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5)

이효범 2021. 7. 26. 20:12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5)

 

o 선에 대하여(5)

 

구녕 이효범

 

서양윤리학사에서 인생의 목적이 행복임을 잘 정리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이다. 그는 세상을 구성하는 모든 개체(ousia) 각기 실현해야 할 목적을 갖고 있다는 목적론적 자연관을 주장한다. 목적은 실현해야 할 것이며 그것의 실현은 곧 선이다. 그러므로 인생의 궁극목적이 인생의 최고선(summum bonum)이다. 궁극목적이란 그 자체를 위해 소망되는 것,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일이 이루어지는 바로 그것이다. 이런 궁극목적이 갖추어야 할 성질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궁극성(final)이다. 이것은 그것이 다른 무엇의 수단이 될 수 없다는 자기목적성을 뜻한다. 다른 하나는 완전성(self-sufficient)이다. 이것은 그 이상 아무 것도 보탤 필요가 없다는 자족성을 뜻한다.

 

그런 궁극목적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복(eudaimonia)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행복은 쾌락과 다르다고 말한다.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은 짐승적인 삶을 선택하는 것이고, 자신의 취향이 노예나 다름없음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또한 명예도 아니다. 명예란 그것을 받는 사람보다도 주는 이에게 달려 있어 피동적이고 우연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행복은 덕도 아니다. 덕이란 한갓 잠세력(潛勢力)으로 발휘되지 않을 수 있으며, 덕을 많이 가지고도 비참한 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은 또한 부()도 아니다. 부는 단지 다른 것을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행복은 플라톤이 말하는 선의 이데아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스승의 철학을 비판한다. 선이라는 말은 실재나 성질이나 수량이나 관계나 시간이나 장소 같은 여러 범주에 사용되기 때문에, 하나의 보편적인 선이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포괄하는 하나의 선의 이데아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플라톤이 주장하는 것처럼 현실적인 좋은 것들을 떠나 좋음 그 자체나 좋음의 원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선의 이데아는 지상의 실천생활에 아무 소용이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행복은 일정한 심리적 상태가 아니고 활동하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활동하는 과정으로서의 행복하다는 말은 잘 산다는 말이고, 잘 산다는 말은 잘 한다는 말이다. 즉 행위자가 자기의 기능을 잘 발휘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인간은 세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영양과 생식기능이다. 이것은 식물이나 동물 모든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기능이다. 그러므로 고등생명체인 인간이 이런 기능을 잘 발휘한다고 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다. 다른 하나는 감각과 욕구의 기능이다. 모든 동물들이 갖고 있는 먹는 일, 육체적인 안락, 싸움, 성적인 쾌락은 인간다운 특성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간에게는 이런 기능을 잘 한다고 해서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진화생물학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과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고급 와인을 마시고 비싼 스테이크를 먹는다고 해서 진정으로 행복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이성과 사유의 기능이 있다. 이것은 로고스에 따르는 활동(praxis kata logon)으로 오직 이성적 동물인 인간만이 가지고 있는,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참된 기능이다. 그리스 철학자들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은 진리를 탐구하고 도덕적으로 올바르게 판단하고 행동하게 하는 능력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동물과는 달리 사물의 이치를 파악할 수 있으며, 옳지 못한 행동을 했을 때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이런 이유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성의 기능을 잘 발휘하는 일(잠세태(potentiality)를 현실태(actuality)로 전환시키는 일)이 인간으로서 좋은 삶이고 궁극목적이며, 이것이 인간의 진정한 행복이라고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을 우리가 잘 아는 아르키메데스(Archimedes)의 예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아르키메데스는 로마 시대 히라쿠스의 왕 히에론 2세의 고문(顧問) 노릇을 하고 있었다. 히에른 2세 왕은 전쟁에서 승리할 때마다 신전에 무엇인가를 바치곤 했는데, 한 번은 금으로 만든 왕관을 만들어 신전에 바치기로 하였다. 왕은 상인에게 순금 왕관을 만들게 하였고, 상인은 훌륭한 순금 왕관을 만들어 바쳤다. 겉으로 본 왕관은 비할 바 없이 훌륭하였다. 그러나 얼마가지 않아 그 왕관은 순금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소문이 나돌았다. 왕도 그 왕관이 어쩐지 미심쩍었으나, 딱 부러지게 순금이 아니라는 증거를 댈 수 없었다. 왕은 아르키메데스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여 줄 것을 명령하였다. 아르키메데스는 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았으나 당장 좋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고민하고 또 고민하였다. 플루타르크(Plutarch)는 그가 얼마나 순수한 열정으로 고민을 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아르키메데스의 하인들은 그를 욕조로 끌고 와서 물로 씻기고 기름을 발랐으나, 그는 아궁이의 숯검댕으로 기하학적 도형들을 그려대곤 하였다. 하인들이 그에게 기름과 향료를 바르는 동안에도 그는 자신의 몸뚱이 위에 손가락으로 갖가지 선들을 그렸다. 그는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 같았고, 기하학에 열중할 때 종종 그랬던 것처럼 황홀과 무아지경에 빠진 모습이었다.” 아르키메데스는 어느 날 목욕을 하기 위해 욕조 안에 들어갔다. 그 때 가득 차있던 욕조의 물이 넘쳐흐르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거다!(Eureka)’라고 외치면서, 알몸인 것도 잊어버리고 궁전으로 뛰기 시작하였다. 이때 아르키메데스는 본인이 의식적으로 느꼈는지는 모르지만 진정으로 행복했을 것이다. 사물의 이치(진리)를 찾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행복을 또한 종교적 절대 진리를 찾으려는 수행자에게도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경허(鏡虛)선사는 한국 근현대 불교를 개창한 대선사이다. 그는 1879년 동학사 아래에 살고 있던 이처사의 소가 되더라도 콧구멍 없는 소가 되어야지.”하는 한마디를 전해 듣고 바로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을 노래했다. “홀연히 사람에게서 고삐 뚫을 구멍이 없다는 말을 듣고, 문득 깨달아 보니 삼천대천세계가 다 나의 집일세. 유월 연암산 아랫길에, 들사람 일이 없어 태평가를 부르네(忽聞人語無鼻孔, 頓覺三千是我家, 六月岩山下路, 野人無事太平歌)” 세속과 인연을 끊고 수행 정진하다가 단박에 도를 깨쳤으니 얼마나 행복했을까? 그래서 스님은 아직도 무지 몽매에 있는 중생에게 참선할 것을 권한다. 그의 참선곡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의심하고 의심하되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목마를 때 물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 외자식을 잃은 후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 생각생각 잊지 말고 깊이 궁구 하여 가되 일념 만년 되게 하여 폐침망찬 할 지경에 대오하기 가깝도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이런 것들이 진정한 인간의 행복이다. 이런 행복은 어떠한 고등 동물도 흉내 낼 수 없는 인간만의 고유한 것이다.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조각상은 진정으로 인간적인 모습이다. 인간 이외에 턱을 괴고 쪼그리고 앉아 고뇌하는 동물은 아마 지상에 없을 것이다. 이런 이성이 잘 발휘되기 위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습성(, virtue)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덕은 이성을 항상 잘 발휘하게 하는 습성이며 인생의 궁극목적으로서의 행복을 위한 기본조건이다. 그러므로 행복은 덕과 일치하는 생활이다. 이런 덕은 타고나지 않으며 교육과 관습과 실천을 통해서 얻는다. 덕에는 지적인 덕과 도덕적 덕이 있다. 지적인 덕은 사물의 이치를 인식하고 올바른 행동을 계획하는 지적능력인 이론적 이성의 탁월성이다. 이것은 명상, 관조, 교육을 통해 획득한다.

