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서평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를 읽고

이효범 2021. 2. 21. 12:31

o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를 읽고

 

구녕 이효범

 

우리가 편지 주소를 쓰는 방식은, 국가라는 넓은 곳에서부터 시작하여 내가 사는 좁은 곳으로 내려오는 방식이다. 그러나 미국인은 우리와 거꾸로 쓴다. 예전에 인기리에 상영되었던 미국 영화 나 홀로 집에를 보면, 주인공 케빈(맥컬리 컬킨)이 부모 말을 어겼기 때문에 그 벌로 자기 방에 갇혀 나오지 못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반에 우리는 예전에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아예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내쫓았다. 이런 동양과 서양의 차이를 모두 거론하려고 하면 몇 밤을 새워도 모자랄 것이다. 정말로 동서양의 기본적인 차이는 무엇이고 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이런 의문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서가, 리처드 니스벳의 생각의 지도이다. 이 책은 2004년에 번역된 책이지만, 아직까지도 인기리에 꾸준히 팔리고 있는 스테디셀러이다.

 

니스벳은 자기의 연구는 많은 분야의 학자들이 오랫동안 궁금해왔던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답을 줄 수 있다고 말한다.(19~20쪽 참조)

(1) 과학과 수학: 현대의 동양인들이 서양인들보다 수학과 과학을 잘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분야에서의 최첨단 발전은 왜 서양에서 더 두드러질까?

(2) 주의 과정과 지각 과정: 왜 동양인들은 서양인들보다 사건들 간의 관련성을 잘 파악하는 반면에, 주변 환경에서 개별 사물을 분리하는 과제에서는 더 어려워할까?

(3) 인과적 추리: 왜 서양인들은 사람의 행동을 설명할 때 상황적인 요인을 무시하고 사람의 내부적인 특성만을 강조하는 반면에, 동양인들은 어떤 일이 발생하고 나면 내가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지라는 후견 지명 효과를 강하게 보일까?

(4) 지식의 조직화: 왜 서양의 유아들은 동사 보다 명사를 더 빠른 속도로 배우고, 동양의 유아들은 명사보다는 동사를 더 빨리 배울까?

(5) 추론과정: 왜 서양인들은 일상적인 문제를 해결할 때도 형식논리를 자주 사용하고, 동양인들은 명백하게 모순되어 보이는 두 주장들을 동시에 발아들일까?

이런 차이가 생긴 원인을 니스벳은 생태학적이고(186~199쪽 참조), 역사적으로(27~50쪽 참조) 설명한다. 서양은 그리스의 지적 전통에 기반한다. 그리스는 도시국가 형태의 정치 구조와 공화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그리스는 지중해 해안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무역을 중요한 산업수단으로 삼았다. 이런 그리스인들은 행복을 아무런 제약 없는 상태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며 탁월성을 추구하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독특한 특성과 목표를 가진 상호개별적인 존재이고, 독립적 존재이다. 개인의 권리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행할 수 있는 권리이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은 논쟁을 중시한다. 여가란 지식을 추구하는 자유를 의미하고, 관찰을 통해서 원리를 발견하려고 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사물의 속성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 속성에 근거하여 범주화하고, 그 범주들을 사용해서 어떤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사물들의 움직임을 그 규칙으로 설명하였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서 보듯이, 그리스인들은 변화를 인정하지 않는 직선적 사고와 이것 아니면 저것의 이분법적 사고방식에 집착했다. 그들은 강박적이라 할 만큼 모순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다.

