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8)
o 선에 대하여(8)
구녕 이효범
지금까지 보았듯이 목적주의 윤리설은 인생의 목적이 선이라고 본다. 그러나 칸트는 대표적인 의무주의 윤리학자이다. 그는 삶의 목적을 말하지 않고 우리 삶이 따라야 할 도덕법칙을 강조한다. 칸트에 의하면 도덕법칙은 우리 안에 있다. “그에 대하여 자주 그리고 계속해서 숙고하면 할수록, 점점 더 새롭고 점점 더 경탄과 외경으로 마음을 채우는 두 가지 것이 있다. 그것은 내 위의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법칙이다.”(임마누엘 칸트, 백종현역, 『실천이성비판』, p.327.)
칸트는 별이 빛나는 하늘에 대한 지식이 증가하면 할수록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이 보잘 것 없는 피조물이라는 점을 인식하게 된다고 말한다. 인간은 무한한 우주 속의 한낱 먼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런 피조물이 자신 속에 내재하는 도덕 법칙을 인식함으로써 자신의 중요성과 존엄성을 회복하게 된다. “무수한 세계 집합의 첫째 광경은 동물적 피조물로서의 나의 중요성을 없애버린다. 동물적 피조물은 그것으로 그가 된 질료를, (어떻게 그리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짧은 시간 동안 생명력을 부여받은 후에는, 다시금 (우주 안의 한낱 점인) 유성에게로 되돌려줄 수밖에 없다. 이에 반해 두 번째 광경은 예지자로서의 나의 가치를 나의 인격성을 통해 한없이 높인다. 인격성에서 도덕법칙은 동물성으로부터, 더 나아가 전 감성 세계로부터 독립해 있는 생을 나에게 개시(開示)한다.” (앞의 책, p.328.)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무한한 가치를 지니는 것은 도덕법칙을 인식하는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젠가 죽을 수밖에 없는 하찮은 동물이지만 그런 동물적 지위를 넘어설 수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도덕법칙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런 도덕법칙을 인간은 무조건 따라야 한다. 인간이 도덕법칙을 조건 없이 따르려는 의지가 ‘선의지(der gute Wille)’이다. 칸트는 그런 선의지만이 무조건적으로 선하다고 선언한다. “이 세상에 있어서 또는 이 세상 밖에 있어서까지도 선의지 이외에는 무조건 선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생각할 수 없을 것이다.”(『도덕형이상학의 기초』) 여기서 무조건적으로 선하다는 말은 그것의 선함이 부정될 수 있는 하등의 조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런 칸트의 주장은 추론이라기보다는 직각론적 판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이 명제를 정당화시키는 논법으로, ‘이 세상에서 본래적인 선으로 인정되고 있는 것은 선의지와 결합되지 않으면 무가치하기 때문이다’ 는 이유를 든다. 예를 들어 지적 우수성이나 용기와 같은 기질적 특성도 선의지와 결합되지 않으면 얼마든지 사악한 것이 될 수 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얼마든지 사기를 칠 수 있는 것이다. 심지어 칸트는 행복이라는 본래적 선마저도 무조건적으로 선하지는 않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행복의 소유가 사람을 지나치게 거만하고 자만에 빠지도록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선의지에는 문제가 없는가? 우리가 좋은 의지에 따라 행동했는데도 결과가 얼마든지 좋지 않거나 아무런 성취를 이룰 수 없는 경우도 많다. 가난한 사람을 순수한 의도로 도와주었지만 그 사람은 그 도움으로 자존심이 상해 오히려 자살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에 칸트는 대답한다. 행동의 결과는 운에 따라 달리지기도 하고 우리가 통제할 수 없는 다양한 요인들에 의해 결정되기도 한다. 그러므로 선의지의 선함은 결과와는 상관없이, 그 자체의 본성에 놓여 있을 수밖에 없다. “선의지는 오직 자신의 의지작용을 통해서만 선하게 된다.”
인간은 두 가지 동기로 행동(행위)한다. 하나는 끌림 동기 때문이다. 자신의 성향(좋고 싫음)과 이익 때문에 행동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의무동기이다. 그것을 하는 유일한 동기는 그 행위가 단지 옳기 때문에 의무적으로 하는 것이다. 인간이 선의지로 하는 행위는 도덕법칙을 준수하려는 깊은 의무감 혹은 도덕법칙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하는 행위이다. “의무란 법칙에 대한 존경으로 말미암아 행위 하지 않을 수 없는 필연성이다” 칸트에 의하면 이런 행위만이 도덕적이다. 설령 친절한 마음이나 자비심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고 해도, 그것이 어떤 내적 성향으로 그랬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에서 도덕적인 행동은 아니다. 도덕이 성향에 의존한다면 그런 사랑의 성향을 풍부하게 지니고 태어난 사람은 좋을지 몰라도, 인색하고 무자비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은 어떠해야 하는가? 도덕적이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칸트는 그럴 수 없다고 잘라 말한다. 우리가 이성을 지닌 사람인 한 존엄한 삶을 포기할 수는 없다. 스쿠르지 영감 같은 인색한 사람도 설령 내면에서는 즐겁지 않을지 몰라도, 의지력과 결단을 기울려 의무인 바의 행동을 수행하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든지 간에 도덕법칙과 나의 의지가 완벽하게 일치할 때, 도덕이 궁극적인 목표로 지향하는 거룩함(die Heiligikeit)에 도달하게 된다. 인간은 이것을 목표로 삼아 ‘길을 걷는 사람(homo viator)'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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