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07, 기저제)

이효범 2022. 6. 7. 07:23

o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107, 기저제(祈猪祭))

 

o 기저제(祈猪祭)

 

구녕 이효범

 

삶은 돼지 머리 중심에 놓고

머리 조아려 기우제를 지낸다.

 

빈 독에 하얀 쌀이 떨어지듯

단비가 돈처럼 내린다.

 

짝 벌어진 땅이 비를 맞는다

황달 걸린 풀이 비를 마신다.

 

궁색한 때깔이 사라진 풀밭 위를

돼지 새끼 천방지축 달린다.

 

살찌지 마라라, 돼지 새끼여

부디 하늘의 일은 하늘에 맡겨라.

 

후기:

참으로 오래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밀양에서는 큰 산불이 나고, 소양강이 실개천으로 변했습니다. 땅이 쩍쩍 갈라지니 전국 여기저기에서 기우제 지낸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모든 사람들의 손에 휴대폰이 들려 있는 현대 문명사회에서 기우제라니 조금은 낯설지만, 제를 지내는 심정만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제를 지낼 때는 여러 동물이 희생 제물로 바쳐집니다. , , 돼지 등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인신까지 공양되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심청은 인당수 바다 속에 던져졌고, 아브라함은 그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번제로 드리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즈음 우리 주변에서는 주로 삶은 돼지 머리가 사용됩니다. 만 원짜리 파란 지폐를 입에 물고 있는 돼지 머리를 보면 우습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중국의 속담에 人怕出名 猪怕肥(인파출명 저파비)”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이름이 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돼지가 살이 찌면 곧 도살된다는 말입니다. 돼지는 그것도 모르고 먹이에 신나서 게걸스럽게 먹고 또 먹습니다. 제사상에 올라가 파란 지폐를 물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짓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장자의 장자를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