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나이 70에 부르는 인생 노래(10, 당근을 썰다)
o 당근을 썰다
구녕 이효범
선지자는 고향에서 대접을 받지 못한다.
아내는 내가 한국의 대철학자임을 아직도 모른다.
짙게 화장을 하고 동창회에 나가면서
오늘도 어김없이 잠옷차림의 내게 명령을 내린다.
“당근을 썰어 놓으세요.”
처음에 양보하는 게 아니었다.
청소하고 빨래만 하면 다 되는 줄 알았다.
설거지를 할 때만 해도 아내는 가끔 고마움을 표시했다.
이제는 자기 혼자 밥 먹고도 빈 그릇을 던져 놓는다.
“존경하옵는 한석봉님이시여,
당신은 글씨를 쓰고
나는 당신의 어머니처럼 생활을 썰고 있습니다.
당신의 어머니는 눈을 감고도 떡을 똑바로 썰었지요.
나는 눈을 뜨고도 그럴 자신이 없습니다.
사실 나는 당근이나 썰 위인은 아닙니다.
당신의 감탄스런 문체에 담을
영혼을 울리는 글을 쓰려고 불철주야 고뇌하는 철학자입니다.
당신은 어머니를 잘 만나 명필이 되었습니다.
나는 아내를 잘 만나 누추한 부엌에서 당근을 썹니다.“
남자는 부엌에 들어가선 안 된다는 하늘에 계신 어머님께 죄송해도
숙제를 제대로 안 해 놓으면 저녁을 굶을 것 같아
저항도 못하면서 마지못해 울면서 당근을 썬다.
강 건너 대학자 송재일은 나보고 ‘錦賢(금강의 현자)’이라고 부르는데
일생의 반려자는 나를 강아지 다음 순서의 존재로 본다.
사랑스런 나의 아내여, 당신의 요구가 깊어질수록
남편은 한국을 넘어 세계적인 철학자가 될 수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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