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10. 개릿 하딘)
공유지의 비극으로 알려진 개릿 하딘(Garrett Hardin)은 생물학자이다. 그는 지구라는 행성이 위기에 처하는데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한 것은 인간중심의 윤리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미국이 강조한 프론티어나 카우보이 윤리가 문제라는 것이다. 이런 윤리는 인간은 자연의 지배자이고, 인간 이외의 존재는 인간이 존중해야 할 어떠한 권리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입장이다. 카우보이 윤리 덕분으로 미국은 높은 생활수준과 물질적 풍요를 누리게 되었다. 또한 프론티어 윤리는 ‘myth of superabundance(남아돌 만큼의 풍요함의 신화)’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제는 ‘myth of scientific supremacy(과학지상주의의 신화)’로 방향이 전환되고 있다. 그러나 과학 및 과학기술의 진보만으로 환경악화와 자원고갈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하딘은 지금과 같은 환경정책은 공유지의 비극(the Tragedy of the Commons)을 회피할 방법이 없다고 결론한다. 공유지(Common Pool Resource)의 비극은 “지하자원, 초원, 공기, 호수에 있는 고기와 같이 공동체의 모두가 사용해야 할 자원을, 사적이익을 주장하는 시장의 기능에 맡겨 두면, 이를 당세대에서 남용하여 자원이 고갈될 위험이 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는 시장실패의 요인이 되며, 이러한 자원에 대해서는 국가의 관여가 필요하다. 아니면 이해 당사자가 모여 일정한 합의를 통해 이용권을 제한하는 제도를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만일 사람들이 자신들의 이익보다는 지구 행성 전체의 이익을 우선시킬 수 있도록 강제되지 않으면, 공유지의 비극은 피할 수 없게 된다. 그런 면에서 가치체계의 역전이 필요하다. 자연은 인간에게 종속되어 있고 아무런 권리도 소유하지 않는다는 전제에 의거한 환경정책을 포기하고, 개개 인간의 복리보다 지구 생태계의 복리를 위해 진력해야 한다.
그러나 하딘은 ‘구명보트 윤리(lifeboat ethics)’를 제기하여 반인도적이라는 비판을 불러일으켰다. 문제는 이렇다. 정원이 60명인 구명보트(선진국)에 지금 50명이 승선하고 있다. 이 구명보트에 태워줄 것을 간청하면서 헤엄쳐오고 있는 100명(후진국)이 있을 때 어떻게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여기에 세 가지 입장이 있다. 하나는 우리의 형제로 간주하여 태워준다. 그러면 보트는 가라앉고 모두 죽게 될 것이다. 결국 완벽한 정의의 실현은 완벽한 파국을 초래하게 된다. 다른 하나는 10명만 더 승선시키는 방법이다. 그러면 누구를 선정할 것인가? 현실적으로 결코 쉽지 않은 문제이다. 하딘의 입장은 어느 누구도 승선시키지 말라는 것이다.
하딘이 주장하는 근거는 이렇다. 우선 만일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국가들에게 자원을 베풀거나, 관대한 이민 정책을 통해서 가난한 국가의 사람들을 대거 받아들인다면, 부유한 국가도 재난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만일 지구의 자원이 모든 사람이 다 쓸 수 있는 공유물의 일부로 인정되면 ‘공유지의 비극’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일 가난한 국가들이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보석’된다면, 그 국가들은 자신들의 경험으로부터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 국가들이 위기에 대처하기 위해서 외부로부터의 원조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인구는 국토의 수용 능력이 허락하는 한도 이내까지 감소할 것이다. 결국 식량원조가 인구 억제를 방해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하딘의 매몰찬 윤리에 풀러(R. Buckminster Fuller), 칼드웰(Lynton K Caldwell) 등은 ‘우주선 윤리(spaceship ethics)’를 제시했다. 이들은 프론티어 카우보이 윤리와 구명보트 윤리 모두 난점이 있다고 지적한다. 인간이나 부유한 구명보트 승객을 우위에 두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류와 자연의 본래적인 복리는 서로 친밀하게 결부되어 있어서, 다른 쪽을 철저하게 손상하는 일 없이 어느 한 쪽에 우월성을 부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구명보트 모델보다는 우주선 모델이 인간과 생명권간의 관계를 이해하는데 더 적합하다. 이런 우주선의 윤리가 요청하고 있는 것은 일과성의 조치가 아니라, 시스템 그 자체의 근본적인 변혁이다. 피상적인 완화책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그래서 지구를 살리기 위해서는 새로운 타입의 정치 지도자를 요청한다.
칼드웰은 새로운 도덕에는 인구, 산업화, 경제적 팽창을 마땅히 제한해야 한다는 원리가 포함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자원이 스스로를 재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만일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우리가 재생 불가능한 자원을 재생시켜야 한다. 인구, 경제적 팽창, 자원 사용의 제한은 인간으로 하여금 지구의 탑재 능력을 초과하도록 하지 않게 할뿐만 아니라, 개인의 자유가 미치는 범위를 극대화시켜준다.
풀러는 적절하고 균형 잡힌 소비와 성장 패턴이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면, 지구의 전 주민들을 부양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하딘같이 몇 몇 후진국들을 이미 끝난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는 것은 잘못된 신념이다. 이런 이기적인 경향은 세계적인 또는 지구적인 스케일로 생각하는 능력의 결여 탓이다. 일부 승객들이 극단적인 형태의 빈곤으로 고통을 받는다면 우주선 지구호는 성공적으로 여행할 수 없다. 부유한 국가들이 현재의 우세한 위치에 도달한 것은 부분적으로 제3세계의 착취에 의한 것이므로, 선진국은 후진국을 원조할 의무가 있다. “부(富)라는 것은 공기나 일광과 같은 것으로 모든 사람들의 소유물이다.” 풀러는 큰 스케일의 분배 정의를 주장한다. 닫힌 시스템인 유한한 우주선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누구나 보전(conservation)을 실행해 나가야 한다. 수십억 년의 보전의 결과인 자원이라는 저축을, 우주 역사로 말하면 한순간 만에 다 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주선내의 인류는 화석 연료를 사용해서는 안 되고, 바람, 파도, 물 그리고 태양의 힘으로부터 매일 얻어지는 방대한 에너지 주입으로 오로지 그것만으로 살아가야 한다. 만약 우리가 세계적 스케일로 생각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특정한 패턴의 무절제한 소비와 경제 성장을 기꺼이 포기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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