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0)

이효범 2021. 8. 6. 06:32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0)

 

o 선에 대하여(10)

 

구녕 이효범

 

유교()에서 선악의 문제는 주로 인성론과 결부되어 있다. 중용에 의하면 사람의 본성은 하늘로부터 주어졌다. “하늘이 명한 바를 일러 성이라고 한다(天命之謂性).” 공자는 이런 인간의 본성을 맹자나 순자처럼 선하다거나 악하다고 일반화해서 명시하지 않았다. 그는 경험적으로 구체적인 사실에 입각해서 인간의 본질이 서로 동일하다고 생각하였다. 그 동일한 인간성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본질이 인()이다. 공자가 말하는 인은 인()으로서, 인간이 사회적 인간으로 형성될 수 있는 가능 근거이다. 그러므로 공자가 보기에 사람이 인()하지 않으면,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맹자는 공자의 학문을 계승, 발전시킨 학자로 공자의 인성론을 더욱 체계화하고 분명히 서술했다. 맹자는 모든 사람이 신체가 동일한 것처럼 동일한 인간성을 타고난다고 믿고, 그런 인간성이 선하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맹자는 입이 좋은 맛을 구하고, 눈이 좋은 빛을 원하며, 귀가 좋은 소리를, 코가 좋은 냄새를, 사지가 편안하기를 바라는 것은 인간의 본성(本性)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마음대로 할 수 없는 명()이 게재되어 있어 군자는 이런 것을 본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孟子?, 盡心 下, 口之於味也 目之於色也 耳之於聲也 鼻之於臭也 四肢之於安佚也 性也 有命焉 君子不謂性也)라고 한다. 맹자가 보기에 사람의 오관으로부터 생기는 육체적인 욕망(감각적 욕구, 생물학적 본능)은 모두 사람의 성()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그런 욕망들은 기껏해야 이목구비와 신체가 존속하는 날까지밖에 있을 수가 없어서 유한한 것들이다. 또 그것들은 나의 욕망이 남의 것과 같지 않고 남의 욕망이 나의 것과 같지 않으니 국한된 것들이다. 그런 유한한 것, 국한된 것은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것이며, 사람의 목숨이 끊어지면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명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맹자는 인이 부자간에 베풀어지고, 의가 군신 간에 유지되고, 예가 빈객과 주인 간에 지켜지고, 지혜가 현자에 밝혀지고, 성인이 하늘의 도를 행하는 것은 천명이기는 하나, 거기에는 인간의 본성이 게재되어 있다. 군자는 그런 것을 천명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盡心 下, 仁之於父子也 義之於君臣也 禮之於賓主也 智之於賢者也 聖人之於天道也 命也 有性焉 君子不謂命也)라고 한다. , , , , 천도 같은 것은 사람이 가정생활, 국가생활, 사회생활, 학문생활을 함에 있어서 공통으로 요구하는 것이며, 이런 세계란 영원한 것이므로 그런 요구도 영원히 존속되는 것이다. 그런 요구를 잘 실현하거나 실현하지 못하는 것은 사람의 생리적인 재질의 차이에서 생기는 것이니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군자는 그런 요구가 인간이 공통으로 가지는 영원한 본성인 줄을 알기 때문에, 생리적인 면에서 오는 제한을 받는다고 해서, 그런 요구의 실현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맹자가 성()이라는 말을 엄밀하게 두 가지 다른 뜻으로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맹자가 말하는 인간의 본성(도덕적 욕구, 도덕적 능력)은 인간과 동물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동물적 측면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금수의 성과 구별되어 오직 인간만의 본질을 이루고 있는 요소를 가리킨다. “사람이 금수와 다른 점은 극히 적다. 서민은 이(인륜)를 흘려버리나 군자는 이를 보존한다. 임금이 서물(庶物)에 밝고 인륜에 자세한 것은, 그가 인의(仁義)에 말미암아 행한 것이지 인의를 억지로 행한 것이 아니다.( 離婁 下, 人之所以異於禽獸者幾希 庶民 去之 君子 存之 舜 明於庶物 察於人倫 由仁義行 非行仁義也)이러한 맹자의 입장은 고자(告子)태어난 그대로를 성이라 한다는 생지위성론(生之謂性論)에 대한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고자는 태어나면서부터 갖추어져 있는 것을 성이라 본다. 그리하여 그는 식욕과 색욕 등 생리적 감각적 욕구를 성이라 보고, 이는 인간과 동물이 하등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고자는 사람을 포함한 모든 동물의 본성은 다 같기 때문에, 생명 현상으로서의 성은 선도 악도 아니라는 성무선악설(性無善惡說)을 주장하게 된다.

