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18-2. 불안

이효범 2022. 4. 26. 08:04

18-2. 불안

 

하이데거는 인간이 죽음을 생각하면서 자신의 인생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 다시 말해서 자신의 존재에 있어서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는 존재라는 것을 인간의 본질적 성격이라고 본다. 그리고 인간에게만 독특한 그러한 존재방식을 실존Existenz’이라고 부른다. 그래서 실존實存현존재가 그것에 대해 이러저러하게 태도를 취할 수 있고, 또 언제나 어떤 방식으로든 태도를 취하는 그 존재 자체이다. 이런 의미에서 돌이나 난초나 호랑이 등은 실존하지 않는다.

이런 실존의 범주는 돌이나 호랑이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사물의 범주와는 다르다. 실존의 범주 중의 하나가 -존재In-Sein’이다. 그래서 인간(현존재)세계--존재In-der-Welt-sein’가 된다. 이것은 인간이 컵 안의물처럼, 그렇게 단순히 세계 안에서 세계에 대해 공간적 관계를 맺으며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현존재는 결코 다른 동식물이나 사물처럼 세계를 구성하는 하나의 부속품이 아니다. 그는 세계 안에서 거주하면서, 정을 붙인 채 부대껴가며 몰입해 살아가는 그런 존재이다.

그런데 그런 실존적 존재라는 말은 자신의 삶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묻고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뇌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실존으로서의 인간의 본질은 우리에게 은폐되어 있다. 우리는 우선 일상적인 경우에 자신의 존재를 문제 삼으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세간적世間的인 가치들을 자명한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들을 척도로 하여 살아간다. 사회가 재산과 명예를 갖춘 사람들을 우대하니까 우리는 어떻게든 재산을 모으고 명예를 높이려고 하며, 사회가 법과 도덕을 지킬 것을 요구하니까 법과 도덕을 지킨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삶의 방식을 비본래적인uneigentlich 실존이라고 규정한다. ‘비본래적이라는 말은 내가 나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지 않고 세상이 시키는 대로 살고 있는 일상성日常性을 의미한다. 이 경우 나의 삶의 주체는 내 자신이 아니라 사실은 익명의 세상사람das Man즉 세인世人이다. 세인(세상사람)이 사람도 아니고, 저 사람도 아니며, 몇몇 사람도 아니고, 모든 사람의 종합도 아니다.’ 그는 타자에 예속되어 있는 중성화된 존재자이다.

세상 사람의 특징은 차이성, 평균성, 평준화(평탄화), 존재면책 및 영합이다. 세인은 타자와의 차이성을 고르게 하거나 아니면 차이성을 통해 타자보다 월등한 자기를 과시해서 타자를 억누르려고 한다. 세인은 평균성을 삶의 가치 척도로 삼아 자신의 삶을 조율한다. 이런 평균성은 결국 평준화(평탄화)를 낳는다. 차이성, 평균성, 평준화가 세인의 공공성을 구성한다. 세인은 모든 것을 이런 공공성에 내맡긴다. 이것이 세인의 삶에 대한 결단과 책임을 빼앗는다. 그래서 그들은 책임을 면제받는다. 자기 삶에 책임을 지려는 세상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인은 존재면책을 가지고 다른 세인에 영합된다. 이런 세인은 비록 무은 아니라, 결과적으로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 자기를 상실한다. 이런 현존재는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대부분 일상화된 관심의 세계에 거주하고 있다. 이처럼 그런 세계에 몰입해 있음은, 세상 사람의 공식성 속으로 상실된 그런 존재의 성격을 대부분 갖고 있다. 현존재는 본래적인 자기존재가능성으로서의 자기 자신으로부터 먼저 늘 이미 이반되어 세상 속으로 함닉되어 있다. 세상 속으로의 함닉성은 잡담과 호기심과 애매 모호성으로 이끌려진 공동존재 속으로의 몰입을 의미한다.”