이에 반해 유교 문화권에 있는 동양은 고대 중국의 지적 전통에 기반한다. 고대 중국은 일찍부터 중앙집권적 정치권력 체제를 확립하였고, 그 때문에 상대적으로 문화적 동질성이 강했다. 이런 중국인들은 행복을 화목한 인간관계를 맺고 평범하게 사는 것으로 보았다. 인간은 가정처럼 특정집단에 소속된 하나의 구성원이다. 개인의 권리란 공동체 전체의 권리 중에서 자신의 몫을 담당하는 것이다. 중국인들은 조화와 화목, 양보와 타협을 중시하였다. 그리고 실용적이지 않는 순수한 의미에서의 앎이란 존재하지 않고, 추상적인 사유를 신뢰하지 않았다. 중국인들은 우주는 매우 복잡한 곳이기 때문에 그 안에서 발생하는 일들은 서로 얽혀있고, 그 안에서 존재하는 사물이나 인간은 마치 그물처럼 서로 엮여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사고 경향 때문에 중국인들은 어떤 대상을 전체 맥락에서 따로 떼어내어 분석하는 일에 거부감을 느꼈다.

니스벳에 의하면, 그리스와 중국의 생태 환경적인 차이가 서로 다른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체제를 초래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이고 문화적인 차이가 사고의 차이를 가져왔다. 그러면서 그는 심리적 실험과 경험적 근거를 가지고, 현대 동양인과 서양인의 자기 개념, 세상을 지각하는 방법의 차이, 동양과 서양의 인과론적 사고, 동양의 관계와 서양의 규칙, 서양의 논리와 동양의 중용이라는 주제를 조목조목 구체적으로 파헤친다. 매우 설득력이 있고 공감이 가는 설명들이다. 충분히 참조할만한 가치 있는 연구들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니스벳의 이런 연구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할 능력도 없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여기서는 니스벳의 연구를 보완한다는 의미에서, 다른 학자들의 연구를 참고하여, 동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 이외에 또 다른 차이들을 생각해보려고 한다.

 

위잉스가 쓴 동양적 가치의 재발견에는 동서양의 문화적 차이가 잘 드러나 있다. 위잉스는 서양이 외재 초월적 문화를 갖고 있는 반면에, 동양은 내향 초월적 문화를 갖고 있다고 대비시킨다. 서양의 외재 초월적 문화에서는 초월세계, 신의 영역, 이데아의 세계와 현실세계, 인간의 세계, 경험세계가 분리되거나 긴장관계에 있다. 이것은 이분법적 사유체계와 연관이 깊다. 서양에서는 신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했듯이, 서양인들은 초월세계를 철저하게 탐구했다. 플라톤의 이데아론이나, 아리스토텔레스의 궁극 원인 혹은 부동의 원동자를 찾은 것은 이와 관련된다. 또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의 계시와 이성을 조화시키려고 하였다. 그리고 서양은 근대 데카르트 이후 기계적 자연관을 갖게 되었고, 신성하고 초월적 위치에 있으면서 인간 생활을 강제하고 부과하는 법체계 등을 강화하였다. 이것이 인간은 신이 규정한 법칙을 준수해야 한다는 자연법(Natural Law) 전통이다. 서구에서는 인식론과 논리학, 과학이 발달했다. 기독교 윤리에 근거한 자본주의 정신과 자연법과 같은 법체계가 발달하게 된 것은 이런 외향문화의 성격에서 기인한다.

