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를 읽고
구녕 이효범
서양철학자 중에서 전 세계적으로 오랫동안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얻고 있는 슈퍼스타는 단연코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이다. 우리나라에서도 2000년에 이미 방대한 니체 전집이 번역되었을 정도이다. 미국도 마찬가지이다. 분석철학이 미국을 광풍처럼 휩쓸고 있던 1990년에도 프린스턴 대학 구내 서점에는 니체에 관련된 책이 여려 권 꽂혀 있었다. 또 그 대학 파이어스톤 중앙도서관 화장실에 가보니 이런 낙서가 적혀 있었다. “God is dead –Nietzsche, Nietzsche is dead –God.”
니체는 1869년부터 1888년에 이르는 20년 동안 집필활동을 했다. 니체는 이 짧은 기간에도 크게 3단계를 거쳐 사상을 발전시켰다. 초기 낭만적 시기는 『비극의 탄생』이 대표작이다. 중기 실증주의적 시기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이 대표작이다. 마지막 새로운 철학의 시기의 대표작은 바로 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이다. 그러므로 이 책은 니체 사상의 진수라고 할 수 있다. 1889년 1월 니체는 토리노의 카를노 알베르토 광장에서 쓸어졌고,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다가, 1990년 56세로 사망했다.
니체가 워낙 인기가 많다 보니 니체의 동일한 저술에 여러 권의 번역서가 나와 있고, 니체 사상에 대한 연구서도 수없이 쏟아지고, 니체와 관련된 다양한 책들이 꾸준히 출판된다. 나는 정동호가 번역한 책세상에서 나온 책을 읽었다. 번역서에는 대체로 역자의 해설이나 후기가 붙는다. 그런데 이 해설이 묘할 때가 많다. 지금은 지식의 세계도 명료해졌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투명해서, 다른 사람의 글을 그대로 도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해설이 그랬다. 그런데 이 번역서의 해설은 전혀 질을 달리한다. 14쪽에 달하는 긴 해설은 박학하고 깊이가 있어 니체를 이해하는데 참으로 도움이 되었다. 번역서 해설의 전형이라고 해도 과연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독자들은 맨 뒤에 붙은 해설을 먼저 읽고 책을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책을 펼치면 맨 처음(제1부)에 ‘차라투스트라의 머리말’이 나온다.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는 나이 30에 산속에 들어가 10년 간 수행하다가, 깨달은 지혜를 세상에 나누어 주기 위해 하산한다. 마치 부처 같기도 하고, 예수 같기도 하고, 아니면 무협지에 나오는 고수 같기도 하다. 하산하는 길에 숲속의 성자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헤어지면서 우리가 니체하면 생각나는 말을 한다. “저 늙은 성자는 숲속에 살고 있어서 신이 죽었다는 소문을 듣지 못했다는 말인가!” (정동호역,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책세상, 2002, 16쪽, 앞으로 이 책을 인용함) 그리고 만나는 첫 도시 시장터에서 군중에게 소리친다. “나 너희들에게 위버멘쉬 Űbermensh를 가르치노라.”(16쪽)
‘신은 죽었다’와 ‘위버멘쉬’. 니체 사상의 핵심 단어가 아무 설명 없이 불쑥 등장한다. ‘위버멘쉬’ 하면 조금 생소하지만 이 말은 지금까지 ‘超人’으로 번역되었던 말이다. 이미 이육사의 시 ‘광야’에도 나오듯이, 우리 문학이나 철학에 아주 익숙한 말이다. 이런 서두를 볼 때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 주인공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우리에게 위버멘쉬를 가르치려고 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위버멘쉬는 누구이며 왜 니체는 이런 이상한 인물을 만들어내고, 그에게 그토록 매달리는 것일까?