 

이런 입장에서 고자는 버드나무와 여울물을 비유하여 맹자의 성선설을 비판한다. “인간의 본성은 맴도는 여울물과 같다. 동쪽으로 트면 동쪽으로 흐르고, 서쪽으로 트면 서쪽으로 흐른다. 인간의 본성을 선함과 선하지 못한 것으로 구분할 수 없는 것은, 마치 물에 동쪽과 서쪽의 구분이 없는 것과 같다.(告子 上, 性猶湍水也 決諸東方則東流 決諸西方則西流 人性之無分於善不善也 猶水之無分於東西也)” 이런 고자의 비판에 대해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고자가 생각하는 생물학적 본능보다 더 풍부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물은 참으로 동서의 구분이 없지만 상하의 구분도 없겠는가? 인간의 본성이 선한 것은 마치 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과 같다. 따라서 사람은 선하지 않음이 없고, 물은 아래로 내려가지 않음이 없다.(告子 上, 水有信之無也分於東西 無分於上下乎 人性之善也 猶水之就下也 人無有不善 水無有不下)”

 

맹자는 고자와 달리 인간만이 특이하게 갖고 있는 특성(선천적 도덕 능력)을 진정한 의미에서 성이라고 보았다. 이런 인간만이 가진 본성은 인의(仁義) 이외에도 예와 지가 있다. “자기의 성정에 따라 행한다면 선할 것이다. 만약 선하지 않게 된다 해도 그것은 그 본바탕이 나쁜 탓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측은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며,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며, 공경하는 마음을 가지며, 옳고 그름을 가리는 마음을 가진다. 이 측은지심은 인이요, 수오지심은 의요, 공경지심은 예요, 시비지심은 지다. 인의예지는 밖에서부터 나에게 이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告子 上, 乃若其情則可以爲善矣 乃所謂善矣 若夫爲不善 非才之罪也 惻隱之心 人皆有之 羞惡之心 人皆有之 恭敬之心 人皆有之 是非之心 人皆有之 惻隱之心 仁也 羞惡之心 義也 恭敬之心 禮也 是非之心 智也 仁義禮智非由外鑠我也 我固有之也)” 래서 맹자에게는 측은(惻隱)한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羞惡)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사양(辭讓)하는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고, 옳고 그름을 가리는(是非) 마음이 없으면 사람이 될 수 없다. 이런 마음은 한 마디로 남에게 모질지 못하는 마음(不忍人之心)’이다. 즉 남의 고통을 차마 보지 못하는 마음이다. 이런 마음이 없으면 사람은 금수이지 사람이 아닌 것이다.

 

맹자는 인의예지의 실마리가 되는 사단(四端) 즉 인의예지라는 본성이 발현된 정감이 본디 인간의 고유한 능력으로 주어졌다고 말한다. “우물에 막 빠지려 하는 어린이를 본 사람이면 누구나가 놀랍고 측은한 마음을 가질 것이니, 이는 그 부모의 호감을 사기 위해서도 아니요, 이웃 사람과 친구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서도 아니다.(公孫丑 上, 今人乍見 孺子將人於井 皆有怵惕惻隱之心 非所以內交於孺子父母也 非所以要譽於鄕黨朋友也 非惡其聲而然也)” 이것은 인간이 타고난 본능적인 측은지심의 결과 때문이다. 맹자는 경험을 기초로 해서 귀납적으로 성선설을 도출하고 있다. 그리하여 인간은 이런 사단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인의예지라는 네 가지 본성을 갖게 되며 따라서 인간의 본성은 선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맹자는 ()’이라는 말을 어떤 의미로 쓰고 있는가? 그는 선을 인성과 가장 완전하게 조화를 이루는 요소라고 생각했다. 그는 소화 기관인 위에 고통을 주는 음식은 선한 음식이 아니라고 말한다. 건초는 소의 먹이로서는 선이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그렇지 못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간의 본성에 적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양혜왕 상에서 맹자는 자기의 성정에 따라 행한다면 선해질 수 있다. 그것이 곧 이른바 선이라고 말한다. 반대로 악은 본성을 내버려두는 데서 생긴다. 즉 본성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악이다. 이런 점에서 맹자의 성()과 선()은 서로를 설명함에 있어서 순환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맹자에 따르면 이런 본성은 하늘이 우리에게 부여한 것이다. “()은 하늘의 도()이고, 성을 생각하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離婁 上, 誠者 天之道也 思誠者 人之道也)” 인간은 이런 천도에 순응하고 복종하는 한에서만 오직 인간이라는 자격을 받을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의 도덕 원리는 또한 천의 형이상학적 원리이기도 하다. 천이 부여한 인간의 본성은 모든 사물의 이치가 갖추어져 있기 때문에(盡心 上, 萬物 皆備於我), 인간의 성품은 완전할 뿐만 아니라, 만물의 본질을 포함하는 일종의 소우주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기 본성의 극진한 계발을 통하여 천을 알 뿐만 아니라 천과 합일될 수 있다. 하늘을 아는 것을 통해서 천과 합일된 상태를 실현하려는 사람이 맹자가 말하는 대인(大人)이다. 대인은 수양을 통하여 자기를 바로 잡으니, 의도하지 않아도 그 주변의 모든 사람과 사물까지도 저절로 감화되어 바르게 되는 그런 인격자를 말한다.(盡心 上, 有大人者 正己而物正者) 그러기 위해서 대인은 먼저 자기의 본심을 간직하고 자기의 본성을 기른다. “자신의 마음을 다 발휘한 사람은 자신의 본성을 알게 되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 자신의 마음을 보존하고 본성을 기르는 것이 바로 하늘을 섬기는 방법이다. 단명과 장수에 상관하지 않고 오직 수신함으로써 천명을 기다리는 것이 곧 안심입명의 방법이다. (盡心 上, 盡其心者 知其性也 知其性則知天矣 存其心 養其性 所以事天也 夭壽不貳 修身以俟之 所以立命也)”