이에 반해 동양의 내향 초월적 문화에서는, 초월세계와 현상세계가 서구처럼 분리되거나 긴장관계에 있지 않고 융합적이며 연장선상에 있다. 동양에서 두 세계는 서로 교섭한다. 眞諦俗諦, 는 하나이면서 둘이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신의 도시(city of God)와 보편성을 갖춘 교회(universal church)가 없다. 맹자는 마음을 다하는 자는 그 본성을 알 수 있고, 본성을 알면 하늘을 알게 된다고 말한다. 동양의 고대인들은 인간세계의 질서와 도덕 가치를 서양인들처럼 혹은 에 귀의시켰다. 그러나 이들은 인간으로부터 기원하지 않는다. 동양인들은 이 초월적 근원에 대해 단지 긍정을 했을 뿐 그 근본을 파헤쳐 연구하지는 않았다. 장자제물론에 나오는 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천지사방 밖의 일을 성인은 그대로 놓아둘 뿐 말하지 않는다)”란 구절이 이점을 가리킨다. 그리고 동양인들은 인간과 자연의 유기적 결합을 강조하는 유기체적 자연관을 갖고 있고, 자기내면의 수양을 통해 이루어지는 인륜질서를 중시했다. 이들은 내면적 초월세계에 대한 긍정, 의 문화를 강조한 것이다. 내향적 초월은 필연적으로 각 개인 스스로의 일이기 때문에 조직화된 교회에 의지하지 않고, 체계화된 교리에 따르지 않으며, 심지어는 상징적 儀式 또한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동양에는 서양 기독교식의 사제가 없다. 유교는 사람에게 깊이 自得할 것귀의하여 추구하는 것에 스승이 있다고 가르치며, 도가는 사람들에게 뜻을 얻으면 말을 잊을 것을 요구한다. 禪師들은 구도자를 설복시키려고 하지 않는다. 핵심은 확실히 모두 개인의 내면적 자각에 있다. 따라서 개인의 수양 혹은 수도가 관건이 되는 것이다. 만약 동양문화에 인문주의 정신이 있다고 한다면, 이것이 바로 그 구체적 표현이다.

 

국내 철학자로서는 벌써 오래 전에 김하태 교수가 자아와 무아라는 책을 써서, 종교를 통한 동양과 서양의 사고방식의 차이를 비교하였다. 먼저 그는 신학자 불트만(Bultmann)동양과 서양종교로서의 기독교라는 논문에서, 기독교는 원래 동양종교인데 서양 종교화하였다고 말한 점을 논하고 있다. 그것은 바울이 기독교를 서양으로 전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기독교를 동양으로 전했다면 지금과는 아주 판이한 기독교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그러면서 불트만이 기독교를 동양종교라 규정할 때 제시한 몇 가지 특징들을 거론한다. 우선 불트만은 신약과 구약의 언어가 동양적인 것이라는 점에서 기독교를 동양종교라고 부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예수의 말씀들을 분석해 보면 그는 추상적인 용어를 사용치 않고 가장 구체적인 표현을 했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는 항상 역설적인 표현을 즐겨 사용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자기를 잃은 자는 찾고 자기를 찾는 자는 잃는다고 하는 말과 있는 자에게 더 주고, 없는 자의 것까지 빼앗아 주리라고 한 말 등에서 구체적인 동시에 역설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예수의 표현은 직접적인 표현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무엇을 입을 것이며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염려하지 말라또는 죄를 사하여 주기를 일곱 번의 70배를 하라는 등의 표현에서 그의 직접적인 표현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구약의 시편을 보더라도, 구체적이며 이미지가 다채로우며 강력한 정열을 내포한 것으로, 희랍의 시가와는 판이하게 다르다는 것이다. 끝으로 불트만의 관찰에 의하면 원시기독교는 동양적 메시아관, 즉 종말론적 세계관을 지닌 것으로, 이것은 그리스 사상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라 하였다. 그러나 기독교는 서양에 와서 새로운 역사관과 개인주의, 새로운 고통관과 같은 사상을 부가하여 마침내는 기독교가 동양종교인 동시에 서양종교가 되어, 보편적인 하나의 종교로 대두하게 되었다.

