘 띄는 곳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화려하게 과시하며 돌아다니기보다는, 가능하다면 우주를 창조한 분과 함께 거닐어보고 싶은사람만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