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헨리 데이빗 소로를 찾아서3

이효범 2023. 3. 8. 08:03

(8) 헨리 데이빗 소로를 찾아서 3

 

구녕 이효범

 

소로는 에머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는 1841년부터 1843년까지 에머슨의 집에서 살기도 했고, 월든 호숫가에 지은 통나무집도 에머슨의 소유지였다. 그가 통나무집에 살던 어느 날 구두 수선을 위해 마을에 들렀다가 감옥에 수감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소로는 6년 전부터 인두세 납부를 거부해오고 있었다. 그것은 미국 정부가 흑인 노예제도를 계속 용납하는 데다, 영토확장을 위해 멕시코와 전쟁까지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멕시코 전쟁(1846~1848)은 미국이 텍사스를 병합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었다. 텍사스를 위시하여 미국과 접경한 멕시코 영토 안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멕시코 관리들과 분쟁이 발생했다. 그런데 텍사스가 혁명을 일으켜서 독립을 선언한 뒤 미국과 협의하여 미국과 병합했다. 열렬한 영토확장론자인 당시의 미국 대통령 폴크(J.K. Polk)는 목화재배 확대를 바라는 대농장주들과 노골적인 제국주의자들의 요구에 따라, 멕시코 정부에 영토 매수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다. 그는 멕시코 측에서 자기 영토라고 주장하는 뉴시시 강 이남에 정찰병을 파병했다. 그가 멕시코 병사에게 살해됨으로써 전쟁은 시작되었고, 결국 미국 의회는 1846511일 멕시코에 대하여 전쟁을 선포했다. 노예 문제를 둘러싼 대립격화를 두려워한 대서양 연안의 각 주는 이 전쟁에 반대했다. 미국이 이 전쟁에 이긴 결과 미국은 오늘날의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3주 전체와 뉴멕시코, 애리조나 주의 대부분, 콜로라도 주의 절반 이상과 와이오밍 주의 남부지역, 캔자스와 오클라호마, 텍사스 주의 일부에 달하는 거대한 영토를 겨우 1,500만 달러에 강제로 매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전쟁은 현재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미국의 제국주의적 전쟁임이 틀림없다. 소로의 말대로 민중은 당초부터 원치 않았던 전쟁이었다. 당시 하원 의원이었던 링컨도 하지 않아도 될, 또 헌법에 어긋난 전쟁이었다.

 

소로는 단 하루의 수감(친척 한 사람이 소로 몰래 인두세를 대납했기 때문에 풀려남)된 경험을 기초로 하여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을 썼다. 여기서 그는 정부의 부당한 처사에 대하여 시민은 불복종할 권리가 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의무로 여겨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일 적게 다스리는 정부가 제일 훌륭한 정부라는 토머스 제퍼슨의 이상에 따라, 그의 책의 첫 문장을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현을 진심으로 받아들인다.”라고 시작하고 있다.

 

소로에 의하면 불의의 법들이 존재한다. 노예제도와 멕시코에 대한 전쟁이 이에 해당한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 소로는 3가지 경우가 있다고 한다. “우리는 그 법을 준수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인가, 아니면 그 법을 개정하려고 노력하면서 개정에 성공할 때까지는 그 법을 준수할 것인가, 아니면 당장이라도 그 법을 어길 것인가?” 소로는 악법을 지켜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주장한다.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기라. 당신의 생명으로 하여금 그 기계를 멈추는 역마찰이 되도록 하라. 내가 해야 할 일은, 내가 극력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어쨌든 간에 없도록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나 소수가 저항한다고 악법이 고쳐질 수 있을까? 젊은 소로는 확신에 차서 외친다. “나는 이것만을 알고 있다. , 이 매사추세츠주 안에서 천 사람이, 아니 백 사람이, 아니 내가 이름을 댈 수 있는 열 사람(열 사람의 정직한 사람), 아니 단 한 명의 정직한 사람이라도 노예 소유하기를 그만두고, 실지로 노예제도의 방조자의 입장에서 물러나며, 그 때문에 형무소에 갖힌다면, 미국에서 노예제도가 폐지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진보된 정부를 꿈꾼다. “국가가 개인을 보다 커다란 독립된 힘으로 보고, 국가의 권력과 권위는 이러한 개인의 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이에 알맞은 대접을 해줄 때까지는, 진정으로 자유롭고 개화된 국가는 나올 수 없다.”

 

소로는 시민 불복종을 부르짖었지만 혁명가는 되지 않았다. 혁명적 사상을 실천함에 있어서 폭력의 행사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이런 비폭력 저항 운동은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톨스토이, 간디, 영국의 노동운동가들, 나치 점령하의 레지스탕스 대원들, 마틴 루터 킹 같은 인권운동가들이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간디는 말한다. “나는 소로에게서 한 분의 스승을 발견했으며, 시민의 불복종으로부터 내가 추진하는 운동의 이름을 땄다.”

 

정의론을 쓴 현대 미국 철학자 존 롤즈도 소로처럼 어떤 경우에는 시민 불복종이 정당하다고 인정한다. 그는 평등한 자유의 원칙, 차등의 원칙, 기회균등의 원칙 등 정의의 원칙에 따라 구성원의 인권을 보장하는 사회구조와 체제는 갖추어졌지만, 부정의한 법이나 제도가 존재하는 현실 사회를 거의 정의로운 사회라고 불렀다. 이런 사회에서 사회체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부정의한 법이나 정책, 제도가 발생한다면 시민 불복종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시민 불복종이 정당화되기 위해서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평등한 자유의 원칙과 공정한 기회균등의 원칙을 위반했을 경우에만 시민 불복종이 가능하다. 또한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이 아니라 다수의 공유된 정의감에 따라, 법에 대한 충성심의 한계 내에서 이루어졌을 때에만, 시민 불복종은 정당화될 수 있다. 롤즈는 선거, 국민청원, 공청회 등의 제도권 내에서 모든 방법을 사용하여 해결하려고 노력했음에도 되지 않았을 때, 최후의 수단으로써 시민 불복종이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시민 불복종은 사회 전체를 위한 위법행위이므로 공개적이고 비폭력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로 인한 처벌까지도 감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