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 『우신예찬』을 읽고
구녕 이효범
침대 곁에 두고 자주 보고 싶은 책이 있다. 물론 종교를 가진 사람은 자기가 믿는 종교의 경전이리라. 나는 그런 책으로 서양의 인문학 분야에서 몇 개를 고르라면 그 중의 하나로 『우신예찬』을 들고 싶다.
『우신예찬』은 네덜란드의 신학자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Roterodamus)가 1511년에 쓴 책이다. 500년이 넘는 아주 오래된 책이어서, 문장이 길고, 정확이 이해하려면 서양 고전에 박식해야 한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그 내용은 지금 읽어도 전혀 진부하거나 낯설지 않다. 이 책은 15세기 말~16세기 초 유럽의 부패한 사회와 어리석은 사람을 재치 넘치는 해학으로 풍자한 책이다. 나는 시골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 개발로 국가가 가난에서 재건으로 도약할 때 청춘을 바친 세대이기 때문에, 시니컬하게 남을 비판하는 사람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집안이 그런대로 여유가 있는데도 친구에게 밥 한번 사지 않고 행동은 아주 개차반이면서, 거창하게 민중의 민주주의를 외치는 소위 ‘민주건달들’을 보면 속이 뒤집혔고 위선적인 사람이라고 미워했다. 그래서 어리석은 신(愚神, Moria)을 칭찬하는 이 책의 제목만 보고, 책임감을 가지고 세상에 과감히 뛰어 들어가서 힘든 노동으로 피땀은 흘리지 않고, 알량한 지식으로 선한 사람들이나 조롱하는 책이겠지 생각하고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생각이 바뀐 것은 유럽을 배낭여행할 때였다. 유럽 곳곳에서 에라스무스의 이름과 마주쳤다. 에라스무스의 고향 로테르담의 에라스무스대학은 말할 것도 없고, 내 관심을 끈 것은 학생들을 위한 에라스무스 프로그램(Erasmus Program)이었다. 이것은 1987년 유렵연합(EU) 집행위원회가 EU 11국가 약 3,000명의 대학생들에게, 자기 나라가 아닌 다른 국가에 가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교환학생 프로그램이다. 학생들이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교류하고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교환 프로그램에,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에라스무스의 이름을 붙인 것이다. 젊은이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에 이름을 붙이는 것을 보니 에라스무스가 단지 부정적이고, 비생산적인 비판을 위한 비판만을 일삼은 사람은 아니고, 무엇인가 내실이 있는 학자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에라스무스는 이 책에서 책 제목 그대로 우신을 찬양한다. 지금까지 동서고금을 가리지 않고 모든 문화권에서 강조된 덕은 知慧였다. 그런데 역설적이게도 에라스무스는 사람들이 대표적인 惡德으로 여기는 어리석음을 칭송한다. 이것은 우리의 허를 찌르는 반전이다. 이유도 그럴 듯하다. 어리석음이 생명의 근원이며 청춘과 쾌락을 가져오는 반면에(우신을 수행하는 하인들이 자아도취, 아부, 태만, 환락, 경솔, 음란, 호색이며, 머슴은 광란축제, 인사불성인 점을 생각해 보면 더욱 그럴듯함), 학식은 노쇠의 상징이며 학자나 현인은 인생에서 가장 무능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라스무스는 지혜나 학식 없이 자연에 이끌려 소박하게 사는 사람들이 가장 행복하다고 주장한다. “일체 학문과 거래를 끊고 다만 자연이 이끄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사람들 중에 가장 행복한 사람들입니다.”(『우신예찬』, 김남우역, 열린책들, 2011, p.83, 앞으로 모든 인용은 이 책에 의거함) 거꾸로 군주, 귀족, 학자, 성직자 등 소위 세상에서 잘 나가는 사람들이 자기가 똑똑하다고 자찬하지만, 그들이야말로 진짜 바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진짜 바보에 대한 에라스무스의 조롱은 품위가 있고 인문학적인 따뜻함이 스며있다.
