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11. 머레이 북친)

이효범 2021. 4. 29. 22:43

o 세종에서 보내는 편지(환경에 대하여, 11. 머레이 북친)

 

머레이 북친(Murray Bookchin)은 주물 공장에서 노동을 했고, 노동 운동가로 현장을 체험한 사회생태주의(social ecology) 철학자이다. 그의 책으로는 사회생태론의 철학(The Philosophy of Social Ecology)이 있다. 그는 기존의 환경개량주의를 비판한다. 즉 기존 사회 체계를 그대로 유지한 채 환경 기술을 개발하고 합리적인 환경 정책을 세워서는 환경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한 북친은 모든 생명체가 동일한 권리를 갖고 있으며 인간은 결코 다른 생명체를 착취할 권리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심층생태론도 비판한다. 인간은 자연계 안에서 특별한 지적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런 인간의 책임 있는 역할을 강조한다. “인간은 동물이되 독특한 동물이다. 다른 동물들과 비교해볼 때, 우리 인간은 질적으로 뛰어난 지력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환경에 적응할 뿐만 아니라 그 환경을 지향적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북친은 환경문제가 단순히 환경 문제가 아니라 바로 사회문제라고 지적한다. 생태 위기의 근원에는 일정한 사회적 요인에 있다는 것이다. 북친에 의하면 자연은 단순히 인간 행위를 수동적으로 수용하는 존재가 아니다. “자연은 인간과 상호작용하며 자연과 사회 세계에서 공통의 잠재력을 실현해나간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인간과 자연간의 아름다운 유기적 관계가 깨졌다. 이제 인간은 자연을 일방적으로 지배하고 파괴한다. 이런 잘못된 왜곡은 사회의 왜곡에서 먼저 기인한다. 정의롭지 못한 왜곡된 사회 속에서 사람간의 관계가 파괴되었다. 인간은 평등해야 되는데 몇몇 소수의 힘 있는 인간들이 다른 인간들을 지배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사회에서는 지배와 위계(hierarchy)라는 사회적 유형이 고착된다. 그리고 지배와 폭력이 정당화된다. 인간이 인간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화되는 사회에서는, 인간이 자연을 지배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 된다. 그래서 북친은 환경파괴를 일반적이고 광범위한 지배와 위계 형태의 하나로 본다. 사유재산권, 자본주의, 관료주의, 국가뿐만 아니라 인종주의, 성차별주의, 계급구조 등의 사회적 관행과 사회구조가 모두 지배와 위계의 형태들이다. 이런 왜곡된 형태들은 부정되어야 한다. 그런 면에서 북친에게는 무정부주의적인 색체가 나타난다. 그는 국가와 종교의 권위와 위계질서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하기 때문이다.

 

북친의 사회생태주의는 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 자유주의적 아나키즘, 아리스토텔레스와 헤겔과 유기체주의등에 뿌리를 두었다. 이상적인 사회는 생태와 사회 내의 모든 위계구조를 철폐해야만 가능하다. 미래에 인류가 실현해야 하는 생태적 사회는 문자 이전 시대의 고대인들이 갖고 있었던 근본적이고 유기체적인 비위계적 관계를 회복하는 사회이다. 이런 사회는 인간간의 차이가 그리고 인간과 자연과의 차이가 지배와 억압의 관계로 변질되지 않고, 헤겔이 말하는 차이의 통합즉 다양성이 통합되는 사회이다. 그러면 고대의 유기체적 사회는 왜 붕괴되었는가? 그것은 역사가 진행되면서 연장자들의 영향력이 커지고, 남성들의 권력과 특권이 비대해졌기 때문이다. 유기체적 사회의 균형이 파괴되고 위계구조가 발생하면서 남성이 여성과 아이를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 물질에 대한 정신의 지배, 쾌락에 대한 노동의 지배, 감각적 육체에 대한 정신의 통제와 같은 불평등한 이분법적인 문화가 발생하였다.

 

유일하고 참되고 정의로운 사회는 인간이 모든 형태의 통제와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사회이다. 그것은 구성원 모두의 공동의 필요와 목표에 이바지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이며, 자연에 대한 지배이건 인간에 대한 지배이건 간에 일체의 지배가 없는 사회이다. 이런 세계에서 인간은 비로소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룰 수 있다. 즉 인간의 지배로부터의 자연의 해방은, 먼저 인간이 인간의 지배로부터 자유로워진 세계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이런 공동체에서는 지속가능한(sustainable) 농업과 적정기술을 추구한다. 이것은 기술적 과학적 영농을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고, 과학적 생태학, 기술공학과 전통적인 재래기술을 결합하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생산성과 경제적 효율성을 최우선으로 두는 농법을 포기하거나, 생산성의 개념을 재정립해야 한다. 농장의 이미지를 공장에서 자연생태계로 바꾸어야 한다.

 

생태적 붕괴를 피하기 위해서는 인간이 생물지역(bioregion)이 필요로 하는 조건을 인식하고 그곳에서 살아야 한다. 생물지역 속의 생태계는 자연을 통제하는 인간의 선택범위를 제약한다. 생물지역의 특정조건에 맞는 적절한 기술과 농업관행, 그리고 공동체의 적정한 규모가 필요하다. 오염을 피하면서도 지역의 토착 동식물을 유지하고 회복할 수 있도록, 충분히 분권화되고 새로운 생태적 감수성에 부합하는 사회제도도 필수적이다. 단일품종의 재배, 도시의 콘크리트화, 대중문화의 현 경향을 뒤집기 위해서는 생물지역 속에서 다양성이 고양되어야 한다.

 

사회생태론자들은 기근, 질병, 전쟁이 인구 팽창을 막는 긍정적인 억제 요인이라는 맬더스적 사고와, 3세계 사람들의 선진국 이동이 강력히 제한되어야 한다는 정책을 비난한다. 그러면서 자원을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용하면서 삶의 질을 높이고, 기본적 필요 충족수단을 재분배하는 생태적 발전정책을 지지한다.

 

이들은 환경 정의에 관심이 많다. 환경정의는 환경편익과 환경 부담의 사회적 분배 문제를 다루는 문제이다. 이득과 부담을 불평등하게 배분하는 사회는 원천적으로 부정의한 사회이다. 가난한 국가는 환경파괴(산림개간, 사막화, 공기 및 수질 오염)를 겪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리고 가난한 국가에서도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환경파괴로 고통당할 가능성이 더 높다. 경제적 사고방식에 따르면, 가장 적은 가치가 있는 사람과 장소에 환경위험을 분배하는 것이 가장 비용이 덜 들며, 따라서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과 아이들이 환경파괴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불라드(Robert D. Bullard)는 유독 폐기물 더미, 쓰레기 매립지, 소각장, 오염산업체가 빈민과 소수 민족이 사는 인구밀집지역이나 인근 지역에 위치한다고 지적한다. 환경 정의는 국가 내 구성원들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국가 간의 문제이기도 하다. 환경에 있어서도 선진국과 개도국 간에 대립이 첨예하다. 선진국은 개발을 위한 삼림파괴와 같은 후진국의 무차별적인 자연파괴 행위가 지구의 환경위기를 초래했다고 비난한다. 이들은 지구생태계의 복리를 더 중시한다. 이에 반해 개도국들은 환경파괴의 진정한 원인은 선진국의 과도한 자원 소비를 기초로 하는 산업화와 공업화에 있다고 반박한다. 이들은 개발과 국가 간 분배의 정의를 더 중요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