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론

13-6. 창발주의

이효범 2022. 2. 24. 07:42

13-6. 창발주의

 

이런 계층적 모형에서 하나의 중요한 물음이 제기된다. 바로 주어진 단계의 사물들을 특징짓는 속성들은 이웃 단계의 사물들을 특징짓는 속성들과 어떻게 관계하는가 하는 점이다.

먼저 고전적 실증주의자는 주어진 단계의 독특한 속성은 낮은 단계의 실재들을 특징짓는 속성과 관계로 환원될 수 있거나 혹은 그것들에 의해 환원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고 대답한다. 이것이 환원주의(reductionism). 이에 대립된 견해로는 제거주의(eliminativism)와 비환원주의(nonreductivism)가 있다. 이 두 입장들은 상위 단계의 속성들이 일반적으로 하위 단계 속성들로 환원될 수 없다는 주장에는 일치하지만, 환원 불가능한 상위 속성들의 지위에 관해서는 차이를 보인다.

비환원주의는 상위 속성들이 이 세계의 참다운 존재론에서 제거될 수 없는 부분을 구성하는, 이 세계의 사건과 대상의 실재적이고 진정한 속성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제거주의는 그것들이 실재의 올바른 서술에서 삭제되어야 할 무용한 군더더기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비환원주의와 제거주의는 물리적 환원의 의의에 대해 서로 의견이 다르다. 우리가 유물론을 강하고 일관되게 고집하면 제거주의에 봉착할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제거주의를 선택하면 물리적 세계 속에서 정신은 진정으로 실재하지 않게 되고, 더 나아가 정신은 아무런 유용성도 지니지 않게 된다.

그러나 이런 입장은 우리의 건강한 상식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다. 제거주의와는 달리 비환원주의는 상위 단계의 속성에 대한 정당성의 시험으로서 환원 가능성을 거부한다. 그리고 그러한 속성들이 독자적인 영역, 즉 독립적인 개별 과학을 위한 영역을 형성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창발주의創發主義(emergentism)는 이런 비환원적 접근의 최초의 체계적인 시도이다.

일반적으로 창발주의자들은 구체적인 물리적 대상과 사건에 대해서는 순수한 유물론을 받아들였다. 예를 들어 창발학파의 주요한 이론가들 가운데 한 사람인 사무엘 알렉산더Samuel Alexander는 신경 과정 위 그 너머에 어떤 심리적 사건도 없다고 논변한다.

 

그래서 우리는 부분적으로 경험에 의해서 그리고 부분적으로 반성에 의해서, 마음이나 의식의 현저한 질적 성질을 갖는 과정은, 신경 과정, 즉 우리의 살아 있는 몸의 고도로 특수화되고 복잡한 과정과 동일한 공간과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신경 과정과 심리적인 것의 단순한 상호 관계 이상을 넘어 그것들을 동일하게 여기도록 강요당한다. 그런데 아주 특별히 복잡한 것이기 때문에, 의식의 성질을 갖는 하나의 과정이 존재한다. 그러면 발달의 어떤 단계의 신경 과정이 의식의 성질을 소유하고 그리고 그것에 의해서 심리적 과정과 동일하다는 것이 경험적 사실로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심리적 과정은 또한 어떤 질서의 생기 있는 과정이다.

 

알렉산더는 물리적 조건에서 정신적인 것이 출현(창발)하였고, 이 양자는 심지어 동일하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대부분 창발론자들은 창발적 속성이 그것을 창발시킨 기초적 조건과는 분명히 다르고 또 그것에 환원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로저 스페리Roger Sperry라는 저명한 신경생리학자에 의해 고무되었다. 그의 견해를 폭넓게 인용해 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이래 외과적으로 절단된 인간과 동물들의 두뇌 반구를 대상으로 의식의 통일성에 관한 문제들과 씨름하면서 우리들은 두뇌 작용과 의식적 지각의 관계에 대해서 새롭고, 한층 더 직접적인 방법으로 만사를 살펴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정신과 두뇌 활동에 관련된 이론들의 장단점을 비교하고 적용하는 과정에서, 우리들이 이제까지 신뢰해 마지않았던, 논쟁의 여지가 없는 완벽한 논리라고 생각해 왔던 이론, 즉 두뇌 기능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는 의식을 배제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은 우리가 깨닫지 못했던 논리적 오류와 그릇된 판단에 의존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이후 한층 더 깊은 분석을 통해서 의식을 배제하는 모든 일은, 인과론에 대한 새로운 사유에 의해서 압도당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새로운 이론을 간단히 요약한다면, 의식적 경험은 두뇌 작용의 인과적 연쇄의 상위(즉 인지적) 수준에서 비환원적 창발 속성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렇게 창발하는 정신적 실체는 두뇌 종합에 있어서 그 자신의 인지 수준에 합당하게 전일적 기능주의자의 기반 위에서 상호 작용하는 것처럼 인정된다. 또한 두뇌 구성원인 신경 세포들의 활동에 대해서 한층 더 높은 수준에서 아래 수준으로의 통제를 동시적 병발적竝發的 형태로 작용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제까지의 행동주의자들의 신조와 상반되는 것은 물론 신경과학계의 주류적인 견해와도 대립되는 이러한 내적 경험의 주관적 질에 대한 고찰은 의식적 행동을 설명하는 데 배제할 수 없는 중요한 인과적 구조물이 된다.

