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15. 유마힐)
유마힐(維摩詰)은 ‘Vimalakirti’의 음역으로 ‘깨끗한 이름(淨名)’, ‘때 묻지 않은 이름(無垢稱)’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고대 인도의 상업 자유도시인 바이살리에 살았던 대부호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의 깊은 뜻에 통달해 있었고, 삼계에 대한 집착을 여의었으며, 처자를 거느리고 세속에 살고 있으면서도, 청정한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았던 불교의 거사(居士)였다. 그가 소위 설했다는 경이 『유마힐소설경(維摩詰所說經)』즉 『유마경(維摩經)』이다. 그러므로 이 경은 유마힐이 증득한 불가사의한 해탈법문을 펴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이 경에는 대승불교의 진수가 녹아있지만 여기서는 환경에 관련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이 경은 유마힐이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 하나의 방편으로 병을 가장하고 누워 있으면서, 석가모니 제자들과 보살들이 문병하러 온 것을 기회로 불법에 대하여 대화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처음에 부처님은 유마가 아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사리불(舍利弗) 등 십대제자들에게 문병가기를 권유한다. 그러나 그들은 수행의 깊이에 있어서 유마거사를 상대할 자격이 없다고 거절한다. 마지막에 부처님은 가장 지혜로운 문수보살(文殊菩薩, 文殊師利)에게 권유한다. 문수보살은 “저도 유마거사를 상대할 법력은 없지만 세존의 성지를 받들어 문안을 가겠습니다.”하고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다. 그러자 사절했던 사람들도 유마거사와 문수보살의 놀라운 법담을 듣고자 모두 동행하겠다고 나선다.
유마의 거처에 도착한 문수보살은 먼저 세존의 위로의 말씀을 전하고, 병의 원인과 그 차도에 대해 질문한다. 이에 유마는 답한다. “이 세상에 어리석음이 남아 있는 한 그리고 존재에 대한 집착이 남아 있는 한, 제 아픔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일체중생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만약 모든 중생이 병에 걸리지 않고 있을 수 있다면 그때 나의 병도 없어질 것입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생사(윤회의 세계)에 들었고, 생사가 있는 곳에 병은 있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중생이 병을 떠날 수 있으면 보살도 병이 없을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장자에게 외아들이 있어 그 아들이 병들면 그 부모도 병들고, 만약 아들의 병이 나으면 부모도 낫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모든 중생을 내 자식과 같이 사랑하고, 중생이 병을 앓을 때는 보살도 병을 앓으며,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또 이 병이 무엇으로 인하여 일어났는가 하면, 보살의 병은 광대한 자비(慈悲)로부터 생긴 것입니다.”
여기서 나오는 보살(菩薩, Bodhisattva)은 대승불교의 이상적 인간상이다. 그 뜻은 ‘깨달음을 구해서 수도하는 중생’이지만, 보통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은, 본인은 이미 깨달았지만 이기적으로 혼자만 피안으로 넘어가지 않고, 아직 고통 속에 있는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큰 서원을 발하여, 부처가 될 권리를 스스로 유보하고, 윤회의 세계에 머물러 하화중생(下化衆生)하는 존재를 말한다. 보살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대승불교는 소승불교와 다르다. 보살은 모든 중생이 다 해탈을 이룬 다음에 마지막으로 피안에 들고자 한다. 그런 마음이 바로 자비이다. 자비란 일체 중생에게 즐거움을 주고(與樂 ), 고통을 제거(拔苦)하려는 마음이다. 즉 모든 존재를 내 몸처럼 사랑하는 동체대비심(同體大悲心)이 자비이다.
