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4. 이도관지
장자는 자연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데 최고의 표준으로 삼았다. 이를 ‘법자연法自然’ 또는 ‘순자연順自然’이라고 한다. 자연에 따른다는 것은 자기 자신의 의도와 목적 그리고 선입견 등 일체 사의私意를 배제함을 의미한다. 이를 장자는 “사물의 자연스러운 본성에 따르되 사의를 개재시키지 않음(順物自然而無客私焉)”이라고 하였다. 개인의 사심私心은 사람과 지역과 시대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마음은 행위의 올바른 척도가 될 수 없다.
자연에 따르려면 사물을 그의 본성에 맞게 대해야 한다. 이에 대한 장자의 말은 다음과 같다.
너는 너의 마음을 담백하게 하고 너의 기氣를 고요하고 평화롭게 하여 자연의 물상 변화에 순응하되 자신의 사사로운 마음이 끼여들지 않도록 하라. 그러면 천하는 잘 다스려질 것이다.
이처럼 자연에 순응한다는 것은 자신의 심기를 담백하며 고요하게 하고 사심에서 벗어나 사물의 자연스러운 변화에 따르는 것이다. “사람마다 마음이 같지 않음과 같다”는 말이 시사하듯이, 개인의 마음은 보편성을 띠고 있다기보다 지역과 시대, 그리고 사람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표준으로 삼아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면 타인을 해칠 수 있다.
옛날에 어떤 바다새(海鳥)가 노魯나라 교외에 날아왔다. 노나라 임금이 그 새를 맞아 묘당 위에서 연회를 열어 구소九韶를 연주하고 태뢰太牢의 성찬을 베풀어 환대하였다. 그러나 그 바다새는 도리어 눈이 어지럽고 마음이 슬퍼서 고기 한 점 먹지 못하고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한 채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는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려고 한다면, 그 새가 깊은 숲 속에 깃들여 살고 광활한 대지에서 노닐며 강과 호수에서 헤엄치면서 미꾸라지와 피라미를 먹고 새떼의 행렬 속에 머무를 수 있도록 자유롭게 해야 한다. …… 물고기는 물 속에서 살지만 사람은 물 속에서 살지 못한다. 그들은 서로 생활 방식이 다르고, 좋아하고 싫어하는 감정도 본래 같지 않다. 그러므로 옛 성인은 그들의 기능을 획일화하지 않고, 그들의 일을 같지 않게 한 것이다.
장자는 노나라 임금이 새를 이와 같이 대접하는 것을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는 것(以己養養鳥)’이라고 하였다. 이는 오히려 새를 죽이게 된다. 새를 살리려면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길러야 한다(以鳥養養鳥). 이것은 사람이 자기 마음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 행위 한 경우 야기될 수 있는 폐단을 경계한 것이다. 새를 자신의 기호에 맞추어 기르려고 들면 새의 생명을 해칠 수 있듯이, 만약 어떤 통치자가 자기 마음을 기준으로 삼아 백성을 다스리고자 한다면 도리어 백성의 성정을 해칠 수 있다. 따라서 백성의 성정을 해치지 않고 그들이 자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하려면, 자신의 관점에서 다른 사물을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입장에서 그 사물을 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보통 색안경을 쓴 것처럼 자기 위주의 관점으로 사물을 보고 이해하며 처리한다.
사람은 습한 곳에서 잠자면 허리에 병을 얻어 몸이 마비되어 죽는다. 그러나 미꾸라지도 그러한가? (…) 암원숭이는 긴팔원숭이가 짝으로 삼고, 순록은 사슴과 사귀며, 미꾸라지는 물고기와 노닌다. 모장毛嬙과 여희麗姬는 사람들이 미인이라고 하나 물고기가 그들을 보면 깊이 숨어 버리고, 새가 그들을 보면 높이 날아가 버리고, 순록과 사슴이 그들을 보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친다. 이 넷 가운데 어느 것이 천하의 정색正色을 안단 말인가?