요컨대 정신이 객관적 과학이 다루어야 할 문제의 핵심으로 되돌려지게 된 것이다. 이제 위로부터 아래로의통제를 의미하는 새로 출현한 인과론이, 전통적인 아래로부터 위로의통제를 주장하는 전통적 인과론과 결합되어서 위계질서의 통제 메커니즘에서 상호적또는 이중 결정론적인 형태를 갖는 인과적 결정론의 다른 한 모델로서 취해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새로운 견해가 인과론에 관한 우리들의 사유에 한 특별한 전기를 제공한다는 점이다. 즉 지난 두 세기 이상이나 과학이 묶여 있었으며, 그 결과 우리들로 하여금 환원주의의 유물론적 행동주의 세계관을 갖도록 강요했던 논리의 틀에서 이제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전일적이고 창발하는 하향적 통제라는 새로운 사유는 과학의 경험적 원칙들을 어기지 않으면서 지금까지 있어 왔던 미세 연쇄(microchain)의 인과 작용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타당한 길을 열었다.

정신의 질에 대해서 비인과적 지위로부터 인과적 지위로의 관념 전환은 종래 우리들이 지녔던 유물론적행동주의적 신념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도록 요구하는 것이다. 이제 두뇌의 기능을 화학이나 분자 생물학의 용어로 충분히 설명할 수 있다고는 더 이상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좀더 상위 단계의 네트워크적 속성이 비환원적 통제 인자(irreducible control factor)로 함께 포함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마음과 정신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풍부한 주관적 특질들을 필수적이며 배제할 수 없는 기능적 요소로서 보유하는 것이다. 물론 그것들은 신체와 분리된다거나 임의로 유동한다거나 또는 정령과 같은 형태로서가 아니라 상위 수준의 두뇌 작용이 갖는 전일적인 속성으로 간주된다. 오랫동안 그렇게 될 수 없었던 주관적 지위와 속성이 이제는 전면으로 나서게 된 것인 바 말하자면 운전석에 앉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것이 곧 진화의 위대한 업적이며 또한 인간의 존재와 행동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주어진 우월성이다.

두뇌의 내부에서뿐만 아니라 자연 세계 전반을 통해서도 새로운 인과적 통제의 기본 원리가 적용된다. 한층 더 고도로 진화된 거시적또는 전일적인 속성들은 비환원적이며 배제 불가능한 인과적 실체이다. 그것은 모든 수준에서 부가적 지위와 과학에서의 적법성을 그 스스로 획득하여 그것보다 낮은 진화의 구성원들에 대해서 하향적으로 통제를 가한다. ‘정신적인 것은 이러한 보편적인 거대 인과의 한 특별한 예에 불과하며, 단지 별도로 언급할 만큼 충분히 중요한 주제가 될 따름이다. 아래로부터 위로 향하는 미세 통제도 전반적으로 작용하지만 더 이상 독점적이지는 못하다.

창발주의와 비환원적 물리주의는 상위 단계의 속성들이 세계의 순수한 첨가물로서, 환원되거나 세계에 대한 진정한 설명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세계의 환원 불가능한 새로운 특징으로서의 그것들은 자율적 영역을 형성하고, 물리적이고 생물적 과학들로부터 독립된 심리학과 같은 특별 과학들을 가능하게 만든다.

그러나 이런 철학적 견해가 유물론에 기초한 전통적 과학과 어떻게 조화될 수 있을까? 그리고 만약 이런 견해가 실제적 효용성을 지닌 과학과 어떤 종류의 일관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또한 나름대로의 고유한 특성이 법칙화될 수 없다면, 그런 이론의 존재 이유와 의의는 과연 무엇일까?

 

더 읽을거리

 

김재권, ?수반과 심리철학?, 철학과 현실사, 1994.

김창환, ?몸과 마음의 생물학?, 지성사, 1995.

송기원, ?생명?, 로도스출판사, 2014.

서유헌 공저, ?인간은 유전자로 결정되는가?, 명경, 1995.

이영록, ?생명의 기원과 진화?, 고려대출판부, 1989.

하두봉 공저, ?인간이란 무엇인가?, 민음사, 1991.

살바도르 E. 루리아, 김은수 역, ?생명론?, 연세대출판부, 1976.

다니엘 코엥 외, 김교신 역, ?휴먼 게놈을 찾아서?, 동녘, 1997.

野田春彦, 손영수 역, ?생명의 기원?, 전파과학사, 1979.

C. R. Darwin, 박만규 역, ?종의 기원?, 삼성출판사, 1982.

J. B. S. Haldane, 이정수 역, ?인간의 과학?, 삼성미술문화재단, 1983.

Pierre Douzou, 김교신 역, ?완두콩과 클론원숭이?, 두산동아, 1997.

Lynn Margulis, Dorion Sagan, 황연숙 역, ?생명이란 무엇인가?, 1999.

Richard Dawkins, 이용철 역, ?에덴 밖의 강?, 동아출판사,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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