부처님은 인간의 실존적 모습을 고통(dukkha)으로 파악했다.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생(生)이 고요, 노(老)가 고요, 병(病)이 고요, 사(死)가 고라는 것이다. 또한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진다는 것이 고(애별리고, 愛別離苦)요, 미워하는 사람과 원수를 꼭 만나게 되어 있다는 것이 고(원증회고, 怨憎會苦)요, 갖고자 하나 가질 수 없음이 고(구부득고, 求不得苦)요, 오온에 집착하는 것이 고(오취온고, 五取蘊苦)라는 것이다. 이런 구체적인 고를 넘어 불교에서는 모든 것이 조건지어진 것이 고요, 변화무상한 것이 고요, 불안정한 것이 고요, 끊임없이 생성변천을 되풀이하는 것이 고요, 더 나아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고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 세상은 불타는 집과 같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런 위기도 모르고 인간은 현실의 조그만 쾌락에 취해서 실상을 잊는다. 인간의 실상이 어떤가는 ?비유경(比喩經)? ‘흑백이서(黑白二鼠)’에 잘 나타나 있다. “길 잃은 나그네가 넓은 광야를 헤매고 있다. 방향도 잡지 못하고 어디론가 길을 걷고 있는데 난데없이 광폭한 코끼리가 나타나 뒤쫓아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정신없이 도망치던 나그네는 깊은 우물 하나를 발견한다. 우물가에는 칡넝쿨이 우물 속으로 늘어져 있어 나그네는 코끼리를 피하기 위해 칡넝쿨을 붙잡고 우물 속으로 피한다. 그런데 우물 바닥에는 독룡이 혀를 너울거리고 쳐다보고 있고, 우물 벽 사방으로는 네 마리의 독사가 나그네를 잡아먹으려고 한다. 설상가상으로 검은 쥐와 흰쥐가 번갈아 가며 붙잡고 있는 칡넝쿨을 갉아먹고 있다. 그런데 마침 칡넝쿨 위에는 벌꿀이 있어서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있다. 이런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나그네는 벌꿀 맛에 도취되어 주위의 위기 상황을 잊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이 인간의 실제 모습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광야를 헤매는 나그네는 미망(迷妄)한 인간의 생활을, 미친 코끼리는 무상(無常)을, 빈 우물은 생사의 샘을, 독룡은 죽음의 그림자를, 네 마리의 독사는 인간 몸을 구성하고 있는 지(地)․수(水)․화(火)․풍(風) 사대를, 칡넝쿨은 생명선을, 검은 쥐와 흰쥐는 밤과 낮을, 다섯 방울의 꿀물은 재물욕(財物欲)․색사욕(色事欲)․음식욕(飮食欲)․명예욕(名譽欲)․수면욕(睡眠欲)이라는 다섯 가지 욕락을 비유한 것이다. 이 비유는 인간이 죽을 수밖에 없는 고통스런 존재지만, 이를 인식하지 못하고 세속적인 쾌락 속에서 행복을 추구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인간은 무지하여 이렇게 거꾸로 된 가치관과 잘못된 망상 속에서 오욕락을 추구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을 불교에서는 범부(凡夫)나 중생(衆生)이라고 부른다. 이런 범부나 중생은 일시적인 즐거움이 가능할진 몰라도 궁극적으로는 윤회를 벗어날 수 없고, 고통을 떠나 진정으로 행복을 맛볼 수는 없다.
그러므로 앞에서 보았듯이, 자비심이 충만한 보살(거사) 유마는 말한다. “일체중생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 보살에게 중생은 자식과 같다. 자식이 아픈데 아프지 않을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자식이 나으면 부모의 병이 씻은 듯이 낫듯이, “중생의 병이 나으면 보살도 낫습니다.” 그러면 보살의 병을 가져온 중생의 병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가? 유마는 말한다. “무엇을 병의 근원이라고 하는가 하면, 대상에 대하여 마음이 작용하는 것으로서, 마음이 작용할 때 그것이 병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 중생의 병은 실체가 없다. 그것은 무명(無明, 無知)에서 오는 것이다. 무지한 중생은 세상의 대상을 고유한 개체로 인식한다. 그리고 그 개체에 집착하여 얽매이게 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돈에 집착하여 얽매이면 돈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듯이, 결국 세상에 집착하여 얽매이면 인간은 고통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하면 이런 얽매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생각(二見 )을 떠나는 것이며, 상대적인 생각이라는 것은 주관(主觀, 內見)과 객관(客觀, 外見)으로서, 이들을 떠나는 것이 모든 것에 얽매이지 않는 것입니다.” 나라는 주관도 사실은 실체가 아니다. 인식의 주체인 나라는 존재는 단지 색,수,상,행,식의 다섯 가지 요소가 쌓인 존재(五蘊)에 불과하다. 무아(無我)인 셈이다. 그리고 객관적 대상도 연기(緣起)로 되어 있는 공(空)한 존재들이다. 공한 면에서 양자는 평등하다. 보살은 이런 깨달음의 진리를 중생에게 알려주어 중생을 고통에서 구제해야 한다. 그래서 유마는 문병 온 문수보살에게 일갈한다. “병에 걸린 보살은 일체 법에 대하여 반드시 다음과 같이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몸도 마음도 병도 모두가 덧없고, 고통이며, 공이며, 무아라고 이해하는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몸에 지닌 병을 굳이 피하지 않고 세상에 태어나며, 기꺼이 윤회 가운데 뛰어들어 중생들의 이익을 위해 봉사하는 그것이 바로 방편입니다. 또한 몸과 마음과 병 가운데 어떤 것이 다른 것보다 더 새롭다거나 더 낡았다고 생각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몸과 마음과 병이 생기는 것을 꺼리지 않고 적멸 가운데 안주하려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방편입니다. 문수보살이시여, 병에 걸린 보살은 자신의 마음을 반드시 이와 같이 꿰뚫어, 알아볼 것이 있다든가 없다든가 하는 데에 마음을 써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굳이 꿰뚫어 알아볼 것이 없는 데에 마음을 쓰면 그것은 곧 범부(凡夫)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반대로 굳이 꿰뚫어 알아볼 것이 있는 데에 마음을 쓰면 그것은 곧 성문(聲聞)의 짓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꿰뚫어 알아보려는 일에도 그렇지 않은 일에도 마음을 쓰지 않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인 것입니다.”