 

자기의 본성을 기른다는 것은 인간의 본질적인 욕구인 인의예지를 확충한다는 의미이다. 맹자는 호생불해가 무엇을 선이라 하느냐고 묻자, “하고자 하는 것을 선(盡心章下, 可欲之謂善)” 이라고 답변한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오관의 욕망을 채우려고도 하고, (), (), (), (), 신령(神靈_을 이루려고도 한다. 오관의 욕구는 일차적, 본능적, 자연적 욕구인 반면, 후자의 욕구는 이차적, 문화적, 이성적 욕구라고 할 수 있다. 맹자가 의도한 선한 욕구인 이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길이 대체(大體)를 양()하는 길이다. 이에 비해 감관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소체(小體)를 양하는 길이다. 소인은 주로 이것에 빠져 있는 사람을 일컫는다. “한 몸에는 귀한 부분과 천한 부분이 있고, 큰 부분과 작은 부분이 있는데, 작은 부분 때문에 큰 부분을 해치지 말고, 천한 부분 때문에 귀한 부분을 해치지 말아야 한다. 그중 작은 부분을 기르는 사람은 소인(小人)이 되고, 큰 부분을 기르는 사람은 대인(大人)이 된다.(告子 上, 體有貴賤 有小大 無以小害大 無以賤害貴 養其小者爲小人 養其大者爲大人)”

 

인의예지의 확충이란 인간 심리의 깊숙한 밑바닥에 숨어있는 사단(四端)을 드러나게 하여 개인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이것을 실현시키는 것을 말한다. “무릇 나에게 사단이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모두 확충할 줄을 알 것이다. 그러면 선한 실마리가 마치 불이 타오르고 샘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진실로 그것을 확충할 수 있다면 사해(四海)를 보유할 수 있을 것이요 그것을 확충하지 않으면 부모조차 섬기지 못할 것이다. (公孫丑 上, 凡有四端於我者 知皆擴而充之矣 若火之始然 泉之始達 苟能充之 足以保四海 苟不充之 不足以事父母)” 이처럼 타고난 도덕적 성향이 계발되어 대체를 확충한 사람은 타인의 불행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불인인지심(不忍人之心)을 갖게 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즐기는 것을 즐거워하고, 모든 사람이 근심하는 것을 같이 근심하는 동고동락하는 정신, 즉 큰 용기의 정신이다.