설명하려면 길어진다. 니체에 의하면 지금 서구 문명은 그리스 초기의 강건한 상태에서 점점 쇠퇴해 가고 있다. 역사가 진행되는 대로 그대로 놔두면 서구는 허무주의에 빠지고 이윽고 멸망할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이런 참사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니체는 의사처럼 예리하게 서구 문명을 진단한다. 그리고 그 근본원인을 찾아 병을 고치려고 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병의 원인은 서구에서 그토록 존경받던 플라톤의 철학과 기독교이다.
니체에 의하면 플라톤은 세계를 이데아의 세계와 현상의 세계로 나누고, 기독교는 세계를 저쪽과 이쪽의 것으로 나눈다. 이데아의 세계는 고정 불변한 것이요, 시간의 경과에 의해 손상됨이 없는 완전하며 영원한 세계이다. 이와 달리 현상의 세계는 시간의 흐름에 영향 받는 감각의 세계, 즉 개별자의 세계이며, 개별자의 세계는 덧없는 것일 뿐만 아니라 우연적인 것으로 불완전하며 가변적인 세계다. 또한 기독교에 의하면 하나님에 계신 하늘나라만이 영원하며 완전한 세계이고,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이 지상의 세계는 시간의 제약을 받는 변화무쌍한 세계로, 갖가지 악과 병 그리고 죽음이 도처에 깔려있는 불완전한 세계이다. 이들에 의하면 동경해야 할 가치 있는 세계는 저편의 세계이다. 이편에서의 삶은 무가치하다. 또한 니체에 의하면 플라톤의 철학과 기독교는 인간의 행위를 포함하여 모든 역사와 자연 그리고 우주의 움직임이 하나의 주어진 목적을 향하고 있다고 가르친다. 이 목적은 이데아의 세계이며, 다시 오게 될 하나님의 나라이다. 따라서 이편에서의 삶은 자기 목적을 가지고 있지 못하며 다만 저편에 있는 목적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니체는 이와 같은 이원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세계관은 하나의 꾸며낸 거짓이며 기만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를 “지금까지 존재했던 거짓말 중에서 가장 치명적이고 유혹적인 거짓말이며, 가장 비속한 거짓말”(『힘에의 의지』, 200번)이라고 부정하고, 플라톤을 “가장 위대한 타락의 기교”(『힘에의 의지』, 649번)라고 치부한다. 우리가 태어나 살고 있는 이 지상에서의 세계만이 긍정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이고 유일한 실재이다. 모든 가치는 이 지상의 대지의 삶에서 온다. “형제들이여, 맹세코 이 대지에 충실하라. 하늘나라에 대한 희망을 설교하는 자들을 믿지 말라!”(18쪽) 지상에서의 진정한 삶(생명)은 성장과 극복에 대한 즐거움이며 싸움이다. 있는 그대로를 가식 없이 긍정하는 영웅적인 삶이 사실 강건한 문화이다. 그리스 문화가 그런 문화이다. 그런데 플라톤 철학과 기독교가 가장 높은 수준의 그리스 문화를 몰락시켰다.
그래서 강건한 그리스 문화 이후 사람들은 자신의 모든 힘을 현세와 자신의 자연스런 욕망을 부정하는 데 쏟아 부었다. 욕망에 이끌리는 자신을 죄인으로 여기면서 자책하고 자학했다. 자신의 힘을 외부로 쏟으면서 생성 변화하는 세계와의 대결 속에서 자신을 강화하고 완성시키는데 쓰여야 할 힘이, 현세에 대한 부정 속에서 자신의 내면만을 향하게 되면서 자신을 공격하고 억압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서양의 역사는 자기파괴와 생명부정의 역사였다.
