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2)

이효범 2021. 8. 11. 06:29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선에 대하여, 12)

 

o 선에 대하여(12)

 

    구녕  이효범

 

영국의 현대 윤리학자 무어(G.E.Moore, 1873-1958)는 버트란트 러셀과 함께 캠브리지 대학교의 철학 교수였다. 그는 윤리학 원리(Principia Ethica)라는 책을 썼다. 이 책에서 그는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규범적 물음을 다루지 않고, 이런 물음을 다룬 기존 규범 윤리설 속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는, ‘(good)’이라는 개념의 의미를 정의하려고 하였다. 기존 윤리학에서 다루고 있는 윤리적 개념들을 다시 분석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무어의 윤리학은, 분석윤리학 혹은 메타윤리학(meta ethics)이라고 불린다. 이런 경향은 현대 영국과 미국의 윤리학의 흐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우선 무어는 선을 정의 내림에 있어 기존의 정의들을 검토한다. 그리고 그런 정의들은 모두 하나같이 타당하지 않다고 비판한다. 보통 사전에 나오는 선의 정의는, 사람들이 선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하는 것을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진정한 정의가 될 수 없다고 배척한다. 그런 다음 기존 윤리설에서 주장되는, ‘선은 즐거움을 주다’, ‘선은 욕구되다’, ‘선은 좀 더 많이 진화되다같은 정의들도 진정한 정의라고 볼 수 없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어떤 사물이 즐거움을 주며 또 욕구되고 있음을 엄연한 사실로서 믿으면서도, 그러나 그것이 좋은 것은 못된다고 믿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X는 즐거움을 주기는 하나 좋은 것은 못 된다는 발언은 자기모순이 아니다. 이것이 무어가 말하는 열린 물음 논변(open question argument)’이다. 진정한 정의가 성립하려면 물음에 열려서는(open to question) 안되고 닫혀져야(closed to question) 한다. 선은 즐거움을 주다라는 정의가 진정한 정의라면, “X는 즐거움을 주기는 하나 과연 좋은가?”라는 질문이 어불성설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총각은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이다라는 정의가 있다. 이 정의에 대해 “X는 총각인데 과연 결혼하지 않은 성인 남자인가?”라는 물음은 가능하지 않다. 이런 물음은 닫혀졌고, 그러기 때문에 이런 정의는 진정한 정의라는 것이다.

 

또한 무어는 선은 도덕적 시인(moral approval)같은 특수한 감정을 일으킨다라는 정의도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어떤 좋은 사태(事態)는 비록 그 사태에 대하여, 그 특수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전혀 없다 하더라도, 그 사태는 여전히 그 자체로서 좋으리라는 것은 의심 없이 명백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가치가 실재한다는 입장과 가치의 객관주의는, 무어의 주장처럼 확실한 것은 아니다. 사람의 가치 인식을 초월하여, 가치가 그 자체로 실재하고 있는가는 아직도 논쟁 중의 문제이다.

 

무어는 기존의 선에 대한 정의들을 비판한 후에, 실망스럽게도 선은 정의할 수 없다고 결론한다. “만약 내가 선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의 대답은 선은 선이다라는 것이며, 그것이 대답의 전부이다. 그리고 내가 선이란 어떻게 정의되는가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선이란 정의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요, 그것이 내가 말해야 할 전부라고 대답할 것이다.”(G.E.Moore, Principia Ethica,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03, p.6) 그러면 무어는 왜 선을 정의할 수 없다(indefinable)고 말하는가? 왜냐하면 선은 더 이상 분석할 수 없는 궁극적이요 단순한 관념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람(man)은 합리적 동물(rational animal)’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사람은 단순(simple)하지 않고, 복합적(compound) 이기 때문에, 그 부분적인 요소들로 세분화하여, 사람의 고유한 특징과 속성에 관하여 다양한 형태로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선처럼 노랑(yellow)’도 단순하기 때문에 정의할 수 없다. 만일 노랑을 사람이 볼 수 있는 일정한 파장을 가진 색깔이라고 정의한다면, 이것은 노랑에 대한 기술(description)이지 정의는 아니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는 대상물이 아니라 하더라도, 우리들이 정의할 수 있는 모든 대상물은 복합적인 대상물이다. 그리고 이 같은 대상물은 부분적인 요소로 구성되어 있고, 더 이상 정의할 수 없는 가장 단순한 요소들로 세분화할 수 있다. 그러나 노랑과 선은 복합 관념이 아니다. 이 두 가지 관념은 단순 관념이며 더 이상 정의할 수 없는 관념들이다.” (앞의 책, p.7) 노랑이라는 개념이 단순하기 때문에, 노랑꽃을 보고 다만 저것이 노랑이라고 가리킬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의 관점은 노랑이 하나의 단순 관념이듯이, 선도 하나의 단순 관념이라는 것이다. 노란 것이 무엇인지 모르는 사람에게 어떤 방법으로도 그것을 설명할 수 없듯이, 선이 무엇인가를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앞의 책, p.7)