 

이런 맹자의 성선설에 대하여 순자는 성악설을 주장한다. 그는 분명하게 인간의 본성은 악하다. 인간이 선하게 됨은 인위()의 덕분이다(荀子, 性惡篇, 人之性惡 其善者僞也라고 밝힌다. 순자는 그 근거를 제시한다. “인간의 본성은 날 때부터 이익을 좋아하는바, 이 본성을 좇기 때문에 쟁탈전이 발생하고 사양지심은 없어진다. 날 때부터 질투와 증오심이 있는바, 이 본성을 좇기 때문에 남을 해치고 비방하는 행위가 생기고 중직과 신실의 도덕은 없어진다. 날 때부터 눈과 귀의 감각적 욕망이 있어서 고운 목소리와 미색을 좋아하는바, 이 본성을 좇기 때문에 음란이 발생하고 예절, 의리, 법식, 사리 등은 없어진다. 그런즉 인간이 본성을 따르고 본래의 정욕을 좇으면 반드시 쟁탈전이 발생하고, 자연히 신분질서가 무너지고, 사회기강이 문란하게 되어, 결국 흉포한 난동에 귀착한다.(性惡篇, 今人之性 生而有好利焉 順是故爭奪生 而辭讓亡焉 生而有疾惡焉 順是故殘賊生 而忠信亡焉 生而有耳目之欲 有好聲色焉 順是故淫亂生而禮義文理亡焉 然則從人之性 順人之情 必出於爭奪 合於犯分亂理 而歸於暴)”

 

순자는 맹자와 형이상학이 다르다.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하늘로부터 왔다고 보았다. 그러나 순자는 그런 하늘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는 노장(老壯)의 영향을 받아서 자연지천(自然之天)’을 주장한다. 장자는 자연 속에 상제니 운명이니 도덕적 원리니 하는 개념을 제거했다. 단지 자연은 기계적인 것으로 부득이한 것으로 보았다. 순자도 마찬가지이다. “자연계의 운행은 그 자체의 법칙이 있다. 결코 사회에 요와 같은 선인이 있어서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사회에 걸과 같은 악인이 있어서 소멸하는 것도 아니다. 안정과 태평을 이룩하여 천도에 응하면 길하고, 혼란으로써 천도에 응하면 흉할 따름이다. (天論, 天行有常 不爲堯存 不爲桀亡 應之以治則吉 應之以亂則凶)” 순자는 이런 자연관을 가지고 있으므로 도덕의 원천을 자연으로부터 끌어올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위()를 중시한다. 여기서 위는 참과 대립되는 거짓이라는 뜻이 아니고, 인위(人爲)를 의미한다. 인위란 자연과 대비되는 인간의 능동적인 작위(作爲), 문화와 예를 통한 소양과 품위를 일컫는다.

 

순자는 인간이 금수와 다른 까닭은 맹자처럼 모든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불인인지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예의를 알 수 있는 자질이 있고, 예의를 실천할 수 있는 도구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런 재능으로 인간은 누구나 인위적인 예의를 배우고 익히면 우 임금 같은 성인이 될 수 있다. “거리의 뭇 사람 가운데 전일하고 투철하게 선을 누적한 사람이 바로 성인이다. 선이란 추구해야 얻어지고, 도모해야 성취되고, 누적해야 고매해지고, 투철해야 성인이 된다. 따라서 성인이란 노력을 누적한 결과이다. 사람이 김매고 밭가는 일을 누적하여 농부가 되고, 깎고 다듬는 일을 누적하여 공인이 되고, 재화를 매매하는 일을 누적하여 상인이 되듯이, 예절과 의리를 누적하여 군자가 된다.(儒效, 途之人百姓 積善而全盡 爲之聖人 彼求之而後得 爲之而後成 積之而後高 盡之而後聖 故聖人也者 人之所積也 人積耨耕而爲農夫 積斲削而爲工匠 積反貨而爲商賈 積禮儀而爲君子)”

 

지금까지 맹자와 순자를 중심으로 유학의 선악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맹자와 순자가 살았던 전국시대(戰國時代)는 공자의 춘추시대의 연장으로서, 동양역사상 가장 혼란스럽고 병든 사회였다. 그야말로 악이 홍수처럼 휩쓸던 시대였다. 힘으로 천하를 운영하지 말고, 도덕으로 이상사회를 추구한 유학 안에서, 맹자와 순자는 인간의 본성을 보는 관점이 대립하고 있다. 맹자는 인간에게 내재한 선한 사단(四端)을 확충하는 것으로 악을 제압하려고 했고, 순자는 거꾸로 인간의 본성은 악하니 오히려 인위적인 것으로 바로 잡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맹자는 천이 부여한 성선(性善)을 회복하고자 하는 되찾음의 복권적(復權的) 의미가 있다. 순자는 스승과 법도에 의한 교화와 예절과 의리를 바탕으로, 인위적인 교도를 실시하여야, 사양지심이 생기고, 이로써 악을 극복할 수 있다는 만듦의 조형적 의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