그래서 니체는 『이 기쁜 학문』에서 극적이고 과장된 투로, 전능하고 지금까지 모든 가치의 근거가 되어 온 신이 인간에 의하여 살해되었다고 선언한다. “신은 죽었다(Gott ist tot).” 니체는 생명에 적대적인 플라톤적 이념과 기독교적 신앙을 통칭해 신이라고 불렀다. 그러고는 그 신의 죽음을 선언했다. 그러나 신이 죽었다고 해서 인간이 곧 새로운 삶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니다. 신은 끝내 수명을 다했지만, 신의 잔재인 생에 적대적인 도덕이 아직도 그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도덕의 계보』에서 가치의 顚倒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본래는 그리스 영웅들처럼 새로운 가치를 설정하고 실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이 선한 것이었는데, 힘이 없는 약자들이 스스로를 보존하기 위하여 가난한 사람, 무력한 사람, 고통받는 사람, 궁핍한 사람에 대한 이타적 배려와 동정을 도덕적 선으로 주입시켰다는 것이다. 니체는 이러한 현상을 도덕에서의 노예의 반란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가치 전도를 통해 ‘약자만이 오직 착한 자이다’라는 인식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은 그 같은 도덕을 극복해야 한다. 선과 악으로 되어 있는 도덕적 가치에서 벗어나 도덕 이전의 순수한 자연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 여기서 도덕은 극복되고 신의 죽음 또한 완성된다.
그러나 거짓 신과 도덕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 하나만으로는 아직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닌 데 그치지 않고 재앙이 될 수도 있다. 신의 죽음과 도덕의 붕괴는 지금까지 추구해온 최고 목표와 가치의 상실로 이어지고 목표와 가치를 잃은 인간은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극단의 감정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이 극단의 감정이 바로 끝을 알 수 없는 허무주의(니힐리즘)이다. “니힐리즘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최고의 가치들이 자신의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다. (이에) 목표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왜’라는 물음에 대한 답이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힘에의 의지』, 2번) 인간은 이 허무주의로 인해 파멸할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신의 죽음과 도덕의 극복을 통한 인간 해방은 오히려 재앙이 될 것이다. 도덕을 극복한 인간은 이 허무주의도 극복해야 한다. 니체가 자신의 시대와 자신의 삶에서 부딪친 가장 절박한 문제가 바로 이 허무주의이었다. 그것을 극복하는 지난한 길은, 신으로부터의 해방이라는 소극적 자유를 적극적이고 창조적인 자유로 전환해서, 원래의 自然으로 돌아가,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만들고,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데 있다. 이렇듯이 자연으로 돌아가 이 대지와 그 위에서의 삶을 존재 의미와 모든 가치의 근원으로 삼는, 미래에 도래할 새로운 이상적 인간상이, 니체가 강조하는 위버멘쉬이다.
니체에 의하면 서구의 미래는 위버멘쉬에 달렸다. 서구 사람들이 신의 죽음과 가축(노예)의 도덕을 극복하고 허무주의마저 극복하여 위버멘쉬라는 새로운 인간으로 성장한다면, 문명의 종말을 막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실패한다면 희망은 사라진다. 인간에게는 이 두 길이 가능성으로 놓여있다. 니체에 의하면 인간은 다른 동물들과 달리 未完의 존재이기 때문에, 둘 중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다른 동물들은 주어진 본능에 따라 고정된 삶을 산다. 그런 동물들에게는 처음부터 자연 속에 정해진 자리가 있고 주어진 삶의 방식이 있다. 이렇게 정해진 자리와 방식에 따라 다른 동물들은 완성 상태에서 온전한 삶을 산다. 부족한 것이 없다. 이와 달리 인간은 불안정한 삶을 산다. 정해진 자리와 주어진 삶의 방식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은 아직 확정되지 않은 미완의 동물이다. 이제 고정된 본능에서 벗어난 가능성으로서의 인간은 앞으로 나가 위버멘쉬가 될 수도 있고 뒤로 물러서 금수만도 못한 존재가 될 수도 있다. 니체는 그런 인간을 짐승과 위버멘쉬를 잇는 밧줄에 비유했다. 두 단계를 이어주는 교량에 비유하기도 했다.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저편으로 건너가는 것도 위험하고 건너가는 과정, 뒤돌아보는 것, 벌벌 떨고 있는 것도 위험하며 멈춰 서 있는 것도 위험하다. 사람에게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교량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사랑받아 마땅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하나의 과정이요 몰락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랑하노라. 몰락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을 모르는 사람들을. 그런 자들이야말로 저기 저편으로 건너가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21쪽)
또한 니체는 정신의 세 단계의 변화를 통하여 위버멘쉬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나 이제 너희들에게 정신의 세 단계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련다. 정신이 어떻게 낙타가 되고, 낙타가 사자가 되며, 사자가 마침내 어린아이가 되는가를.”(38쪽) 낙타는 초월적 이념과 신앙의 짐을 지고 아무 생명도 없는 죽음의 사막을 질주하는 정신을 상징한다. 그런 정신에게 최고의 덕목은 ‘나는 해야 한다’라는 체념 어린 복종이다. 복종하면서 낙타가 머릿속에 그리는 것은 복종에 대한 보상, 곧 사막에서의 힘든 삶의 대가로 약속되어 있는 오아시스다. 다른 말로 천국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이다. 이 땅에서의 삶을 등진 채 초월적 세계와 신에 대한 신앙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고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낙타다.