이런 보살의 행실은 참으로 다양한다. 그것을 유마는 길게 설명하고 있다. 일부만 발췌하면 이렇다. “범부의 행도 아니고 성현의 행도 아닌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윤회를 거듭하면서도 정작 번뇌를 온전히 여읜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열반에 이르렀지만 결코 완전한 열반에 들지 않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네 가지 마(四魔)를 가까이하면서도 정작 모든 마의 영역을 초월하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사람들로 왁자지껄한 장소를 즐겨 찾지만 정작 번뇌와 혼돈을 훌쩍 뛰어넘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세상을 훌쩍 벗어나기를 좋아하지만 결코 몸과 마음을 감추지 않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삼계에 머무르면서도 결코 법계(法界)에 치우지지 않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공하다는 이치를 잘 알면서도 덕 쌓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무상의 이치를 잘 알면서도 모든 사람들을 해탈시키고자 궁리하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무원의 이치를 잘 알면서도 결심한 대로 굳이 윤회의 세계에 몸을 나타내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어떠한 존재도 본래부터 청정하다는 사실을 순순히 받아들이면서 모든 중생이 원하는 대로 따라 주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어떠한 불국토(佛國土)에도 종말의 시기와 생성의 시기는 없으며, 그 이유가 허공을 본성으로 하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정작 온갖 장식으로 꾸며진 불국토의 눈부신 광경을 자세히 보여 주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행입니다.”
불교는 근본적으로 차디찬 종교이다. 자기가 지은 업을 누가 대신 해결해줄 수 없고, 무쏘의 뿔처럼 홀로 외로이 해탈의 길을 걸어가야 하는 것이 불교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부처가 될 성품(佛性)을 가졌다고는 하지만, 사람의 근기(根機)에는 차이가 있다. 상근기를 가진 사람은 스스로 정진을 통해 깨달음을 얻겠지만, 하근기를 가진 사람은 혼자 힘으로 그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이타(利他)를 중시하는 대승불교에 오면 보살들의 도움이 등장한다. 우리에게 가장 친근한 천수천안관세음보살이 그 대표적이다. 우리가 도움을 간청하면 들어주시는 보살이다. 우리는 이런 보살의 도움으로 윤회를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범부로서 이번 생애에 한순간에 해탈이 어렵다면 끊임없이 선업을 닦아야 한다. 보살의 자비심처럼 중생도 자비심을 발휘하여 악을 짓지 않고 선을 받들어 행하여야 한다.
