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18. 하이데거의 인간론

이효범 2022. 4. 25. 07:25

18. 하이데거의 인간론

 

현존재는 그의 존재에 있어서 바로 이 존재 자체가 그 자신에게 문제 되고 있는 유일한 존재자이다

 

18-1. 존재

 

하이데거 철학은 존재Sein라는 하나의 주제로 수렴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그는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을 존재론이라고 부르는 것을 허상이라고 지적하면서,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은 진정한 존재론Ontologic이 아니라, 존재자성Seiendheit을 취급한 존재자의 형이상학이라고 비판한다. 고대 그리스 이래 서양의 전통 형이상학은 , 인간, 영혼, 세계, 가치, 동식물, 자연물등을 다루었다. 그런데 이것들은 하이데거에 의하면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즉 존재자들이다. 그런 존재자Seiendes의 특성이 되는 존재자성은, 존재Sein 그 자체와는 다르다. 이것을 전통 형이상학자들은 혼동했다는 것이다.

김형효는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에서, 하이데거의 이 언명은 철학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사건이며, 철학적 사유의 새로운 기원을 여는 획기적인 것이라고 말한다. 하이데거는 서양 철학사에서 오랫동안 망각한 무를 철학적 사유에 도입했다. 그동안 기독교의 주류신학에서는 무를 허무虛無(nichts)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의 창조론과 정면으로 모순된, 존재 결핍인 악의 대명사로 낙인찍었다. 하이데거는 그 무를 노자老子가 말한 텅 빈 골짜기의 무진장한 기(곡신谷神의 충기沖氣), 불교에서 말하는 허공법계虛空法界의 불생불멸한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다함이 없음Unerschöpflichkeit으로 읽었다. 철학적 사유에서 무를 존재의 결핍인 허무로 보느냐 아니면 고갈되지 않는 무한의 불생불멸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철학의 근본 방향을 결정한다. 김형효는 무를 허무로 보게 될 때는 공자처럼 무엇인가 소유所有를 긍정하고, 인간이 적극적으로 자연과 사회를 구성하는 것에 가치를 두는 반면에, 무를 무한의 불생불멸로 보는 경우는 노자저럼 인간이 인위적으로 구성하려는 노력을 무가치한 것으로 보고, 오히려 기존의 성과를 해체解體하려는 것에 의미를 둔다는 것이다. 구성철학이냐 해체철학이냐? 그런 기본 철학의 대대待對라는 거대 담론은 어찌되었든 간에, 존재자Seiendes와 존재Sein의 차이를 명확히 한 점이 하이데거 사유의 핵심임은 틀림없다.

존재자가 하이데거에서 무를 배제한 존재하는 어떤 실체를 가리킨다면, 존재는 무에서 현시된 무의 허상이다. 중국 선종의 역사를 보면, 서역에서 온 초조初祖 달마達磨의 제자인 혜가慧可는 스승에게 마음이 괴로우니 낫게 해달라고 하소연한다. 이에 스승은 괴로운 마음을 꺼내 보이면 낫게 해주겠다고 응수한다. 제자는 괴로운 자기 마음을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혜가가 그럴 수 없다고 말하자, 스승은 이제 내가 네 병을 낫게 했다고 말한다. 그 순간 혜가는 깨달았다.

마음은 각자가 어떤 존재자처럼 제시提示하거나 전시展示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은 각자가 잡을 수 있는 소유나 존재자적인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유할 수 없고 대상화할 수 없는 마음이 온갖 감정과 생각을 다 노출한다. 우리는 이 감정과 생각으로 마음의 존재를 느낀다. 마음의 바탕은 무이나 그 현상은 감정이나 생각으로 존재한다. 이것은 마치 허공을 바탕으로 해서 만물이 생멸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존재를 명사적인 실체로 보지 않고 동사적인 생기Ereignis의 사건으로 읽었다. 생각과 느낌이 잡히지 않는 마음에서 자동사적으로 솟아난 존재의 생멸 현상이듯이, 삼라만상도 잡을 수 없는 허공에서 자동사적으로 무한히 솟아난 생멸 현상이다. 하이데거는 그렇게 나타나는 생명의 도래를 본질현시Anwesen나 비은적성Unverborgenheit이라 하고, 사라지는 죽음의 퇴거를 본질퇴거Abwesen나 은적성Verborgenheit이라고 명명했다. 존재를 무의 현상화로 읽지 않으면, 그 존재는 자존적自存的인 존재자가 되어서, 결국 존재하는 어떤 실체로 생각하는, 존재자적ontisch 사고를 가진 전통적인 형이상학으로 미끄러진다는 것이다.

는 존재의 현상Phänomen에 비하면 아득한 신비Geheimnis이고, 존재의 삶에 비하면 죽음의 성궤Schrein이며, 자연스럽게 그와 같이 오는 여래如來에 비하면 자연스럽게 그와 같이 가는 여거如去이고, 존재의 현시顯示Lichtung에 비하면 존재의 은닉Verbergung이다. 말하자면 무는 존재의 바탕이고, 존재는 무의 무니인 셈이다. 동양철학의 개념으로 환원하면 바탕은 체, 무늬는 상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하이데거는 무를 허무의 무근거Ungrund가 아니라 탈근거Abgrund라고 불렀다. 존재의 바탕인 무가 탈근거인 셈이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근거와 원인의 개념 차이부터 알아야한다.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근거Grund를 긍정적으로 수용하고, 원인Ursache을 존재자적 형이상학의 핵심이라며 배척한다. 그 두 차이점은, 근거는 ‘~안에서 솟은darin’이라는 뜻이고, 원인은 ‘~에서 생긴davon’이라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존재는 무라는 근거 안에서 자동사적으로 생기한 현상이고, 존재자는 신이라는 원인에서 타동사적으로 생산된 결과와 같다. 그러면 그는 왜 무를 근거라고 말하지 않고 탈근거라고 했을까? 는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허무도 아니기에 탈근거라고 명명했다고 봐야 한다. 탈근거는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의미와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하이데거의 존재론은 인간론과 맞물려 있다. 그의 사유에서 인간과 존재는 불가분의 관계로 묘사된다. 하이데거가 인간을 부르는 현존재Dasein’라는 말은 거기에 있다’, ‘와 있다는 뜻이다. 거기에 와 있는 존재가 인간인 셈이다. 이 언명 속에는 인간과 존재와의 특별한 관계가 들어있다. 즉 인간은 존재를 지키는자이고, 존재는 인간을 부르는자라는 것이다. 그래서 시적인 어투지만, 현존재(인간)존재가 드러나는 장으로서 존재의 부름에 응하는 자이다. 인간이란 모든 존재자들의 고유한 존재가 드러나는 장이다. 돌이나 난초나 호랑이는 단지 인간 욕구 충족의 수단만이 아니다. 그것들은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래서 인간이란 모든 존재자들이 독자적인 존재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고 있다. 다른 동물들은 그렇지 못하다. 그것들은 본능의 명령에 구속되어 있으며, 다른 것들을 본능적인 욕구 충족의 수단으로 삼을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다른 모든 존재자에 대해 우위를 갖는 특별한 범례적 존재자가 된다. 다윈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은 다른 동물과 본질적으로 동일한 차원에 속하는 하나의 동물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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