다음으로 김하태는 중국 철학자 馮友蘭을 들어 동양의 사고방식을 논한다. 馮友蘭은 중국철학은 농부의 견해를 가진 것으로, 이 견해가 그 내용뿐만 아니라 그 방법까지 좌우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농부의 생활은 농장 또는 곡식과 같은 직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을 매일 다루고 있기 때문에, 중국 철학자들은 사물의 직접적인 파악을 철학의 출발점으로 삼는다고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중국철학의 언어인 한문은 암시적이긴 하지만 뚜렷하고 확실한 것은 아니라고 하였다. 왜냐하면 중국 언어 표현은 연역적 추리체계 내에 한 자리를 차지하는 어떤 개념을 표시하지 않고, 철학자들은 오직 그들이 보는 것을 그대로 말하기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이유 아래서 중국철학자가 하는 말은 그 내용이 풍부하나 표현자체는 간결하므로, 중국철학자의 표현이 정확하기보다는 암시적이라고 하였다. 林語堂도 그의 저서인 공자의 지혜 The Wisdom of Confucius)에서 논어에 관해 말하기를, 공자의 말은 간단명료하게 한 구절로 끝나는데, 만일 서양 철학자가 동일한 주제를 취급한다면 적어도 10페이지는 쓸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국철학의 용어의 특징은 근본적으로 시적이므로 정확한 개념적 묘사를 결여한다고 주장하였다.

김하태는 또 일본철학자 西田幾太郞을 인용하여 동서양을 비교하고 있다. 西田幾太郞은 희랍문화를 의 문화라고 정의하였다. 희랍인이 보는 실재는 형상을 가진 것이요, 또한 결정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서양철학에서는 실재가 한정을 받은 것이요, 형상을 입은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한정물, 有形相物無限定物보다 나은 것으로 보았다. 이 사상은 피타고라스가 말하는 한정(Limit)에서 명백히 드러나는 것으로, 또는 존재는 제약자임을 말하고 있다. 여기에 반하여 동양사상은 의 개념에 의하여 결정된다. 인도철학에서는 실재를 무 혹은 궁극적 무라고 보아, 무제약자, 무분별자, 무조건자는 한정을 받고 形相을 입은 것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였다. 대승불교의 色卽是空 空卽是色을 보더라도, 인도인들은 우주의 궁극적 실재를 파악함에 있어서는 먼저 ()를 감각함으로써 를 긍정할 수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현상은 노장철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노자의 도덕경 첫장인 道可道 非常道 名價名 非常名 無名天地云始 有名萬物云母라는 구절은 이 점을 잘 표현되고 있다.

김하태는 또 미국 철학자 노르롭(F.S.C.Northrop)을 인용하여 동서양을 비교하고 있다. 노드롭은 개념을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하였다. 하나는 직관에 의한 개념(Concepts by Intuition)이고, 다른 하나는 假定에 의한 개념(Concepts by Postulation)이다. 직관에 의한 개념은 직접적으로 파악한 것을 가리키고 또한 그 의미도 여기에서 얻는다고 정의하였다. 예를 들면 파랗다고 하는 것은 우리 감각으로 얻은 색깔을 말하는데 이는 직관에 의한 개념이라 보았다. 그와 반대로 가정의 의한 개념은 그 전적 의미를 연역적 定說의 요청에서 또한 그 관계에서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파랗다는 것은 전자학설에서 나타나는 파장의 수라는 의미를 가질 때, 이것은 가정에 의한 개념이 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노드롭은 전자는 동양의 사고방식이고 후자는 서양의 사고방식이라고 하였다. 가령 예를 든다면 서양철학의 초기인 희랍철학에서는, 진정한 존재는 무엇인가 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실재는 물, , 공기 등이라는 가정을 세우고, 여기에 따라 만물의 존재형태를 연역하는 것이, 바로 희랍철학의 사고형태라고 볼 수 있다. 그중에서도 데모크리토스는 사상 초유로 원자론을 제기하며, 우주는 눈에 보이지 않는 무수한 원자로 말미암아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는 종류가 다른 원자들의 복합으로 인하여 개체가 특성을 갖게 된다는 세계관을 표명했다. 이것 역시 가정에 의한 개념으로서 원자를 가정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 플라톤은 원자 대신에 이데아를 가정하여 만상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서양철학과 통합한 기독교의 이라는 개념도 역시 데모크리토스의 원자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가정에 의한 개념으로 볼 수 있다. 서양의 기독교는 신이라는 개념을 통하여 인생과 우주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노드롭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직관에 의한 개념으로 형성된, 동양사상이 생각하는 궁극적 실재를 무차별의 직관적 연속체(Undifferentiated Aesthetic Continuum)’라고 칭하였다. 불교에서는 이 무차별의 직관적 연속체를 또는 절대적 공이라고 하였다. 그러면 무차별의 직관적 연속체에 도달하는 방법은 무엇인가? 첫째 방법은 직접적 포착의 방법으로, 知的인 분별을 버리는 것이다. 과 베단타(Vedanta) 철학에서 강조하는 정신집중과 직관, 그리고 모든 감각되고 이론적으로 생각된 요소를 제외시키고 오직 무분별적인 것, 비이원적 직관만 남겨두는 요가의 방법이 곧 이 방법이다. 둘째 방법은 간접적인 방법이다. 이 방법은 부정적 표현의 방법으로, 언어표현에 부정적 표시를 통하여 실재를 가리키게 하는 방법이다. 인도교, 도교, 불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것도 아니요, 저것도 아니다.(neti neti)’라고 하는 방식이다. 대승불교, 특히 나가르쥬나(Nagarjuna) 철학에서 볼 수 있는 부정의 변증법에서, 마지막으로 도달하는 경험을 공(Suayata) 또는 眞如(Tathata)라고 하는 방법도 이 종류에 속한다.