(1) 철학자: 턱수염과 외투로 존경받으며, 자신들만이 현자입네 위세를 떨며 다른 사람들을 그림자인 양 여기는 존재. “이들은 대개 아직 젊음의 활개를 펼쳐 보기도 전에 벌써 늙어 버렸는데, 이는 냉철하고 진지한 사유 행위 등을 하느라 골머리를 썩이는 바람에 점차 호흡과 생명의 진액이 고갈되었기 때문”(pp.41~42)이다. 이에 반해 우신을 따르는 어리석은 사람은 토실토실 살이 올라 몸뚱이와 피부에는 윤기가 흐르며, 지혜로운 자들과 접촉이 없는 한 노년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한다.
(2) 인간: 동물 중에서 가장 불행한 동물이다. 다른 동물들은 자연이 부여한 한계에 만족하고 있는 반면에, 인간만이 유별나게 자신의 한계를 벗어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간 중에서 멍청이, 바보, 얼간이, 천치 등이 가장 행복한 존재들이다. 이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고통에서 해방되었고, 양심의 가책으로부터 자유로우며, 귀신 이야기에 두려워하지 않고, 목전에 다가온 불행에 떨지 않으며, 장차 다가올 행복에 들떠 나대지 않기 때문이다.(pp. 85~86)
(3) 현자: “현자들의 혀는 두 개인지라, (---) 그 가운데 하나로는 진실을 이야기하며, 다른 하나로는 그때마다 편리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현자들은 흰색도 검다 말하며, 차다 했다가 같은 입으로 금세 뜨겁다 바꾸며, 진심은 가슴속 깊이 숨겨 둔 채 거짓부렁을 지어내곤 합니다.”(pp. 88~90) 그러나 어리석은 사람은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있는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며, 말로 표현한다. 또 현자는 “유년 시절과 사춘기를 내내 학문을 익히는 데 쏟아 부었을 것이며, 인생의 가장 달콤한 시기마저 밤을 새워 노심초사 진력을 다해 학업에 헌납하였을 것이며, 그 외 인생 모든 부분에서 낙숫물만큼의 쾌락도 맛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늘 가난하고 궁핍하고 쓸쓸하고 우울했을 것이며, 자신에 대해 엄격하고 가혹하며 남들에게 신랄하고 잔혹했을 것이며, 창백하고 수척하고 몸은 쇠약하고 눈은 침침하여 조로에 早白하고 早卒 또한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p. 90)
(4) 성직에 있는 사기꾼: 재미삼아 혹은 돈벌이를 위해 마법의 주문과 기도문을 생각해낸 사람. 사람들은 이것들을 달달 외우며 재산, 명예, 쾌락, 풍요, 무궁한 건강, 장수, 정력이 넘치는 노년을 스스로에게 기원한다. 더불어 사람들은 “마침내는 천상에서 예수님 옆자리까지 소원하는데 물론 그 자리엔 최대한 나중에 가기를 바라는 즉, 악착같이 매달려도 도저히 떠나지 않을 수 없을 때까지 현세의 쾌락을 누리다가 곧바로 천국의 쾌락을 누리길 바라는 것입니다.” (p. 100)
(5) 고전어 문법 선생: ‘생각소매점’, ‘학생 바수는 방앗간’, ‘학생 형장’이라고 불리는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겁박하는 것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존재. “이들이 즐거움을 느끼는 것은, 이들 가운데 누군가가 앙키세스의 어미 이름 등 대중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단어들을 (---) 낡고 오래된 책에서 찾아낸다거나, 혹은 오래된 비석에서 닳아 보이지 않는 글씨 조각을 읽어 냈을 때입니다. (---) 이들은 얼마나 의기양양하며, 얼마나 시끄럽게 개선행진을 하며, 얼마나 떠벌린 자화자찬을 합니까!”(p.122)
(6) 시인: 전혀 쓸모없고 실없는 이야기를 가지고 어리석은 자들의 귀를 간질이는 사람.
(7) 수사학자: 많은 헛소리들은 물론이고 참으로 대단한 우스개의 이론을 전개하는 사람.