사람과 물고기와 새와 사슴은 각기 보는 시각이 같지 않다. 따라서 인간의 관점에서 그들을 보고 가치를 평가하거나 재단裁斷해서는 안 된다. 인간이 자기 위주의 시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을 ‘이물관지以物觀之’라 하고, 사물 자체로 사물을 보는 것을 ‘이도관지以道觀之’라 고 한다.
도는 온갖 사물과 사건의 전체적이며 근원적 원리이므로, 도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나와 남, 시是와 비非, 귀한 것과 천한 것 등의 나눔이 없다. 그러나 물物은 부분적이며 국한된 개별자이기 때문에 물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천지 만물이 갖가지로 분해될 수 있다. 이에 대하여 장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도를 통해서 사물을 보면 사물 사이에 귀한 것과 천한 것이 없으나, 물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면 자기를 귀하다고 하고 상대방을 천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물관지의 입장을 취하면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 이익 위주로 사물을 보기 쉽다. 그래서 물오리의 다리가 짧다고 하여 그것을 길게 이어 주거나, 두루미의 다리가 길다고 하여 그것을 잘라 주면 그들을 해치게 된다. 물오리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다리는 짧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적절하며, 두루미의 입장에서 보면 그의 다리는 그보다 짧아서는 안 될 것이다. 단편적인 자기 세계관에 이끌릴 때 사람은 자기 자신이나 세계를 파괴하려는 행동을 취할 수 있다. 사람이 자기 위주로 사물을 봄으로써 물오리와 두루미를 해칠 수 있듯이, 오늘날 인류는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사물을 보고 대처함으로써 생태계를 파괴하고, 지구의 부존자원을 고갈시키며, 흙과 물과 공기를 오염시키고 있다. 장자의 입장에서 볼 때, 이러한 폐단에서 벗어나려면 사물을 그 자체로 보아야 한다. 사물을 그 자체로 보려면 결국 도의 관점에 서야 한다. 왜냐하면 도는 일체 사물의 본체이기 때문이다.
사물은 저것 아닌 것이 없고, 이것 아닌 것이 없다. 그러나 저것으로부터는 보지 못하고, 스스로 아는 것만 안다. 그러므로 저것은 이것 때문에 생겨나고, 이것은 저것 때문에 생겨난다. 곧 저것과 이것은 상대적으로 생겨난다는 설명이다. 생生에 대립하여 사死가 있고, 사에 대립하여 생이 있으며, 가可에 대립하여 불가不可가 있고, 불가에 대립하여 가가 있으며, 시是에 기인하여 비非가 있고 비에 기인하여 시가 있다. 그러므로 성인은 이런 상대적 입장에 서지 않고 천天의 입장에서 바라본다. 이것이야말로 시是에 기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물관지의 입장에서 볼 경우는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피이지만,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피가 된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 보면 피는 피이면서 차이고, 차도 차이면서 피이다. “피는 피이고 차는 차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사물을 고착시켜 일면적으로 보는 것이지 전면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다. 사물을 단편적으로 보지 않고 전면적으로 보려면 천天, 즉 도의 관점에 서야 한다. 장자는 사물을 전면적으로 보는 것을 ‘도추道樞의 관점’이라고 하였다. 도추는 일체 사물과 사건의 중추中樞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사물을 보면 사물이 아무리 무궁하게 변할지라도 거기에 자연스럽게 대처할 수 있다.
장자가 ‘자기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르는 것’에 반대하고 ‘새를 기르는 방식으로 새를 기를 것’을 논하면서, “그들의 기능을 획일화하지 말고 그들이 하는 일을 같지 않도록 한다(不一其能 不同其事)”는 주장 속에는, 조화를 중시하는 생각이 들어 있다. 다양한 사물 또는 주장이 상반 상성相反相成하여 조화를 이루게 되면, 사물들은 각기 자기들의 성능을 발휘하여 생성하고 발전할 수 있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동同은 어느 하나의 사물이나 주장이 홀로 기능을 발휘하는 것을 뜻하는데, 만일 어느 하나가 획일적으로 지배하게 되면 다른 사물의 발전을 저해할 위험성이 있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일체의 사물 사건들을 그 자체의 성질에 따라 대처하기를 주장하는 장자의 사상은, 다양성을 조화롭게 살려 낼 수 있는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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