또 한 가지 간접적 방법으로 들 수 있는 것이 역설적 언어표현이다. 이것은 불교의 선종에서 흔히 사용하는 비논리적 논리를 가리킨다. 그 공식은 다음과 같다. ‘I am not I, therefore I am I.’ ‘A is not A, therefore A is A.’ 이런 표현으로 선종에서는 자주 實相無相’, ‘法門無門’, ‘聖智無智라는 말들을 사용하고 있다. 이 표현들이 의도하는 것은 부정을 통하여 긍정으로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즉 상대적인 것의 부정으로 절대적인 것의 긍정에 이루고자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서양의 사고방식은 과학적이고, 추론적이고, 분석적이고, 합리적이고, 철학적인데 반해, 동양적 사고방식은 詩的이고, 직관적이고, 종합적인 동시에, 분별적이 아니고 무분별적이며, 개념적이 아니고 감정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김하태의 결론을 최근에 발전하는 뇌과학적으로 설명한다면, 서양은 왼쪽()뇌적이고, 동양은 오른쪽()뇌적이라고 할 수 있다. 좌뇌는 언어와 논리와 추론을 담당하지만, 우뇌는 직관과 종교와 창조를 주관한다. 아무튼 좌뇌적인 서양문화에서 서양적 핵심 정신인 과학과 기술, 또한 과학적인 방법을 철저하게 모든 영역까지 밀고 나간다면, 그야말로 종교와 영성은 사라지고, 세속화된 문화만이 남게 될 것이다. 현대에 와서 서양문화는 바로 이런 추세의 위기 속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위잉스와 김하태의 동서양 비교 사상을 첨가하여, 니스벳이 미처 다루지 못한 부분을 보완해보았다. 그러면 이러한 동서양의 차이가, 도처에서 동서양이 빈번하게 만나는 현대에도 그대로 변함없이 지속될 것인가? 이 문제를 니스벳은 책의 끝부분 에필로그에서 다루고 있다. 그는 우선 문화는 하나로 수렴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입장과, 이와 대비해서 문화는 오히려 충돌할 것이라는 새뮤얼 헌팅턴의 주장을 검토한다. 후쿠야마는 문명의 종말이라는 책에서 세계의 정치 구조, 경제 체제, 그리고 가치관들은 하나로 수렴될 것이라고 예언한다. 즉 서구에서 발전시킨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를 뒤집을만한 사건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헌팅턴은 문명의 충돌에서 유교, 이슬람, 그리고 서양이라는 대표적 문명들이 가치관과 세계관에서 서로 좁혀질 수 없을 정도로 벌어져 있기 때문에, 문명 간에 차이가 더 심해져 결국 충동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양 극단의 입장을 소개한 다음에 니스벳은 두 입장이 모두 일정한 근거에 기반하고 있다고 긍정한다. 후쿠야마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여러 현상들을 쉽게 관찰할 수 있다. 세계 어디를 가든 사람들은 청바지에 나이키를 신고 코카콜라를 마시며 미국 음악을 듣고 미국 텔레비전 프로를 시청한다. 심지어 프랑스가 자국 TV에 반영되는 미국 프로의 비율을 25% 줄일 정도이니 두말할 필요가 없다. 또한 동양의 학교 교육에서도 논리적 분석과 비판적 사고를 강조하는 등 세계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서구화되어 가고 있다. 실제로 동양 어린이들이 점점 서구식의 사회와 과정을 거치고 있다는 증거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심리학자인 헤럴드 스티븐슨(Harold Stevenson)의 연구팀은 80년대 중반부터 베이징의 한 초등학교를 대상으로 10년이 넘게 종단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이들이 연구 초기에 중국의 어머니들에게 자녀에게 제일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온 답은 원만한 인간관계를 맺는 능력이었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뒤 똑같은 질문에 대한 중국 어머니들의 답은 미국 어머니들의 답과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녀가 독립성을 가지고 이 세상에서 앞서가는 것을 강하게 원했다.

