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18-5. 경이로운 삶

이효범 2022. 4. 29. 06:06

18-5. 경이로운 삶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에 대해서 물었다. 그것이 그의 전기前期사상의 대표적인 책인 존재와 시간의 근본 물음이다. 그 책에서 그는 현존재(인간)의 존재 구조에 대한 분석과 그것에 입각한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정태적이고 비역사적인 방식으로 행해졌다. 그런데 1930년대 이후 후기 하이데거에 와서는 존재의 의미에 대한 물음이 철저하게 역사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전기 사상에서는 불안을 인수하면서 죽음으로 선구하는 현존재의 결단이 존재의 근원적인 개시開示를 가능하게 하는 것으로 간주된 반면, 후기 사상에서는 존재 자체가 시대마다 다르게 자신을 개시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이와 함께 후기의 하이데거는 존재의 의미 대신에 각 시대마다 자신을 다르게 개시하면서 각 시대를 여는 존재의 진리에 대해서 말한다.

후기 하이데거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고향상실Heimatlosigkeit’이라고 진단한다.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하였으나, 세계는 황폐화지고, 신들은 떠났으며, 대지는 파괴되고, 인간들은 정체성과 인격을 상실했다. 모든 존재자들에게 존재의 무게가 사라진 궁핍한 시대가 된 것이다. 현대의 과학과 기술은 모든 존재자들을 계산 가능한 에너지의 담지자로 보면서 존재자들의 진리를 은폐한다. 존재자들의 진리는 무엇보다도 예술에서 드러난다. 현대인들은 과학자야말로 가장 이성적인 사람들이라고 보는데, 하이데거는 과학자들의 이성이란 시적詩的인 이성의 퇴락한 형태이며, 과학적 이성을 통해서가 아니라 예술을 통해서 진리에 더 가까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인간마저도 자신의 에너지를 끊임없이 내놓도록 혹사당하는 현대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현대의 존재 이해를 넘어서는 새로운 존재 이해가 개시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즉 인간이 존재자들의 지배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파수꾼이 되는 것을 통해서만 현대 기술 문명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후기 하이데거에서는 말Rede(레데)도 말Sage(자게)로 바뀐다. 레데는 그냥 소리나 언어로 이루어진 말이라면, 자게는 존재의 의미를 가리키는 말이다. 그래서 침묵조차 존재 의미를 전달하기 때문에 자게가 된다. 이러한 자게를 자연 속 사물들은 끊임없이 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자연이 하는 말(자게)을 듣고, 그것에 대답하는 말(자게)을 한다. 후기 하이데거는 자연이 우리에게 말을 건넨다.’는 식으로 존재를 서술한다. 따라서 존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우리는 이를 시적詩的 언어로 표현한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우리의 일상 언어들도 한 때는 시적 언어였다. 그러므로 후기 하이데거 철학에서는 일상 언어가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격상된다. 영국과 미국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의 한 명인 비트겐슈타인이, 전기에는 이상언어理想言語(인공언어)를 추구하다가, 후기에 와서는 일상언어日常言語를 중시한 것과 철학적 배경은 다르지만, 어떤 면에서 매우 유사하다.

그래서 후기 하이데거는 인간이 진정으로 존재를 느끼고 거주할 터전은 자연이라고 강조한다. 자연은 소박하고 순환하는 속에 모든 약동하는 생명들을 품는다. 그 정적靜的이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흐름을 주목할 때 인간은 존재의 울림을 들을 수 있다. 존재자들이 자신을 열어 밝히면서 우리에게 다가오며 한없는 존재의 의미를 가져다주는 그 울림을 들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경이Erstaunen’로운 경험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충만하게끔 하는 그 무엇이다. 전기에서는 실존적 선택이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이었다면, 후기에서는 사물이 하는 말을 듣고, 경이를 느끼고, 그것을 자신만의 언어로 표현하는 것이, 자신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일이 된다.

 

 

더 읽을거리

 

김형효,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청계, 2001.

박찬구, ?하이데거와 윤리학?, 철학과 현실사, 2002.

박찬구,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강독?, 그린비,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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