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범의 시

재미난 후기가 달린 시(5, 술과 스핑크스와 개)

이효범 2019. 9. 12. 18:42

o 술과 스핑크스와 개

 

또박, 이효범

 

어제 밤 꿈에

스핑크스가 나타났다.

내 질문은 너무 낡아서

이제 새롭게 묻겠다.

시도 때도 없이

어지러운 물을 마셔대는 동물은 누구인가?

나는 나라고 대답했다.

스핑크스가 째려보았다.

많이 마시면 어떻게 되느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웃으며 개가 된다고 말했다.

전설처럼 스핑크스가 땅에 떨어졌다.

당신은 당신을 안다.

그렇다, 당신은 개다.

나는 개를 잡아먹지 않겠다.

나도 지지 않고 스핑크스에게 물었다.

당신도 어지러운 물을 먹는가?

사람을 먹는다고 했다.

그렇다, 당신은 돌이다.

그러니 세상에서 제일 맛없는 사람을 먹는다.

사람의 몸은 항생제로 기른 뱀장어 같고

사람의 정신은 터지지 않은 폭탄이다.

지금 당장 어지러운 물을 마셔라.

사람만이 마시는 묘약을 마셔야

개가 사람으로 보인다.

스핑크스는 고개를 숙이고 미세 먼지 사이로 돌아갔다.

내일 스핑크스가 다시 오면 말하겠다.

어제 나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고.

맨 정신으로 할 말은 따로 있다고.

 

o 후기:

나는 술을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아마 어머니의 영향 때문인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술을 많이 하시는 아버님 때문에 고생이 심했습니다. 그래서 절대 자식은 술을 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어린 나이에도 몸을 이기지 못하고 술을 마시는 아버지 모습이 그리 좋게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술 할 나이가 되니까 아버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골에서 12마지기 논농사

지시며 겨울에 농부가 할 일이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그 때는 비닐하우스도 없었습니다. 감수성 많은 아버지로서는 술 이외에 인생을 즐길 만한 일이 그리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나는 농사는 아니지만 학교에 근무하면서 여러 보직을 맞게 되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외식이 잦다보니 술 실력이 꽤 늘었습니다.

그런데 술은 어렸을 때 아버지 밑에서 배우는 것이 옳았습니다. 나는 술버릇이 그리 좋은 편이 아닙니다. 운다거나 주먹을 날려 유리창을 깨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기분이 업 되어서 큰 소리로 떠든다거나, 기고만장해서 자신이 마치 영웅이나 된 것처럼 안 낼 술값을 먼저 지불하는 것은, 집에 있는 마누라가 알면 기겁할 일이지만, 어쩌면 스트레스도 날려버리고 남에게도 이로워서 그리 문제될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걱정이 되는 것은 수첩에 있는 사람들한테 밤늦게 전화나 문자를 날린다는 겁니다. 다음 날 맨 정신이 되면 어제 술에 취해 감정이 넘쳐 그리움으로 한 행위들 때문에 등짝이 오싹해집니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그런 못된 술주정들이 지방신문이나 학교신문에 나지는 안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미투(Me too)가 날뛰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아무리 제가 나이가 들었다고는 하나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카카오톡의 카톡방들이 나를 살리고 있습니다. 어쩌다 술에 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 나는 슬픈 눈으로 수첩을 뒤져 그리운 사람들에게 전화를 거는 대신에, 카톡방에 되지도 않은 문자로 쓰잘데 없는 것들을 하소연 하는 것입니다. 나도 이제 상당히 똑똑해졌고 영악하게 변했습니다. 그러니 카톡방 친구들이여 제발 나를 용서해주세요. 내가 이상한 글을 그냥 올리는 것이 아닙니다. 고약한 술버릇이 스스로 살아남기 위해 안전한 곳으로 전이된 것입니다