 

그러나 좋음은 노랑처럼 좋은 사물의 자연적 특성(natural properties)은 아니다. 그것은 감각이나 경험을 할 수 없는 것으로서 비자연적(non-natural) 성질이다. 즉 그 사물의 모든 다른 특성들의 필연적인 결과로서 그 사물에게 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좋음은 좋은 것들(good things)과는 달리 비자연적 성질, 즉 형이상학의 세계에 속하는 실재이다. 무어는 가치실재론(realistic theory of value: 가치는 시공의 제약을 받지 않으며 주관(主觀)의 태도로 선악의 가치를 변경시킬 수 없다. 그 자체 이외의 어떤 진리로부터도 사물의 좋고 나쁨을 추론하지 못한다)을 주장한다. 그는 가치는 시간과 공간 안에 존재하지 않으며, 지각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고 본다. 그러므로 시공 안에 존재하는 좋은 것들하고 좋음 그 자체(goodness)는 구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무어는 좋음은 좋은 것들 하고 구별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좋은 것들이 가지고 있는 어떤 다른 자연적 특성과 좋음을 구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좋은 것들(우정, 건강, 명예, 자유, 평화)좋음을 가지고 있는 한편 즐거움을 준다라는 성질도 아울러 가지고 있다. 좋은 것들이 좋음즐거움을 항상 아울러 가지고 있다고 해서 이 두 가지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쾌락주의자들처럼 선은 쾌락이라고 주장하는 경우에는, 비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동일시는 논리적 오류에 빠진다. 이것이 자연론적 오류(自然論的 誤謬, naturalistic fallacy)이다. 이것은 이라는 가치어(value terms)쾌락이라는 비가치어(non-value terms)로써 정의하려는 시도 혹은 가치판단을 사실판단으로 번역하려는 시도 안에 깃든 논리적 난점을 가리킨다. 자연적인 사실이 가치적인 세계와 구별되어야 한다는 점(is-ought gap)은 이미 흄(David Hume)에 의해 지적되었다. 그는 1789년에 나온 인성론(Treatise of Human Nature)에서 말한다. “나는 이와 같은 추론에 어떤 중요성을 갖는다고 판단되는 관찰을 첨가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알고 있는 도덕 체계는 그 어느 것이건, 그 저자가 얼마 동안 일상적인 추론 방법을 사용해 나아가다가 결국에 가서 신의 존재를 입증하거나 인간사(人間事)에 관한 소견을 내세운다. 그런데 나는 그러한 주장들이 모두 ‘~이다‘~가 아니다라는 일상적인 연사(連辭)로 명제를 맺지 않고 갑자기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로 끝맺고 있다는 것을 보고 매우 놀라게 된다. 이는 알아차리기 어렵지만 매우 중요한 변화이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해야 한다’,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새로운 관계 또는 단언을 나타내는 것이기에 제대로 관찰 설명되어야 하며, 동시에 그와 같은 새로운 관계가 전적으로 다른 관계로부터 어떻게 연역되는지에 대한 이유(이는 거의 알아차리기 힘든데)가 제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III11절의 마지막) 흄이 지적한 이런 난점을, 무어는 자연론적 오류로 명료화하고 있다.

 

그래서 무어에 의하면 좋음은 추리에 의해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파악할 수밖에 없다. 이것이 가치나 윤리의 직각설(直覺說)이다. “아무런 증거도 댈 수 없다. 그 자체 이외의 어떤 진리로부터도 사물의 좋고 나쁨을 추론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