어느 날 열사의 사막을 걸어가던 낙타가 걸음을 멈춘다. 지고 있는 짐과 뒤에서 채찍을 휘두르는 주인이 갑자기 궁금해진 것이다. 낙타는 그 때까지 자신이 지고 있는 짐을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주인의 얼굴을 돌아본 적도 없었다. 낙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짐을 내려보았다. 역시 무겁기만 할 뿐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속은 것이다. 주인으로 믿어온 신은 존재하지 않고 그동안 힘겹게 지고 있던 초월적 이념과 신앙 역시 허구라는 것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배신감에서 낙타는 짐을 내던지고는 이제부터 그 누구의 명령도 따르지 않고, 무엇을 하든 자신의 의지대로 하겠다고 외친다. 자유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러면서 낙타는 ‘나는 해야 한다’라는 지상 명령을 내던지고 ‘나는 하려 한다’라는 적극적 의지를 새로운 덕목으로 내세운다. 그 순간 낙타는 사자가 되어 마침내 자신의 세계의 주인이 된다. “사자가 된 낙타는 이제 자유를 쟁취하여 그 자신이 사막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39쪽) 이때 사자는 초월적 이념과 이상으로부터 해방된 정신, 신의 죽음을 통찰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자유의 몸이 된 사자는 이제 환성을 지르며 한층 가벼워진 몸으로 맘 내키는 대로 앞으로 뒤로 옆으로 질주한다. 거칠 것이 없다. 자신의 세상이 된 것이다. 사자는 행복했다. 그러기를 한참, 사자는 생각지도 않은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어디를 향해, 그리고 무엇을 위해 질주해야 하는지를 알 수 없게 된 것이다. 오아시스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나면서 목표까지 잃고 만 탓이다. 여기서 사자는 갈피를 못 잡고 당황하게 된다. 그리고 끝내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를 감당하지 못하고 탈진하게 된다. 목표를 잃고 탈진한 사자에게 필요한 것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적극적인 자유, 곧 자신과 자신의 세계를 구축할 창조적 자유, 무엇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다. 이 창조적 자유는 어떻게 획득하나. 사자가 할 수 없는 것이 그것이다. 사자는 거듭나야 한다. 어린아이가 되어야 한다. 어린아이는 첫 운동이자 제 힘으로 도는 바퀴로서 새로운 시작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전제나 가정이 없다. 그래서 ‘왜?’하고 묻는 일이 없다. 어린아이에게는 있는 그대로가 대답이다. 그런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스스로의 힘에 의해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후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41쪽) 어린아이는 초월적 세계에 대한 망상은 물론 도덕적 강박도 갖고 있지 않다. 그래서 ‘해야 한다’라는 당위를 모른다. ‘하고자 한다’라는 자기주장을 할 만큼 옹색하지도 않다.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할 뿐이다. 이것은 존재에 대한 최고 긍정이자 통찰로서, 이 단계에서 인간의 존재와 함께 세계의 운행은 있는 그대로 긍정된다. 이 경지가 위버멘쉬의 경지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도입부에, 산속의 늙은 성자가 10년간 도를 닦고 내려오는 차라투스트라를 다시 보고, “차라투스트라가 변하여 어린아이가 되었구나.”(14쪽)라고 말한다. 앞 뒤 문맥과 어떤 연결도 없이 뜬금없이 나타난 ‘어린아이’라는 하나의 개념도 정확히 파악하려면, 이런 니체 사상의 전모를 알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니 이 책을 제대로 읽어내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등에 땀이 날 지경이다. 그러나 다행히 나는 니체 전공자도 아니고, 지금 철학 수업하자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현학적 논의는 모두 생략하고, 이 책을 읽으면서 특히 나에게 다가온 구절 한 가지만 더 이야기 하고자 한다.
