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죽음
하이데거는 죽음에 대한 불안에서 도피하지 않고 그것을 용기 있게 인수하는 것을 죽음에로의 선구先驅, 즉 ‘죽음에로 자각적으로 앞서 달려감’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죽음에로 선구할 때, 우리는 그 어떤 일상적인 세상의 가치로도 환원될 수 없는 독자적인 자기와 직면하게 된다. “선구적인 행위는 죽음에로 향하는 비본래적인 존재와 같이 죽음의 불가피성을 피하지 않고, 죽음에 대하여 자신을 자유스럽게 한다. 고유한 죽음에 대한 선구적인 자유화는, 우연히 밀어닥친 가능성들 속으로의 상실에서부터 자유롭게 되어서, 죽음의 불가피성 앞에 놓여 있는 사실적인 가능성들을, 처음으로 본래적인 의미에서 이해하고 선택할 수 있게 해준다. 죽음에로 향하는 선구적인 행동은 실존에게 가장 극단적인 가능성으로서 자기포기를 현시하고, 이미 어느 단계에 도달된 실존이 안고 있는 모든 경직화를 분쇄시킨다.”
이와 관련하여 하이데거는 죽음은 ‘단지 생명이 있을 뿐인 자가 세계 밖으로 떠나는’ 종료Verenden가 아니라고 이 둘을 구별한다. 따라서 죽음이 현존재에 적합하게 존재하는 것은 죽음을 향한 실존적인 존재에 있어서 뿐이다. 즉 죽음이라는 종말은 현존재가 ‘종말에 달하여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현존재가 ‘죽음(종말)에로 향하는 존재Sein zum Tode’임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현존재가 받아들이는 하나의 존재방식이다. “현존재가 존재하는 동안 그가 부단히 오히려 <아직도 ~아니다>인 것처럼, 현존재는 또한 늘 이미 그의 종말이다. 죽음과 함께 떠오르는 끝맺기는 현존재가 종말에 이르렀음이 아니고, 현존재가 종말에로 향하는 존재임을 의미한다. 죽음은 현존재가 존재하자마자, 그가 떠맡아야 하는 존재의 방식이다. 한 인간이 삶을 얻자마자, 그는 충분히 죽을만한 나이에 이르러 있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을 현존재가 그것에로 태도를 취하고 있는 어떤 것으로서, 가장 극단적인 미완 내지 하나의 절박함Bevorstand이라고 본다.
죽음은 어느 누구도 대체할 수 없는 구체적이고 유일한 존재로서의 우리 각자의 죽음이다. 우리 각자는 그 어느 누구와도 구별되는 유일한 삶의 역사를 갖는다. 죽음은 이러한 독자적인 역사를 갖는 우리 각자의 죽음이기에, 어느 누구도 우리 각자의 죽음을 대신할 수 없다. 죽음은 이렇게 철저하게 우리 각자의 죽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우리 각자에게 절대적으로 고유한 것이 비로소 드러난다. 이전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이 구현해야 할 삶의 가능성을 우리 자신에게서 찾지 않고 세상 사람이 부여한 가능성에서 찾았다. 그러나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die eigenste Mo¨glichkeit에 직면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 각자에게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은 ‘인간의 본래적인 진리이기에 가장 근원적인 진리’이다.
죽음은 또한 우리가 이제까지 집착해 왔던 모든 일상적인 가능성들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극단적인 가능성이다. 그리고 이렇게 극단적인 가능성이기 때문에 죽음은 다른 가능성들에 의해서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이다. 이렇게 극단적이고 능가될 수 없는 가능성인 죽음을 통해서, 일상적인 가능성들은 그동안 그것들에게 부여된 절대적인 의미를 상실하게 되면서,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절대적인 가능성, 즉 죽음에 의해서 허망하게 되지 않고 죽음마저도 넘어서는 영원한 가능성을 찾게 된다. 그리고 우리는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우리 각자의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그러한 영원한 가능성으로서 발견하게 된다.
또한 죽음은 가장 확실한 가능성이다. 이 세상의 많은 것들이 불확실해도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은 확실하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이 확실하다고 느끼면서도 아직 자신은 죽지 않았다고 자위한다. 그러나 죽음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처럼 먼 미래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지 침입해올 수 있다. 죽음은 삶의 매순간마다 우리 각자에게 이미 다가와 있는 가능성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죽음의 가능성을 “가장 고유하고, 모든 관계를 부정하고, 건너 뛸 수가 없는 가능성”이라고 칭한다. 그런데 이렇게 가장 확실하게 와 있는 사건으로서 죽음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을 불확실성 속에 빠트리면서, 우리가 매순간 의지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가능성을 찾게 된다. “죽음은 현존재 자신이 언제나 감수해야 하는 하나의 존재가능성이다. 죽음과 함께 현존재 자체는 자신의 가장 고유한 존재가능성 속에서 자기 앞에 서 있는 셈이다.” 죽음에로 선구하면서 우리는 우리 각자에서 발견하는 가장 고유한 가능성을, 바로 그러한 가장 확실한 가능성으로서 발견하는 것이다.
죽음 앞에서 인간은 두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 죽음을 감수하는 길과 죽음으로부터 도피하는 길이 그것이다. 오직 전자의 길만이 현존재를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양식이다. 그러나 전자의 길은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로서의, 인간의 무상감無常感을 자각하는 존재에게만 보이는 길이다. 그런 존재는 동시에 그의 존재의 깊은 근거에 있는 불안이 인간이 지울 수 없는 조건임을 깨닫고 있는 자이다. 그런데 무상감으로서의 불안을 품에 안고 죽음에로 향하는 존재는, 역설적으로 ‘죽음에로 향하는 자유Freiheit zum Tode’를 일깨워준다. “선구적인 행위는 현존재에게 세상사람 속에 함몰된 상실을 벗겨준다. 그리고 그 행위는 처음으로 이해 타산적 관점에서 타인에게 관심을 표시하는 수준에 의지하지 않고, 현존재를 자기 자신이 되는 가능성 앞에 서게 한다. 그런데 그 가능성은 세상 사람의 환상으로부터 벗어나서, 열성적이고 사실적이며, 그 가능성에 대해서 확신적이나, 스스로 무상감을 느끼는 죽음에로 향하는 자유를 가져온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에 이르는 존재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그러나 하이데거가 인간을 죽음에로 향하는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도덕주의적 의도에서 그런 것이 아니다. 이것은 존재론적 자각을 불러일으키기 위함이다. 그것은 인간은 누구나 언제나 죽는다는 막연한 유한성의 확실한 정보를 말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음으로 향하는 결단이 인간의 모든 속물적 소유주의所有主義를 이기게 한다는 것을 뜻한다. 죽음으로 향하는 결단은 영웅주의적 행동을 자아내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삶이 죽음을 통하여 존재론적 사유를 생활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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