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6)
o 선에 대하여(6)
구녕 이효범
서양윤리학사에서 인생의 목적이 쾌락이라고 주장하는 대표적인 철학자가 에피쿠로스(Epicurus)이다. 그는 쾌락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추구해야 할 인생의 궁극적 목적이며 최고의 선이라고 가르친다. 그는 유물론자인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론을 신봉하였다. 이 이론에 의하면 우주는 텅 빈 공간에 더 이상 쪼개질 수 없는 원자라는 물질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육체는 물론 정신까지도 이 원자들의 조합물이다. 죽음은 원자가 분해된 상태이다. 영혼(정신)도 원자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죽음 이후에 영혼의 불멸은 불가능하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이 삶이 전부이고, 내세라는 것은 인간의 상상력의 소산에 불과하다.
에피쿠로스가 이 세상에 사는 동안 가능한 한 많은 즐거움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유가 이런 형이상학에 기반하고 있다. 그는 쾌락이 축복받은 삶의 시작이며 끝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는 쾌락을 추구하되 고통을 피할 것을 역설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고통이 수반되는 쾌락은 가급적 추구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한다. 쾌락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유일한 선이고 삶의 궁극적 목적이라면, 고통은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될 악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섞여 있거나 수반하는 쾌락보다는 고통이 없는 순수한 쾌락만을 추구해야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두 가지 쾌락을 구분한다. 하나는 고통을 수반하는 동적인 쾌락이다. 이것은 항상 외적인 자극이 필요한 성적 욕구의 충족, 과식, 명예욕, 음주, 결혼 등의 쾌락이다. 다른 하나는 고통이 수반하지 않는 순수한 정적인 쾌락이다. 이것은 외적 자극이 필요하지 않는 심신 그 자체의 자연적인 안정 상태 혹은 흔들림이 없는 평정 상태를 말한다. 참다운 우정과 철학적 담소 등이 그것이다. 에피쿠로스는 이런 일체의 괴로움과 공포로부터 해방된 상태를 평정무애의 상태(ataraxia)라고 부른다.
그러면 이런 아타락시아를 어떻게 획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모든 형태의 공공 업무와 사회적 관계를 피하고 조용한 생활을 할 때 가능하다. 실제로 쾌락주의자 에피쿠로스는 놀랍게도 독신으로 지냈으며, 빵과 물만으로 간소하게 살았다. 쾌락주의자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런 정욕과 방종의 관능적 삶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스토아철학자와 같은 금욕(禁慾)은 아닐지라도, 엄격한 절제의 생활을 한 것이다. 그리고 그는 ‘숨어서 살아라(lathe biosas)’라는 신조를 좌우명으로 삼아 은둔하기를 좋아했다. 그는 자연적이고 필연적인 욕망은 충족시켜야 하지만, 성욕이나 식도락 같은 자연적이더라도 필연적이 아닌 욕망은 사려에 의해 진정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사치욕이나 정복욕 같은 자연적이지도 않고 또한 필연적이지도 않는 욕망은 불행을 자초하기 때문에 제거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즉 이런 욕망은 쾌락보다는 고통을 더 많이 초래하기 때문에 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에피쿠로스의 지적에 따라 불필요한 욕망을 줄이고 신중하게 판단하여 고통을 수반하지 않는 쾌락을 추구하면, 마음의 평정을 얻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신과 죽음의 공포가 끝내 사람을 불안에 몰아넣는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런 불안은 근거 없는 불안이다. 이점을 알기 위해 이론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논리적으로 볼 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적절하지 않은 잘못된 공포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믿음에 익숙해져라. 왜냐하면 모든 좋고 나쁨은 감각에 달려 있는데, 죽음은 감각의 상실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올바르게 알게 되면 가사성可死性도 즐겁게 된다. 이것은 그러한 앎이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의 삶을 보태어주기 때문이 아니라, 불멸에 대한 갈망을 제거시켜주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4) “그러므로 가장 두려운 나쁜 일인 죽음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존재하는 한 죽음은 우리와 함께 있지 않으며, 죽음이 오면 우리는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죽음은 산 사람이나 죽은 사람 모두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왜냐하면 산 사람에게는 아직 죽음이 오지 않았고, 죽은 사람은 이미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메노이케우스에게 보내는 편지』, 125)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영혼은 육체 없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육체적 죽음은 개인의 완전한 끝이다. 따라서 죽음 이후에는 아무런 감각도 지각능력도 없게 된다. 죽음과 동시에 감각과 의식이 사라지면 고통이나 죽음을 경험할 수 있는 주체(主體)는 이미 존재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논리적으로 볼 때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없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나 ‘좋은 죽음’을 맞이하라고 충고한다. 그에게 좋은 죽음이란 침착하고 기분 좋게 삶을 마치는 것이다. 친구들에게 둘러싸여서 그들과 함께했던 좋았던 시간을 회상하고, 사후 세계에 대해 불필요하게 불안해하지 않고, 루크레티우스(Titus Lucretius Carus)가 말한 대로 ‘죽음은 가장 깊은 잠보다 더 평화롭다.’고 생각하면서 죽는 죽음이, 좋은 죽음이다.
에피쿠로스에 의하면 신에 대한 공포도 죽음처럼 잘못된 것이다. 그리스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적인 전통에 띠라, 제우스를 정점으로 하는 신들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인간의 삶을 예측 불가한 것으로 만들고 불행한 결과를 낳기도 한다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에피쿠로스는 신들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완전한 존재로서의 신들은 인간의 불행한 사건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신들은 더없이 행복한 존재들인데, 인간의 일에 개입하려면 정념과 편애를 필요로 하고, 이러한 성질은 신들의 평온함과 모순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즉 신들이 인간의 일에 간섭하고 감독하고 화내고 편애하는 것은 그들이 가진 최고의 행복과 일치하지 않는다. 자연의 세계는 자연을 구성하는 원자들의 운동을 규정하는 엄격한 법칙의 지배를 받을 뿐이다. 그러므로 신들이 인간의 삶에 임의적으로 끼어들어 망쳐놓을 것이라고 두려워할 하등의 이유는 없다. 이런 사려 깊은 분별력과 통찰력을 통해 이제 어느 것도 인간의 마음을 흔들리게 하거나 구속하는 것은 없다. 그러면 우리는 모든 근심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마음의 평온한 즐거움을 즐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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