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3. 새사람
이런 철학적 논의를 접어 두고, 이제 다시 바울이 구분하는 두 유형의 인간에 대해서 말해 보자. 바울이 나눈 두 개의 인간 그룹 가운데 하나는 육이 명하는 바에 따라서 사는 인간이고, 다른 하나는 영에 따라 사는 인간이다. 전자는 자연적인 인간이고, 회개하지 않은 자이며, 아담으로부터 유래한 세상의 사람들로서, 구원받지 못한 자이다. 후자는 회개한 자이며, 그리스도로부터 유래한 하나님의 아이들로서, 구원받은 자이다.
바울은 첫인간이 살아 있는 영혼(psyche)이 되었고,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pneuma)이 되었다고 한다.
기록된 바 첫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영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자가 아니요 육 있는 자요, 그 다음에 신령한 자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
이 구절은 두 아담이 병행하고 있다. 먼저 첫사람 아담은 생명있는 존재이고, 본질상 흙에서 나왔으며, 흙으로 만들어지고, 땅에 속하며, 천상 왕국에 맞지 않는 모든 것, 즉 육신, 혈육, 부패 같은 것을 특징으로 갖는다. 반면에 뒤에 나오는 마지막 아담은 그리스도로 생명을 주는 영적 존재이고, 천상 세계에 속하며, 천상 왕국에 맞고, 우리를 이 천상 왕국에 적합하도록 만드는 인간이다.
인간은 육에 따라 살 수도 있고, 영에 따라 살 수도 있다. 만일 인간이 육을 중심으로 살아가면 죄가 된다. 바울에게 있어서 죄의 기원은 역사적인 기원이라기보다는 실존적인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아담은 인간의 대표로서 모든 인간과의 연대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 때 죄의 기원은 피조된 인간이 자기의 인간된 본분을 망각하고,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거나, 다른 피조물을 다스리지 않고 섬기려 하거나, 모든 창조 질서에 위배되는 행위로서, 이것은 창조주에 대한 도전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죄는 도덕적 악이며, 하나님의 계명을 의식적으로 범함으로써 세상에 들어왔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죄의 기원을 소급하여 올라가면 천사의 세계까지 가게 된다. 타락한 천사의 우두머리격인 사탄은 원래는 피조된 천사들 중에 가장 완전하고, 지혜롭고, 권세 있는 세 천사(미가엘, 가브리엘, 루시펠)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교만해져서 하나님을 반역하고 자기의 위치를 지키지 않았다. 그렇게 타락한 천사는 하나님과 사람의 대적자가 되었다. 결국 하늘에서 추방을 당하여 암흑과 세상의 왕이 되어 사람을 유혹하고 범죄를 저지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인간을 사망에 이르게 하려고 맹활약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서 금지된 선악과를 따먹은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생生과 사死가 인간의 수중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의해 있음을 교시하는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면 가장 완벽한 의미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불복하면 영육간에 영원한 죽음에 처해진다는 사실이 인간의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통해 명시된 것이다. 인간은 간교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다. 하나님이 만든 들짐승 가운데 뱀이 가장 간교했는데, 사탄은 이것을 매개체로 하여 계약의 당사자인 아담을 꾀려고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럴듯한 거짓말로 유혹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최초에 지은 죄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인 참지식과 의義와 거룩을 상실하였고, 전인격이 부패되었다. 그리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어떤 영적인 선행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인간은 이 죄책을 짊어지고 사망의 법 아래 종 노릇하게 되었다. 생명 나무로 접근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에덴 동산에서 쫓겨났다. 이후 저주받은 세상에서 얼마 동안 인생고를 겪으면서 살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바울은 이러한 기원적 죄로 말미암아 모든 인간이 죄의 종이 되었고, 죄는 관계의 파괴와 상호 분리인 사망을 낳았다고 말한다.
이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죽음)이 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죄가 율법 있기 이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느니라.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왕 노릇을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표상이라.
삶의 덧없음과 일시성을 하나님을 배경으로 이해하는 데 실패하고, 허망한 것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인간이 바로 옛사람이다.