 

도덕적 덕은 이성의 인식과 계획에 따라 올바른 길을 택하는 행동의 능력인 실천이성의 탁월성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강조하는 실천이성의 능력은 보편적으로 성립하는 법칙을 직관하는 능력이 아니라, 구체적인 상황의 도덕적 의미를 직관하는 이성이며, 또한 올바르게 실천(추론)하는 이성이다. 즉 개연적인 대상을 실천적인 목적과의 관계 속에서 파악하고, 해야 할 행위를 올바로 추론하여 선택하는 이성이다. 도덕적 덕은 습관적 연습을 통해 획득한다. 사람들은 자연적으로 주어진 일정한 성향을 가지고 태어난다. 사람들이 쾌락을 쫓으려고 하는 것은 하나의 자연적 성향이다. 이런 성향들은 도덕적으로 변형되어야 한다. 또한 사람들은 돈키호테처럼 만용을 부리거나 햄릿처럼 비겁한 행동을 취하기 쉽다. 만용과 비겁이라는 극단적인 행동을 하면 마음이 안정되지 못하고 불안해진다. 그 중용의 덕인 용기 있는 행동을 일관되게 선택할 때 우리의 도덕적 덕성이 형성된다. 이렇게 우리가 올바른 실천이성에 따라 지속적으로 양 극단을 피하고 중용의 길을 실천한다면, 동물적 자연적 성향이 성숙한 인격적 모습으로 전환된다. 그런 인격적 모습을 가져야 인간은 행복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