이와 반대로 헌팅턴의 주장에 부합하는 사례들도 많다. 헌팅턴은 국가 간의 사회·경제적 차이는 여전히 엄청나며, 미래에 발생하게 될 모든 국가 간의 갈등은 경제나 사회적 문제보다는 문화적 문제에서 비롯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한 유교와 이슬람은 서구와는 전혀 다른 문화적 전통을 가지고 있으며, 동양의 지속적인 경제 발전과 이슬람의 인구 증가로 인해, 서구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감소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일본은 자본주의를 수용한 지 이미 100년이 경과했기 때문에 서구적 가치인 독립성, 자유, 합리주의가 강하게 뿌리박혀 있을 것이라고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일본은 사회의 각 분야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가 일본에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형태는 일본 문화에 맞게 변형되어 버렸다. 예를 들어, 회사에 대한 충성심, 팀 정신, 협력적 경영 스타일 같은 일본 자본주의의 특징들은 일본의 고요한 가치에서 비롯되었다. 바로 이러한 특징들이 2차 대전 후 일본의 기적을 일으킨 원동력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15년 전까지만 해도 서양도 일본식 경영을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최근 일본의 경제 위기가 바로 이러한 일본의 문화적 특성 때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즉 가족적인 회사 분위기 때문에 자유롭게 구조 조정을 하지 못하고, 우호적인 회사에 쉽게 돈을 빌려주는 등의 관행 때문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중요한 사실은 일본의 고도 경제 성장이 일본이 전통적인 가치를 그다지 크게 바꾸어놓지 못했다는 점이다.

이런 양 극단의 대안으로 니스벳은 제 3의 견해를 제시한다. 그것은 단순히 동양이 서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구조와 가치관에 있어 서양적인 것과 동양적인 것들이 서로 결합되는 상태에 도달할 것이라는, 이른바 수렴론이다. 그러면서 그는 수렴되는 증거들을 제시한다. 서양은 점점 동양적인 것에 매력을 느끼고 있다. 비록 세계 곳곳의 사람들이 코카콜라를 마시고 청바지를 입고 있지만, 서양의 요리는 이미 동양 요리를 가미한 퓨전 스타일을 지향하고 있다. 또한 많은 서양 의사들이 동양 의술을 부분적으로나마 받아들이기 시작했으며, 두통이나 구토 같은 증상에는 서양 의학보다는 동양 의학의 치료법을 권하기까지 한다. 수많은 미국인들이 요가나 중국의 기체조를 배우고 있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리고 서구의 개인주의가 인간 소외를 초래한다고 믿게 된 많은 미국인들이 이제 동양적인 공동체를 통하여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그는 동양과 서양은 서로의 장점을 수용하여 두 문화의 특성과 함께 공존하는 문화 형태를 만들어나갈 것이라고 예측한다. 마치 요리의 재료들이 각각의 속성은 그대로 지니면서도 서로 어우러져 하나의 새로운 요리를 만들어내듯이, 두 문화는 새로운 통합을 맞이할 것이라고 진단한다.