그들은 존재자에 대한 근원적인 존재관련도 없이, 실로 만사를 이해하고 있다는 듯이 잡담Gerede을 주고받는다. 그리고 그들은 호기심Neugier을 가지고 세계를 기웃거리며 그저 보기만 한다. 새로운 것에서 새로운 것으로 끊임없이 옮겨가면서 새로운 것만 추구하며, 새로 만나는 것의 변화에 의한 초조와 흥분을 추구한다. 그래서 그들은 거처를 상실하고 어디에나 있으면서 또한 어디에도 없게 된다.’ 또한 세상 사람의 현상적 모습은 애매 모호성Zweideutigken이다. 그들은 무엇이 진정한 이해 하에서 개시되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를 이미 결정할 수 없다

하이데거는 우리가 죽음에로 앞서 달려갈 경우에만, 다시 말해서 죽는다는 사실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뇌할 경우에만, 세상 사람에 의해 지배되던 상태에서 벗어나 본래적(근원적) 존재eigentliches Sein로 돌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경우에만, 우리는 세상 사람이 추구하는 가치들이 허망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인간은 가장 고유한 자기를, 자기 자신 쪽으로부터, 자신의 책임 있는 존재에 있어서, 자신 안에서 행위하게 한다.

이에 반해서 익명의 세상 사람들에 의해서 지배되는 상태에서 우리는 우선 대부분의 경우 죽음 앞에서 도피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죽는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않으려고 하며, 죽음에 대한 생각이 일어나도 그것을 곧 억압하고 일상적인 일에 몰두한다. 죽는 사람을 보아도 우리는 인간은 실로 언젠가는 죽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자신을 안심시킨다.

그러나 어느 날 우리는 우리의 일상적 삶에 대한 심한 허무감에 사로잡힐 때가 있다. 이러한 순간에는 세상 사람의 지시에 따라서 꼭두각시처럼 살아왔던 삶이 무의미하게 나타나면서, 그동안 자신에게 소중했던 그 모든 것들, 예를 들어 재산이나 명예와 같은 것들이 모두 무의미하게 여겨지게 된다. 이때 우리는 단순히 머릿속으로만 그것들을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그것들을 무의미하게 느끼며 그것들을 추구하고 싶은 기력을 상실한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불시에 우리를 엄습하면서 일상적 삶의 무의미를 드러내는 허무감을 불안不安Angst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불안은 우리가 원해서 갖게 되는 것이 아니라 부지불식간에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다. 불안은 어떤 특별한 계기 때문에 우리를 엄습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여느 때처럼 반복되는 삶을 살고 있을 때에도, 반복되는 그 삶의 한 가운데를 뚫고 치솟아 올라 우리를 엄습한다. 하이데거는 불안이 이렇게 아무런 특별한 계기와 원인이 없는데도 우리를 엄습한 것은, 그것이 우리의 삶의 근저에서 이미 항상 잠복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것이 잠복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은 언제든, 어디에서든, 아무런 이유도 원인도 없이, 우리를 엄습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우리를 항상 엄습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의식적으로 그것을 잠재우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그것을 잠재우고 일상적인 삶에 몰입하려는 우리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불안이라는 기분은 어느 날 갑자기 우리를 엄습해 올 수 있다. 이렇게 엄습해 오면서 그것은 우리의 평온한 삶을 송두리째 뒤흔들면서 우리를 죽음 앞에 세운다. 이때 죽음은, 우리가 일상적인 삶에 빠져 있으면서 사람들은 죽지만 나는 아직 죽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과 함께 의식에서 지웠던 우리 각자의죽음이다. 이렇게 죽음이 하나의 면전에 서 있음 ein Bevorstand’으로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집착했던 그 모든 것들이 무의미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따라서 불안이란 기분(심정성)은 우리를 인간 일반의 죽음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죽음 앞에 세우는 기분이다. 하이데거는 이렇게 불안이란 기분 안에서 죽음을 경험하는 방식이야말로, 죽음이 인간에게 근원적으로 나타나는 방식이라고 본다. 우리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죽음에로 던져진 존재인 한, 불안은 우리의 실존을 항상 철저하게 기분 지우고 있다. 현존재는 근본적으로 비극적 존재이고 무상한 존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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