(8) 글쟁이: 책을 출판하여 불멸의 명성을 얻고자 하는 자. “글쟁이들은 기괴한 헛소리를 더없이 즐겁게 나불거립니다. 결코 밤잠을 설치는 일 없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종이에 휘갈기며, 나중에는 꿈에서 본 것까지 그대로 글자로 옮기되, 종이 말고는 비용과 수고를 들이는 일이 없습니다.”(p.127)
(9) 학자: 학자들은 “덧대고 바꾸고 치우고, 또다시 가져다 돌이키고 두들기고 친구들에게 보여주고, 또 9년을 묻어 두지만, 결코 스스로 흡족한 결과를 얻지 못합니다. 그나마 얻는 보잘 것 없는 보상은 칭찬 몇 마디, 그것도 소수의 칭찬일 뿐인데도 불구하고 이것을 얻기 위해 이들이 지새운 밤은 그 얼마며, 모든 것 가운데 가장 달콤한 잠을 설친 세월이 그 얼마며, 흘린 땀은 그 얼마며, 산고의 고통은 그 얼마입니까? 그러는 사이에 육신은 병들고 청춘은 찌들어 앞을 보지 못할 정도로 눈은 침침해지고, 쾌락은 멀리했건만 가난과 질투심에 시달리다 노년은 때 이르게 찾아오니, 요절은 물론이고 그에 못지않은 것들이 이들에게 들이닥칩니다.”(pp.126~127)
(10) 변호사: 많은 법조문들이 어디에 적용되는 것인지 에는 무관심한 채, 난해한 단어에 난해한 단어를 더하여, 결국 법학이 모든 학문들 가운데 제일 어렵다는 인상을 심어주려고 하는 자.
(11) 논리학자 내지 궤변론자: “이들은 염소 털로 양모를 만들 수 있는 지를 놓고 목숨을 걸고 끈질기게 싸우며, 싸움에 이기려고만 할 뿐 진실은 아예 안중에도 없습니다.”(p.130)
(12) 교회학자: “스스로의 모습에 취하여 스스로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내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달콤하고 그지없는 제 노래에 취하여, 복음서나 바오로의 서신을 읽는 것은 고사하고 들출 여유조차 없습니다. 이들은 따지고 물으며 쓸데없는 소리를 지껄이지만, 스스로는 교화 전체를 자신들이 떠받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p. 140)
(13) 수도사: 수도사들은 예수의 사도들의 삶을 우리에게 재현해 보여준다고 하나, “이런 모든 것들을 마치 한 치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수학적 원리를 적용하듯, 규율에 따라 행한다는 사실입니다. 신발 끈의 매듭 수, 각 수도복의 색깔, 각 수도복의 형태 차별, 허리띠의 소재와 한 가닥의 너비, 웃옷에 달린 쓰개의 형태와 크기, 삭발 기준 손가락 몇 마디까지, 수면 단위 몇 시간까지 정해져 있습니다. (---) 이런 하찮고 자질구레한 규율들로 이들 쓸모없는 자들은 스스로를 다른 사람들과 구별하는 한편, 서로가 서로를 비방하여 남이 조금이라도 달리 염색한 옷을 입는다거나 조금이라도 더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었다는 이유로, 스스로 사도의 은총을 선포한다고 떠들던 이들이 끔직한 비극을 초래합니다.(p.144)
(14) 군주: 아첨에 귀를 기울이고, 열심히 사냥하고 명마를 사육하고, 행정과 군인 요직을 판매하고, 불공정한 일을 공정하게 포장하고, 공공의 이익에 반하는 개인적인 유익만을 추구하고, 쾌락에 흠뻑 젖어 학문과 사유와 진리를 혐오하고, 국가의 안녕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측량하는 인간.
(15) 궁중귀족: 금붙이며 보석들이며 자줏빛 관복 등 덕과 지혜를 상징하는 장신구들로 몸을 휘감은 반면, 정작 덕과 지혜의 연마 자체는 남들에게 양보하는 사람.
(15) 교황: 흡사 무대 의상을 걸치고 예배를 거행하고, 토지와 도시, 세금, 통행료와 권력을 누리며, 장사치의 법률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며, 억지 해석으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왜곡하며, 역병 같은 삶으로 그리스도를 살해하고 있다.
(16) 주교나 사제: 수익을 올리는 데 밤낮을 가리지 않으며, 그와 관련된 법률에 정통한 반면, 커다란 부담을 져야 할 경우 영리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가한다.