나는 38년간 공주사대 윤리교육과 교수로 봉직하고 퇴직하면서 퇴직 기념으로 『사람은 왜 죽는가』라는 책을 준비했다. 그 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읽었다. 일정한 주제를 가지고 책을 보니까 그 주제만 크게 눈에 들어왔다. 이 책에는 죽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쓰여 있다.
“모두가 죽음을 중대하게 받아들인다. 그런데도 죽음은 아직도 축제로 승화되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더없이 아름다운 축제를 벌이는 방법을 아직 배우지 못한 것이다. 나는 완성을 가져오는 죽음, 살아 있는 자에게는 가시 바늘이 되고 굳은 언약이 될 그런 죽음을 너희에게 보여주겠다. 완성한 자는 희망에 차 있는 자, 굳게 언약을 하는 자들에 둘러싸여 승리를 확신하며 자신의 죽음을 맞이한다. 그와 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이 죽어가는 자가 살아 있는 자의 맹세를 축성하는 그런 곳이 아니라면 그 어떤 축제도 열려서는 안 된다! 그와 같이 죽는 것이 최선이다. 차선은 전투에 나가 죽는 것, 그리고 위대한 영혼을 낭비하는 것이다.”(120~121쪽)
니체는 만물이 ‘영원히 回歸한다’고 말한다. 그에 의하면 우주에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역사관에서 말하는 것처럼 그런 역사의 시작과 종말이 없다. 만약에 시작이 있었다면 그 시작 앞에는 무엇이 있었겠으며, 종말이 있다면 그 다음에 오는 것은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니체의 대답은 분명하다. 우주는 오늘의 모습으로 항상 있어 왔으며 있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모든 것은 가며, 모든 것은 되돌아온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영원히 돌고 돈다. 모든 것은 시들어가며, 모든 것은 다시 피어난다. 존재의 해는 영원히 흐른다. 모든 것은 부러지며, 모든 것은 다시 이어진다. 똑같은 존재의 집이 영원히 지어진다. 모든 것은 헤어지며, 모든 것은 다시 만나 인사를 나눈다. 존재의 수레바퀴는 이렇듯 영원히 자신에게 신실하다. 매순간 존재는 시작된다. 모든 여기를 중심으로 저기라는 공이 굴러간다.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 영원이라는 오솔길은 굽어 있다.”(364쪽) 니체에 의하면 이 우주는 물질로 충만해 있는데, 이 물질들이 결합하여 다양한 사물을 낳는다. 이 물질은 제한된 양의 것으로, 따라서 이 결합의 가능성에는 수적인 한계가 있다. 인간은 이 유한한 결합의 가능성에 의하여 여러 차례 이 무한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히 거듭하여 인간으로 되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우리가 영원히 회귀한다면 어떨 것인지를 묻는다. “어느 날 낮, 혹은 어느 날 밤에 악령이 너의 가장 깊은 고독 속으로 살며시 찾아들어 이렇게 말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네가 지금 살고 있고, 살아왔던 이 삶을 너는 다시 한 번 살아야만 하고, 또 무수히 반복해서 살아야만 할 것이다. 거기에 새로운 것이란 없으며, 모든 고통, 모든 쾌락, 모든 사상과 탄식, 네 삶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크고 작은 모든 것들이 네게 다시 찾아올 것이다. 모든 것이 같은 차례와 순서로- 나무들 사이의 이 거미와 달빛, 그리고 이 순간과 바로 너 자신도, (…) 현존재의 티끌인 너도 모래시계와 더불어 그렇게 될 것이다!’ -그대는 땅에 몸을 내던지며, 그렇게 말하는 악령에게 이를 갈며 저주를 퍼붓지 않겠는가? 아니면 그대는 악령에게 이렇게 대답하는 엄청난 순간을 경험한 적이 있는가? (…) ‘너는 이 삶을 다시 한 번, 그리고 무수히 반복해서 다시 살기를 원하는가?’”