 

옳은 말이다. 나도 니스벳처럼, 거시적인 관점에서는 동양과 서양뿐만 아니라 세계의 모든 문화는 하나로, 크게, 새롭게, 통합할 것이라고 예측한다. 미국의 이동형 탐사로봇 퍼서비어런스가 화성표면에 착륙했다. 일론 머스크가 이끄는 우주 기업 스페이스 X2050년까지 100만 명을 화성에 이주시키겠다고 밝히고 있다. 이런 과정에서 지구는 하나로 통합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통합의 과정이 결코 순탄하지 만은 않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 거침없이 달려왔던 세계화의 물결도 갑자기 출몰한 코로나19로 주춤하고 있듯이, 거대한 문명의 통합은 직선적으로 진보 할 수만은 없다. 전진과 후퇴를 거듭할 것이다. 또한 국제 정치적으로는 현재 미국과 중국이라는 새로운 2강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다. 이 대립이 심화되면 헌팅턴의 주장대로 문명의 충돌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다. 참으로 소름끼치는 미래이다.

이런 긴장 속에서 우리는 세계의 거대한 변화에 어떤 전략으로 임해야 할까? 크게 보아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은 미국보다는 중국에 더 가깝다. 그러나 우리나라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이 균일하다고 결코 쉽게 말할 수 없다. 우선 종교적으로 기독교를 믿는 사람들 하고 유학을 생활신조로 삼는 사람들하고는 사고나 가치관에서 많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다. 이 차이는 제사라는 儀式에서 선명하게 들어난다. 다음으로 세대 간에도 차이가 심하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더 서구적 사고를 하는 경향이 있다. 지역적인 차이도 있을 것이다. 이런 차이들을 극복할 수 있는 어떤 공통적인 민족성이 있을까? 사실 민족성이라는 말은 참으로 애매한 말이다. 그러나 원시 시대부터 우리 민족에게는 샤머니즘에서 기원하는 일정한 공통적인 원형의식이 우리의 집단무의식 속에 형성되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그것이 고정되어 있거나 일정한 내용을 가진 실체라고 보기는 어렵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신바람 민족이라고 불리고는 있지만, 그 신바람이 어디로 어떻게 불지는 사람과 시대와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그러므로 어떻게 하면 그런 신바람이 6.25전쟁처럼 구성원간의 내적 충돌로 이어져 파괴적 결과를 가져오지 않고, 박정희대통령의 한강의 기적처럼 창조적 결과를 가져오게 할 것인가가 관건이다.

우리는 지금 미국편에 설 것인가 아니면 중국편에 설 것인가를 강요받고 있다. 국가의 명운이 갈린 중차대한 선택을 하기 전에 우리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먼저 합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가야할 목적지가 어디냐 하는 것이다. 조만간에 지금보다 몇 십 배 아니 몇 백 배 더 큰 파도가 몰려올 것이다. 우리가 닺을 내려야 할 희망의 항구는 어디인가? 우선 북한처럼 빅브라더가 지배하지 않고 실질적인 자유가 주어진 나라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마르크스가 말하는 계급 없는 理想사회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사회의 최소 수혜자가 받아들일 수 있는 평등사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 사회는 사람의 기본적인 인권이 보장되는 사회이다. 여기에 더 나아가서 공동체의 구성원들이 모래알처럼 흩어져 살지 않고 서로를 염려하고, 건강하게 眞善美聖이라는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나라여야 한다. 우리는 죽음을 걸고 세계의 한 세력들과 연대하여, 그런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