이에 대립되는 새사람이란 하나님을 중심으로 그를 향해 살아가는 ‘새로운 삶의 원리’에 지배받는 사람이다.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사람”인 것이다. 바울은 서신 속에서, 생명력을 주는 영적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교인의 가장 긴밀한 결합을 표현하기 위하여 이러한 새사람을 ‘그리스도 안에’라는 용어를 자주 사용하여 묘사한다. 즉 그는 죄와 죽음의 지배하에 있던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의 구원 사건을 통하여 구속받은 사람임을 강조한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의 신비적인 몸에 참가한 자이며,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음과 부활의 경험을 나눈 자이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자이다.
바울은 이러한 사람을 영에 속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영은 자연적으로 인간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 얻은 선물이다. 인간이 스스로 새로워질 수는 없다. 하나님은 재탄생의 목욕과 성령의 새로워진 집에 의해서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 그러나 영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인간이 비물질적인 존재가 된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새로운 삶의 태도와 목표를 가진 전인이 된다는 뜻이다.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노와 악의와 훼방, 또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쫓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바울은 빌립보소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성숙한 삶의 원리를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그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으로 모시는 자는 그리스도를 본받은 자기 희생과 사랑이 넘치는 교제와 서로를 섬기는 겸손과 박해 가운데서도 기뻐할 수 있은 믿음의 성숙함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마음의 중심에 두는 것이 삶의 기쁨 그 자체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의 새롭게 하는 힘으로 인간은 미래에, 영혼뿐만 아니라 몸을 포함하여 전인이 부활한다. 바울은 ‘부활의 몸’에 관해 말할 때 현재의 몸과는 달리 ‘영적인 몸’이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리스도를 믿고, 자신의 정당성을 버리고 신의 자비에 응하여,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 새로운 체험을 했을 때, 새로운 피조물이 된다. 그는 죽음을 넘어 부활이 약속되어 있으므로 희망이 있고 또한 진정한 자유와 화평이 있게 된다.
바울이 말하는 새사람은 공관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 자주 사용된 ‘제자’의 의미와 어떤 점에서 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예수는 하늘로 승천하기 전에 그의 지상 사역에서 가장 중요한 명령 가운데 하나를 그를 따르던 추종자들에게 위탁하였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종종 지상 명령으로 불리는 이 명령 속에서 예수는,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자기가 분부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라고 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예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바로 예수가 요구하는 전형적인 인간이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면 과연 제자는 어떤 존재일까?
마가는 예수의 열두 명의 제자를 제외하고 아무도 제자라고 부르지 않았다. 이들은 예수의 부름을 받고 자신들의 친족이나 동료 또는 모든 생계 수단을 버린 사람들이다. 즉 한층 더 고상한 가치를 위해 자기 희생을 무릅쓰는 헌신의 행위와 신앙의 결단을 수행한 사람들이다. 마가는 제자라는 명칭을 좁은 의미로 사용하고 그들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과거의 열두 제자 이야기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오늘을 살아가는 제자를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누가는 사도행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면 그가 누구이든지 간에 제자라고 부르고 있다. 즉 예수의 개인적 제자뿐만 아니라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헌신하는 신자들은 모두 제자인 것이다.
사실 예수는 제자만 부른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불렀다. 또 그는 제자만 가르친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가르쳤다. 그리고 제자만 예수를 좇은 것이 아니라 무리들도 예수를 좇았다. 이렇게 그는 제자나 무리들에게 동일한 교훈을 주었고 동일한 요구를 하였다. 그리고 예수는 무리와 제자를 함께 부르고 이렇게 요청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그가 지금 걸어가고 있는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길은 단지 열두 제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름지기 그를 따르겠다고 결심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요청되는 길이다. 그래서 만일 무리들 가운데 예수의 부름을 듣고 그와 같이 자기 부정과 자기 희생의 길을 좇는 사람들이 생긴다면 그들은 비록 제자라는 명칭이 붙지는 않을지 몰라도 분명히 예수의 제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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