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퇴계 이황을 찾아서1

이효범 2023. 3. 18. 07:56

(9) 퇴계 이황을 찾아서 1

 

구녕 이효범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은 조선조의 거유(巨儒)이다. 그는 이식(李埴)71녀 중 막내로, 현재 경상북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에서 태어났다. 탄생 7개월 후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21세에 허씨 부인과 결혼하여 23세에 첫째 아들 이준(李寯)을 낳고, 27세에 둘째 아들 이채(李寀)를 낳았으나, 한 달 후에 부인이 세상을 떠났다. 30세에 둘째 부인 권씨와 혼인하였다. 둘째 부인은 퇴계가 46세 때 아이를 낳다가 죽었다. 31세에는 셋째 아들 이적(李寂)을 서자로 낳았다. 퇴계는 첫째 부인이 죽은 직후 첩실을 들였는데, 그녀는 퇴계 집안의 안살림을 충실히 보살폈고, 또한 권씨 부인과 퇴계가 혼인한 후에도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안살림을 보살폈다. 그래서 퇴계는 첩실이 사망한 후 서자인 이적을 호적에 올렸고, 족보에는 적서의 구별을 두지 못하게 금지하였다. 50세에는 둘째 아들이 24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세상을 떠났다.

 

퇴계는 5대의 임금을 거쳤다. 연산군 시대가 1506(5)까지, 중종시대가 1544(43)까지, 인종은 1545(44) 1년간, 명종시대가 1567(66)까지, 선조시대가 3년간(69)이었다. 이 시기는 몸서리나는 참상의 시대였다. 4번의 큰 사화(士禍)가 일어나 선비들이 낙엽처럼 죽어나갔다. 김종직의 사초 문제가 발단이 되어 많은 유학자가 희생된 무오사화(戊午史禍, 1498)는 퇴계가 출생하기 3년 전에 발생했다. 퇴계 나이 4세 때에는, 연산군의 생모인 윤씨가 궁중에서 밀려나 사약을 내려 죽게 한 일이 발각되어 갑자사화(甲子士禍, 1504)가 일어났다. 나이 19, 퇴계가 한창 성리학을 공부하고 있을 때는, 조광조 등 신진사류가 중종에 의해 숙청되는 기묘사화(己卯士禍, 1519)가 발생했다. 45세 때에는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 간의 갈등인 을사사화(乙巳士禍, 1545)가 일어났다. 퇴계의 형도 이 사화에 연루되어 매를 맞고 평북으로 귀양가는 도중 장독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퇴계 자신도 인종 때에 제수받았던 전한(典翰)의 자리에서 파직되었다가 후에 복직되었다.

 

퇴계는 12세에 숙부 이우(李堣)로부터 논어를 배우며 본격적인 학문의 길에 들어섰다. 19세에 주희의 성리대전을 독파하고는 어쩐지 마음이 기쁘고 눈이 열리는 듯 하여, 읽고 생각하기를 오래 하니, 점점 그 의미를 알게 되어서 비로소 학문에 들어가는 길을 얻은 듯 하였다.”라는 말을 했다, 20세에 주역에 몰두하다가 몸을 망가뜨려 평생 동안 건강이 좋지 않은 다병한 사람이 되었다. 그래서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나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었으나, 나에게는 학문의 뜻을 깨우쳐 줄만한 스승이나 벗이 없어서, 10년 동안이나 공부에 착수하고도 들어갈 길을 몰라 헛되게 생각만 하고 갈팡질팡하였다. 때로는 눕지도 않고 고요히 앉아서 밤을 새운 적도 있었는데, 드디어는 심병(心病)을 얻게 되어 여러 해 동안 학문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만약 참된 스승이나 벗을 만나, 아득한 학문의 길을 지시받았다면, 어찌 구태여 심력(心力)을 헛되이 써서 늙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얻은 바가 없기에 이르겠는가.” 평생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던 퇴계는 자신의 학문에 임하는 태도를 강조한다. “내 비록 늙기까지 학문에 아는 것이 없지마는, 다만 젊어서부터 성현의 말씀을 독실히 믿어, 험담과 칭찬(훼예 毁譽)이나 영욕에 구애되지 않았고, 또한 별다른 행동을 표방하여, 남에게 해괴히 여겨지지도 않았다. 만일 학자가 되어 훼예나 영욕을 두려워한다면 자립할 수가 없을 것이요, 또 안으로 공부한 것은 없이 별다른 표방을 내세워 남에게 해괴히 여겨진다면, 역시 제 몸을 보전할 수 없을 것이다. 요컨대, 학자는 모름지기 단단하게 굳세어야 비로소 그 위치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퇴계는 27세인 1527년 경상도 향시에서 진사시와 생원시 초시에 합격하고, 어머니의 소원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 성균관에 들어가, 다음 해에 진사 회시에 급제하였다. 그리고 34세인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승문원부정자가 되면서 관계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다. 1537년 어머니 상을 당하자 향리에서 3년간 복상했고, 1539년 홍문관수찬이 되었다가 곧 임금으로부터 사가독서(賜暇讀書)의 은택을 입었다. 퇴계는 점차로 벼슬이 높아졌지만 그는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기회가 되기만 하면 고향에 내려가 학문을 연구하였다. 그가 을사사화 전 43세 때 남명 조식에게 보낸 편지에는 이런 심정이 잘 나타나 있다. 일찍부터 고도(古道)를 사모해 왔으나, 집이 가난하고 노친을 봉양할 길이 없는 데다가, 친구들의 권유에 따라 과거에 응시하는 잘못을 저질렀고, 이제 관직 생활이 분망할 뿐만 아니라 몸이 허약해서 견디기 어려워, 길을 고쳐서 산으로 돌아가 독서를 즐기며 성현의 도를 찾고 싶다고 호소하고 있다. 그는 높은 벼슬이 주어질 때마다, 병약한 몸으로 막중한 조정의 큰일을 감당할 건강을 갖고 있지 않고, 또 자신은 그 일을 처리해 나갈 능력이 없다는 명분으로 늘 사양하곤 했다.

 

퇴계는 1569(선조2)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드디어 완전히 고향으로 돌아갔다. 환고향(還故鄕) 후 학구에 전심하였으나, 다음 해 11월 종가의 시제 때 무리를 해서 우환이 악화되었다. 118일 아침, 평소에 사랑하던 매화분에 물을 주게 하고, 침상을 정돈시킨 후, 일으켜 달라고 해서 단정히 앉은 자세로 죽음을 맞이하였다. 선조는 3일간 정사를 폐하여 애도하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 겸 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 영사를 추증하였다. 장사는 영의정의 예에 의하여 집행되었으나, 산소에는 퇴계의 유언에 따라 조그만 자연석에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 도산에 물러나 만년을 숨어 산 진성 이씨 묘)’라 새긴 묘비만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