자비심을 가진 불자가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 할 계율은 다른 생명체를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불살생(不殺生)은 오계(五戒)의 첫 번째 계율이다. 법장은 『범망경보살계본소(梵網經菩薩戒本疏)』에서 불살생의 이유를 말하고 있다. “생명을 끊는 것은 업도(業道)를 무겁게 하기 때문이고, 대비심을 어겨서 해치기 때문이며, 육도의 모든 중생이 모두 나의 부모인데 길러준 은혜를 등지는 것이기 때문이고, 수승한 연(緣)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중생은 불성이 있어서 모두 장래에 법기(法器)가 될 것이기 때문이며, 보살의 무외시(無畏施)를 어겨서 잃기 때문이며, 사섭행(四攝行)을 어그러지게 하기 때문이고, 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며, 은혜에 보답하기 위함이고, 법이 그러하기 때문이니, 삼세제불의 가업의 법이 그러하니 해칠 생각을 하지 않고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정법념처경(政法念處經)』에는 “어떻게 살생하지 말아야 하는가? 혹 길을 가다가 개미, 지렁이, 두꺼비, 기타 곤충을 보더라도 그것들을 피해 멀리 돌아서 간다. 그것은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들을 보호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되어 있고, 또 『대살차니건자소설경(大薩遮尼乾子所說經)』에는 “도시나 촌락, 산림 그리고 개울이나 동산, 궁전이나 누각, 모든 도로와 교량, 자연적인 동굴과 일체의 농작물, 꽃들과 열매, 초목과 숲을 태워서는 안 되며 파괴해서는 안 된다. 물을 빼지 말아야 하며 식물을 자르거나 베어서는 안 된다. 그 모든 것에는 다 생명을 가진 짐승들과 곤충들이 살고 있으므로 그 죄 없는 뭇 생명들을 상해하거나 그 목숨을 해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라고 쓰여 있다. 그리고 이것에 더 나아가 『정법념처경(政法念處經)』에는 적극적으로 생명을 살리는 방생(放生)의 선(善)을 말하고 있다. “선이라고 하는 것은 살생을 떠나 세상의 모든 중생을 거두어줌으로써 그들에게 두려움이 없게 하는 것이다. (---) 모든 존재는 목숨으로 근본을 삼고 사람은 모두 제 목숨을 보호한다. 불살생은 곧 목숨을 주는 것이며, 만약 목숨을 준다는 것은 모든 즐거움을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제일가는 보시는 목숨을 주는 것이니,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은 천상에 태어나는 원인이 된다. 가장 훌륭한 계율은 목숨을 주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본적인 덕목은 진정한 불자는 무소유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출가한 남자 수행자를 ‘비구(bhikkhu)’라고 부른다. 이 말은 빌어서 사는 수행자인 ‘걸사(乞士)’를 의미한다. 비구는 위로는 부처님의 법을 빌고 아래로는 일상생활의 모든 것을 빌어서 수행한다. 철저히 무소유의 삶의 사는 존재이다. 이들에게 소유가 허락된 물건은 6개(비구 6물)이다. 큰 옷, 겉옷, 속옷, 밥그릇(발우), 물거르개, 좌구가 그것이다. 이런 무소유의 정신이 『대품반야경(大品般若經)』에 잘 나타나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할진데 마땅히 이와 같이 사유하여야 하나니, 무엇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어찌하여 그 이름을 반야바라밀이라 하며 누가 반야바라밀이라 하는가? 만약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할진데 그(수행)법은 무소유이며 불가득이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이니라.” 또한 『숫타니파타』에는 이런 구절도 있다. “집착 없이 세상을 걸어가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자기를 다스릴 줄 아는 사람/ 모든 속박을 끊고/ 괴로움과 욕망이 없는 사람/ 미움과 잡념과 번뇌를 벗어 던지고/ 맑게 살아가는 사람/ 거짓도 없고 자만심도 없고/ 어떤 것을 내 것이라 집착하지도 않는 사람/ 이미 강을 건너 물살에 휩쓸리지 않는 사람/ 이 세상이나 저 세상이나 어떤 세상에 있어서도/ 삶과 죽음에 집착이 없는 사람/ 모든 욕망을 버리고 집 없이 다니며/ 다섯 가지 감각을 안정시켜/ 달이 월식에서 벗어나듯이 붙들리지 않는 사람/ 모든 의심을 넘어선 사람/ 자기를 의지처로 하여 세상을 다니고/ 모든 일로부터 벗어난 사람/ 이것이 마지막 생이고 더 이상 태어남이 없는 사람/ 고요한 마음을 즐기고/ 생각이 깊고/ 언제 어디서나 깨어 있는 사람”
무소유와 관련해서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의 일화가 인구에 회자된다. “나는 가난한 탁발승(托鉢僧)이오. 내가 가진 거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요포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 이것뿐이오.” 이 말은 1931년 마르세이유 세관원에게 소지품을 펼쳐 보이면서 한 말이다. 간디는 아무 것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에서 인도를 독립시킬 수 있었다. 그래서 무소유를 강조한 법정스님은 『영혼의 모음』에서 말한다. “아무 것도 갖지 않을 때 비로소 온 세상을 갖게 된다는 것은 무소유(無所有)의 역리(逆理)”이다. 이렇게 불교가 기본적으로 추구하는 불살생과 무소유의 삶은, 현대의 환경문제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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