에라스무스는 자기가 예시한 부류의 사람들이 모두 邪惡하다고 비난하지는 않았다. 지극히 소수가 그런 성향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누구를 구체적으로 지적하여 상처를 준 것이 아니고, 웃음과 재치를 통해 중세 교회와 사회를 개선하고자 하였다. 이런 점은 에라스무스가 마르크스보다는 디오게네스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디오게네스는 인위적인 문화는 위선을 가져와 악하다고 보고, 정직한 개를 찬양하며, 아무 것도 소유하지 않고, 영혼의 자유를 추구하며, 통 속에서 살았다. 그가 얼마나 당당하며 자유로운 존재였는지는 알렉산더 대왕과의 대화에 잘 나타나있다. 그러나 디오게네스는 당대의 문화와 문명을 거부했지만, 마르크스처럼 자본주의를 전복하고 공산사회를 가져오겠다는 혁명가의 모습은 없다. 그의 철학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총 냄새가 나지 않는다. 이점에서 에라스무스도 비슷하다. 그는 비록 중세 교회의 개혁의 필요성은 역설했지만, 막상 루터 등의 종교개혁의 바람이 불 때 가담하지 않았다.
서양인이 아니고, 기독교 종교와 문화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지 않은 나로서는 에라스무스가 말하는 마지막 부분, 즉 기독교인의 어리석은 삶에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는 “기독교는 일종의 어리석음과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종교이며 지혜와는 무관한 종교”(p.189)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그는 논거를 제시한다. (1) 성사에서 즐거움을 얻는 것은 주로 철부지들, 노인들, 아낙네들 그리고 순진한 사람들이다. (2) 기독교의 초창기 교부들은 놀라우리만큼 순진무구함을 갖고 있었던 반면, 문자 풍월은 대단히 멀리 하였다. (3) 세상에는 기독교적 신앙의 열정에 전적으로 스스로를 헌신하는 사람들만큼 어리석은 사람들이 없다.
에라스무스는 (3)에서 진실하고 독실한 기독교인들을 ‘어리석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기독교인들이 어떤 사람들인지를 설명한다. “이들은 자기 재산을 모두 헌납하며, 세상의 손가락질에 괘념치 않으며, 속임을 당해도 참으며, 친구들과 원수들을 가리지 않으며, 쾌락을 멀리하며, 굶주림과 불면과 눈물과 고통과 천대를 물리도록 받으며, 세상사를 조롱하며, 오로지 최후의 날을 고대하는 바, 다시 말해 모든 세속적 감각들은 마비된 것처럼 보이는데, 마치 스스로의 육신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의 영혼으로 사는 듯 보입니다.”(pp.189~190) 사실 기독교인들의 이런 모습은, 세속적인 비종교인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어리석기 짝이 없다. 그러나 에라스무스는 이런 기독교인들이 수많은 고통을 불사하고 찾는 행복은, 일종의 어리석음과 狂氣라고 용기 있게 선언한다. 그리고 플라톤을 인용하여, 사랑의 광기야말로 모든 것 가운데 최고의 행복이라고 주장한다.
동양의 불교는 지혜의 종교라고 한다. 지혜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緣起로 구성되어 있으며, 나도 불변하는 실체가 아니라 다섯 가지 요소가 연기로 쌓여져 있어, 결국은 無我라는 것이다. 내가 무아라는 것을 진정으로 깨달을 때 나는 세상의 고통으로부터 근본적으로 해방될 수 있다고 불교는 가르친다. 이에 반해 기독교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종교이다. 예수의 제자들인 기독교인들은 날마다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라야 한다. 이것은 타락한 자아를 부정하고 새로운 공동체인 교회에 들어와 예수의 인격과 가르침에 헌신하라는 말이다. 그러나 자기를 부인하라는 명령 뒤에는 자기를 긍정하라는 암시적인 명령도 있다. 그것은 예수가 그랬듯이 사람을 섬기는 일이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 은혜인 구원을 향해 가는 기독교의 십자가의 길이, 에라스무스의 반어법(?)처럼 ‘어리석음’이나 ‘광기’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것을 학자처럼 논한다면 에라스무스는 또 조롱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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