니체의 말처럼 우리의 삶이 아무런 목적과 의미도 없이 매 순간과 모든 순간이 조금도 바뀌지 않은 채 무한히 되풀이된다면, 그것은 죽음이 아예 無로 돌아가는 것보다 더욱 끔찍할 것이다. 이런 형벌은 허무주의의 가장 극단적인 형태이다. 그러면 니체는 자신의 삶과 자신의 시대가 만난 이 허무주의를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니체는 역설적이게도 영원회귀의 삶을 긍정하라고 말한다. 우리 삶의 가장 본질적인 요소인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는 우리의 운명적인 고통을 긍정하고 더 나아가 사랑할 수 있다. 이것이 니체가 말하는 ‘運命愛(Amor Fati)’이다. 인간은 필연적인 운명을 긍정하고 사랑할 때 더 위대해지고, 본래의 창조성이 발휘될 수 있다. 그래서 니체는 『즐거운 학문』에서 소리친다. “나는 필연적인 것만을 사랑하고자 한다. 그렇다! 운명애가 나의 마지막 사랑이리라!”
앞에서 보았듯이, 니체에게 있어서 삶의 중심은 대지에서 펼쳐지는 현실의 세계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사후의 천국이나 플라톤이 말하는 이데아의 세계는 허구이다. 그런 허구를 위해서 현실의 삶과 가치를 포기하거나 희생해서는 안 된다. 과거나 미래가 아닌 지상에서의 현재의 삶만이 최고의 가치이다. 그런 삶이 아무리 시련과 고난의 연속이더라도 그것을 회피하거나 좌절하지 않고, 그리스의 영웅처럼 순간순간 강인한 정신으로 최선을 다하여 극복하려고 할 때, 그리고 승리한 후에 순수한 마음으로 그것을 기뻐할 때, 그래서 거친 자연의 삶과 우리의 운명을 사랑하고 즐길 때, 우리의 힘에의 의지는 최고로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죽음을 보는 니체의 태도는 이런 기조 위에 서 있다.
니체는 죽음이 삶의 완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죽음은 고통이 아니고 축제이다. 그래서 니체는 천천히 죽고, 이 땅에서 모든 것을 참고 견뎌내라는 설교를 거부하라고 주문한다. 그 대신 삶을 누리는 법과 대지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거기에다 웃음까지 배우라고 요청한다. 그런 자들은 죽음에 대해서도 자유로우며 죽음을 맞이해서도 자유롭다. “벗들이여, 너희들의 죽음이 인간과 대지에 대한 모독이 되지 않기를 바라노라. 내가 너희들 영혼의 정수에 간곡히 바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죽음을 맞이해서도 너희들의 정신과 덕이 이 대지를 에워싸고 있는 저녁놀처럼 활활 타오르기를. 그렇지 않으며 너희들의 죽음은 실패로 끝난 것이리라.” (123~1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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